릴로

쿠구구구궁!

하늘을 뒤덮은 조각구름들이 순식간에 검푸른 빛으로 물들며 대지를 짓눌렀다. 제라드가 고대 흑마석의 금기된 주술로 깨워낸 추락한 키메라 군대. 그 거대한 괴수들이 내뿜는 기괴한 포효 소리가 윈터헤이븐 요새의 장벽을 뒤흔들며 칼바람처럼 몰아쳤다.

방금 전까지 요새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던 연분홍빛 결계 너머로,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얼음의 기운이 스멀스멀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추워라…….”

레티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리며 제 가슴팍을 파고드는 모카를 꼭 껴안았다. 모카는 꼬리 끝에서 자그마한 불꽃 스파크를 탁탁 튀기며 캬아아, 하고 먼 하늘의 괴수들을 향해 잔뜩 날을 세웠다. 보풀보풀한 털이 곤두선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레티샤는 떨리는 손으로 아기의 작은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때, 등 뒤에서 단단하고 뜨거운 품이 그녀의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레티샤.”

귓가에 닿는 디트리히의 낮고 잠긴 목소리가 마치 한겨울 밤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처럼 아늑하게 울렸다.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드는 순간, 얼어붙어가던 레티샤의 손끝으로 맑고 정제된 마기의 열기가 사르르 스며들었다. 영혼 보육 대장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대가로 찾아왔던 지독한 한빙증이, 그의 깊은 숨결 한 번에 봄눈 녹듯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전해주는 살가운 온기가 없었다면, 자신은 진작에 차가운 서리 인형이 되어 바스러졌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따스하옵니다…….’

레티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차가운 얼음 성벽의 주인이라 불리는 북부 공작이, 정작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깃털 이불보다 더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적들의 포격이 시작됩니다!”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던 기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고요한 정적을 깼다.

하늘을 올려다본 레티샤의 서늘한 눈동자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담겼다. 제라드의 지휘 아래 정렬한 제국 연합군 장수들이 주문을 외우자, 키메라들의 검은 날개 끝에서 수천, 수만 개의 얼음 화살이 비구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닿는 모든 생명체의 피를 얼려 정지시키는 부정한 저주의 한빙(寒氷) 화살이었다.

장벽을 두드리는 얼음 화살의 공세에 윈터헤이븐의 파스텔톤 결계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파자작, 파작.

맑고 투명했던 결계의 표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연분홍빛 마법 장막이 어둡게 변해갔다. 이대로 가다간 결계가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고, 그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기 마수들과 요새의 사람들이 전부 동사할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레티샤의 시야 속으로 따스한 살구색 빛무리와 함께 반짝이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시스템: 돌발 위기! ‘제라드 군세의 광역 한빙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내: 요새 하부의 온돌 마력로를 가동하여 정화 열기를 방출하십시오.]** **[솔루션: 온돌 보일러 마석의 출력을 한계돌파(Overclock)하면 전장을 뒤덮은 한기를 상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솔루션 실행 시 시전자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되는 극심한 한빙증이 유발됩니다.]**

눈앞의 장부를 읽어 내린 레티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계돌파라니. 지금보다 더한 추위가 몸을 덮쳐온다면 정말로 심장이 멈춰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전생에서 차가운 골방에 홀로 버려져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외로이 죽어가던 그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무서운 싸움터에서 벗어나, 아기 마수들만 품에 안고 아무도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다는 회피적인 본능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힘없이 낑낑거리며 제 목덜미에 젖은 코를 비벼대는 아기 그리핀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녀석들의 맑고 순수한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도망치려던 마음에 단단한 빗장이 걸렸다. 내가 도망치면 이 아이들은 차가운 제국의 구두창 아래 짓밟혀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그것만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디트리히 님.”

레티샤가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턱 끝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요새 지하 요새의 도면을 분석할 때 보았던 비밀 격리 벽과 고대 열풍관의 흐름을 기억하옵니다. 이 요새 아래에는 단순한 보일러가 아니라, 영지 전체를 덥힐 수 있는 거대한 마력 온돌 장치가 잠들어 있어요. 제가 그것을 깨우겠사옵니다.”

디트리히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레티샤가 이 능력을 쓸 때마다 얼마나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레티샤의 가냘픈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안 된다. 네 몸이 버티지 못해.”

“괜찮사옵니다. 제 곁에는…… 디트리히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레티샤가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작은 손을 겹쳐 잡으며 봄날의 햇살처럼 맑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담긴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이 디트리히의 얼어붙은 심장을 거차 없이 뒤흔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비장한 각오로 반짝이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기댔다.

“……내 온기를 전부 가져가도 좋다. 그러니 제발 무리하지 마라.”

“예, 믿을게요.”

레티샤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요새 중앙 정원에 묻혀 있는 온돌 보일러의 제어 마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영혼 보육 대장의 제어 권한을 뇌리에 강하게 새겨 넣었다.

‘제어 권한 개방, 온돌 마력로 출력 300%로 한계 돌파하옵니다!’

**[시스템: 명령을 수신했습니다. 온돌 보일러 마석의 출력을 한계돌파합니다!]** **[경고: 급격한 한빙증 발작이 시작됩니다!]**

파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레티샤의 손끝에서부터 새하얀 서리가 피어오르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입술이 단숨에 파랗게 질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찢어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만진 마석을 시작으로 요새의 바닥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궁!

윈터헤이븐 요새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고대 대피 방어벽의 마력선들이 일제히 깨어나며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정원의 잔디밭 아래, 성벽의 벽돌 틈새, 그리고 마수들이 머무는 보육원의 바닥 구들장까지. 요새 전체가 거대한 온돌방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치이이이이익-!

요새 바닥에 쌓여 있던 묵은 눈과 얼음들이 순식간에 수증기로 변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단순히 물이 끓는 김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티샤의 부드러운 마음과 보육 대장의 에너지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은은한 살구색과 파스텔 민트색의 따스한 정화 열기였다. 요새 전체에서 피어오른 몽환적인 안개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하늘을 뒤덮은 차가운 얼음 구름을 향해 뻗어 나갔다.

달콤한 바닐라 향과 갓 구운 도토리의 고소한 향기가 가득 담긴 김이 전장 전체로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어…… 어라?”

성벽 너머에서 얼음 화살을 쏘아 대며 기세를 올리던 제국 연합군의 장수들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쏘아 보낸 날카롭고 사악한 빙결 화살들이, 요새에서 뿜어져 나온 파스텔빛 정화 열기에 닿자마자 힘없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팅, 팅거리며 단단하게 날아오던 살상용 얼음 덩어리들이 공중에서 사르르 녹아내려, 마치 봄날의 따뜻한 단비처럼 부드러운 물방울이 되어 흩날렸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전장을 얼려버리려던 혹독한 한기가 순식간에 따스한 봄바람으로 치환되는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얼어붙어 있던 요새 앞마당의 서리 벌판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촉촉한 진흙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마법이냐!”

제국 연합군의 선봉에 서 있던 기사단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자랑인 북부 특화용 전투마들이 따뜻하게 녹아내린 진흙밭에 발이 푹푹 빠지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철갑으로 무장한 군화 속으로 차가운 얼음물 대신, 마치 잘 데워진 욕조 물처럼 뜨뜻미지근하고 포근한 온수가 스며들자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전투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전장에, 뜬금없이 노곤하고 나른한 훈풍이 불어닥쳤다.

“코가…… 코가 간지럽군. 이 달콤한 단풍 시럽 같은 냄새는 대체 뭐지?”

“몸이…… 왜 이렇게 노곤하지? 갑자기 피로가 밀려오는 것 같다.”

제국의 병사들은 칼을 쥔 손에서 힘을 빼며 눈을 깜빡였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악에 받쳐 싸우려던 그들의 투지가, 요새 전체를 감싸 안은 거대하고 고아한 파스텔 빛 무지개 방벽을 바라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늘을 수놓은 분홍빛과 연보랏빛의 몽환적인 방벽은 마치 신의 축복을 받은 성역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장엄하면서도 더없이 무해하고 따스한 풍경 앞에, 병사들은 무기를 내린 채 경외심어린 눈빛으로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이곳은…… 우리가 침범해서는 안 될 신성한 땅이 아닌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해…….”

전열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공격을 가하려던 제국 연합군의 장수들은 영지를 감싼 거대한 난방 열역학 정화막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아무리 강력한 얼음 마법을 쏟아부어도, 그저 바닥의 구들장을 더 뜨겁게 달굴 뿐인 땔감으로 변해버리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하하! 맛이 어떠냐, 이 비겁한 황실 놈들아!”

요새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리엘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빗자루를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무서워서 식탁 밑에 숨어 울던 겁쟁이 보조 보육사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렁찬 외침이었다.

“우리 레티샤 님이 만든 온돌은 제국의 그 어떤 추위보다 뜨겁고 위대하다고요!”

요새의 기사들과 영민들 역시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껴안았다.

하지만 그 따스한 환호성 속에서, 오직 레티샤만이 극심한 추위에 몸을 떨며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온돌의 출력을 한계 돌파한 대가로, 그녀의 심장은 서서히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푸르스름한 한기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의식을 흐리게 만들려 했다.

“레티샤!”

디트리히가 다급하게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차가운 광기가 흔들리며 절박한 애정으로 뒤바뀌었다. 그의 상태창 구석에 잠겨 있던 ‘마수 인도자’의 붉은 혈통 표식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공명하며, 그의 몸속에 흐르는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마기를 레티샤의 체내로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흐읏…….”

레티샤는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과 이마, 그리고 차갑게 식어버린 입술 위로 다급하게 겹쳐졌다. 닿는 곳마다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전해지며 얼어붙어가던 영혼을 뜨겁게 달궜다.

그는 냉혈한 북부의 대공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가장 위태롭고 외로운 결핍자이자, 유일한 구원자였다.

“하아, 하아…….”

디트리히의 품 안에서 겨우 숨을 되찾은 레티샤가 가늘게 눈을 떴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봄바람처럼 달콤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모카 역시 가릉거리며 제 온기를 보태기 위해 꼬리로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침내 한빙증의 고통이 가라앉고 안정이 찾아왔을 때, 레티샤는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제라드 크로이츠.

성경 구절을 입에 담으며 늘 온화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공들여 준비한 추락한 키메라의 한빙 공세가 겨우 ‘바닥 난방’ 따위에 완벽하게 막혀버렸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모양이었다.

“이…… 하찮은 보육사 년이 감히 내 완벽한 계획을!”

제라드의 목소리가 광기에 젖어 찢어지듯 울려 퍼졌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품속에서 검붉은 빛을 내뿜는 고대 유물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키메라들의 이성을 억누르고 통제하던 ‘괴수 제어 고대 석판’이었다.

“제라드 님! 제어 석판을 무리하게 기동하면 키메라들이 폭주합니다!”

부하 기사의 다급한 만류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이성을 잃은 제라드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으로 그 귀중한 고대 유물을 바닥에 내리쳐 산산조각 내버렸다.

쨍그랑-!

유물이 깨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던 수십 마리의 추락한 키메라들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어력을 잃고 완벽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괴수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요새의 파스텔빛 장막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진짜 광기로 물든 괴수들이, 장벽 안쪽의 요새를 향해 무차별적인 돌격을 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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