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금 이 순간…… 황실이 파견한 중앙 정규 기사단 삼천 명이, 이 윈터헤이븐 요새를 사방에서 포위 완료했다.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원형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단 말이다!”

피를 토해내며 읊조리는 살수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부엌 바닥을 긁는 쇳소리처럼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레티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방을 에워싼 삼천 명의 정규 기사단이라니. 제국이 마수를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보낸 칼날이 마침내 이곳, 윈터헤이븐의 목덜미에 닿은 것이었다. 창밖의 밤하늘은 흩날리는 백설 사이로 수천 개의 붉은 횃불이 장막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늑대 무리가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빛내며 요새를 노려보는 듯한 형국이었다.

쿵, 쿵, 쿵.

땅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진동이 윈터헤이븐의 오래된 석조 바닥을 타고 레티샤의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이 가식적인 성황청의 사냥개들이 결국 끝을 보려 하는군.”

디트리히의 목소리는 밤바람보다도 차갑고 고요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며 부엌 안의 집기들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서리 서린 검푸른 마기가 그의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흩날리며, 밤하늘의 차가운 오로라처럼 위압적인 빛을 발했다.

디트리히는 짓밟고 있던 살수의 등허리를 구두굽으로 짓이겼다. 우지끈, 하는 뼈가 맞춰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살수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감히 내 영지에서 주인의 목숨을 논해? 제라드 그 위선자 놈에게 전해라. 에스카르트의 영토에 발을 들인 침입자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쉭-!

디트리히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지닌 고유의 검푸른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흐르며 날카로운 파동을 그렸다. 그는 가차 없이 살수의 마력혈을 찔러 기절시킨 뒤, 부엌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을 향해 매섭게 호령했다.

“바실, 당장 성문 쪽 철갑 방어벽을 기동해라! 요새의 모든 기사단은 외벽으로 집결한다. 침입자가 단 한 걸음이라도 성벽을 넘는다면, 즉시 사살하라!”

“예, 공작 전하!”

기사가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뒤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레티샤는 알고 있었다. 윈터헤이븐의 철갑 방어벽만으로는 삼천 명에 달하는 황실 정규 기사단의 파상 공세를 오래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제라드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기사단이라면 단순한 무력 충돌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마수를 도살하기 위한 은밀한 독극물이나 고대 성유물이 동원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아이들이…….’

레티샤는 가슴을 졸이며 품 안의 아기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불꼬리다람쥐 모카가 꼬리의 불꽃을 잔뜩 부풀린 채 레티샤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찌익, 찌익 하며 평소와 달리 한껏 경계 어린 울음소리를 내는 모카의 작은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곁에서 온순하게 정화된 아기 그리핀 역시 솜털 같은 날개를 파닥이며 레티샤의 다리에 둥근 머리를 비벼댔다.

겁에 질린 아이들의 온기가 닿는 순간, 레티샤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지하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

지난날 요새의 낡은 도면 뒤편에서 발견했던 고대의 비밀 설계도였다. 윈터헤이븐은 단순한 요새가 아니었다. 고대 마수 인도자들의 혈통과 공명하여 영지 전체를 감싸 안을 수 있는 거대한 결계 장치가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 결계를 완벽하게 가동하기 위해서는 요새에 안착한 마수들의 순수한 마력과, 이를 하나로 묶어줄 강력한 매개체가 필요했다.

‘내가 해야 해. 나만이 이 아이들을 지킬 수 있어.’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보따리를 싸서 도망치고 싶어 하던 레티샤의 회피적인 내면 깊은 곳에서, 아이들을 잃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싹텄다. 버림받는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 조그만 생명체들이 차가운 철검에 짓밟히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레티샤는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웅-

그녀가 집중하는 순간, 눈앞에 은은한 파스텔톤 빛무리가 아른거리며 [영혼 보육 대장]의 시스템 UI가 허공에 스르륵 펼쳐졌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수놓은 듯한 연분홍빛과 부드러운 민트색 인터페이스가 어두운 부엌 안을 감미롭게 밝혔다. 향긋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과 갓 구운 도토리의 고소한 향기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지며 피비린내 나던 부엌의 공기를 순식간에 정화해 나갔다.

**[시스템: '영혼 보육 대장' 특별 네트워크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안내: 요새 내에 등록된 정화 마수들과의 공명 링크를 시작합니다.]** - 등록 마수 1: '모카' (불꼬리다람쥐 - 정서 안정) - 등록 마수 2: '아기 그리핀' (그리핀 - 독성 정화 완료) - 대기 상태의 하급 마수들: 24개체 (정화도 80% 이상)

**[솔루션: '고대 요새 수호 결계' 기동]** - 실행 조건: 정화된 마수들의 마력 연동 및 마수 인도자의 피가 흐르는 매개체와의 접촉. - 경고: 솔루션 실행 시 대가로 사용자에게 아주 강력한 '급성 한빙증'이 발현됩니다. 체온이 위험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한빙증 따위, 지금은 무서워할 때가 아니야.’

레티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지독한 추위가 벌써부터 손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시스템 화면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모카야, 그리고 아가야. 나에게 힘을 빌려줘. 이 요새를, 우리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지킬 수 있게.”

레티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바닥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자 모카가 갸릉거리며 레티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조그만 앞발을 포개어 얹었다. 아기 그리핀 역시 삐약이는 소리를 내며 레티샤의 팔뚝등에 둥근 부리를 가볍게 맞댔다.

징-!

그 순간, 요새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레티샤의 시야 속에서 요새 전체를 관통하는 마력의 흐름이 입체적인 격자 무늬로 떠올랐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모든 정화 마수의 마력을 대장 네트워크로 연동하기 시작했다.

“모두 함께…… 이어지는 거야.”

레티샤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연분홍빛 마력이 바닥의 균열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빛줄기는 요새 구석구석, 마수들이 잠들어 있는 보육실과 지하 마구간까지 순식간에 연결되었다.

웅, 웅, 웅!

요새 곳곳에 있던 마수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사나운 야수성이 아닌, 소중한 안식처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하고 따스한 의지가 담긴 울음소리였다. 마수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마력의 빛무리들이 요새의 외벽을 타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겨울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봄날의 축제 불꽃놀이 같았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연분홍빛과 싱그러운 민트색, 그리고 은은한 살구빛의 장막이 윈터헤이븐 요새 전체를 둥글게 감싸 안으며 거대한 보호 장벽을 형성해 나갔다.

“이, 이 빛은 대체……?”

외벽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던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카롭고 포악한 마기가 아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따스하고 포근한 온기가 대지를 감싸 안고 있었다. 황실 기사단의 삼천 명의 군세가 뿜어내던 살벌한 살기가 그 파스텔톤 장막에 부딪쳐 눈 녹이듯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그러나 기적을 만들어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아…… 윽……!”

레티샤의 입술에서 하얀 김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전신이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부터 시작된 서리가 순식간에 팔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향해 차가운 가시를 뻗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얼음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레티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갔다.

스르륵,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찰나였다.

“레티샤!”

강인하고 거친 손길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하게 낚아챘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지독할 정도로 정제된 마기와 화끈한 열기가 레티샤의 등 뒤에서부터 포근하게 밀려들었다. 디트리히였다. 그는 쓰러지는 레티샤를 품에 안고, 그녀의 차가운 뺨을 자신의 따뜻한 목덜미에 묻게 했다.

“또 이 미련한 짓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디트리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화가 나 있으면서도, 짓눌린 안도감과 애타는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공작…… 님…….”

레티샤는 오들오들 떨며 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쥐었다. 한빙증의 고통 속에서 디트리히의 품은 유일한 구원의 밧줄이었다.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쿵쿵하며 레티샤의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결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고대 수호 결계의 핵심 동력원인 공작가 혈통의 마기가 아직 완전히 융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트리히가 뿜어내는 마기는 여전히 폭주와 정화를 반복하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계가 유지되지 못하고 깨어져, 디트리히 역시 마력 과부하로 쓰러질 위험이 있었다.

‘안 돼. 공작님마저 고통받게 둘 순 없어.’

레티샤는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떨리는 손을 들어 디트리히의 넓은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얹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한기가 흘러들었지만, 디트리히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작은 손을 터질 듯 꽉 맞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로 정제된 뜨거운 마기가 레티샤의 얼어붙은 혈관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스파크가 튀듯 두 사람의 마력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시스템: '마수 인도자'의 정제된 마기와 보육 대장의 핵심 에너지가 공명합니다.]** **[안내: 절대적인 온기 순환이 완성되었습니다! 결계의 출력이 극대화됩니다.]**

파아아앗-!

두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찬란한 황금빛이 연분홍빛 장막과 뒤섞이며 윈터헤이븐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서로를 향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겠다는 단단한 갈망이 영혼 보육 대장의 기적과 만나 영지 전체를 감싸는 신성하고 웅장한 방어막을 내뿜었다. 삼천 명의 황실 기사단이 쏜 화살과 마법 공격이 장막에 닿는 순간, 마치 봄날의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리는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완벽한 무력화.

제국의 무자비한 철검도, 제라드의 사악한 음모도 이 포근하고 거대한 온기의 장벽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디트리히의 품 안에서 온기를 회복한 레티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뺨에 닿은 디트리히의 숨결이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살았군요.”

레티샤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디트리히는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평소의 냉랭한 표정 뒤에 감춰두었던 깊은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네가 또 한 번 이 영지를 구했다, 레티샤.”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감정이 마침내 그 어떤 장벽보다 단단하게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요새의 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모카는 레티샤의 품에 안겨 가릉거리며 꼬리를 살랑였다.

그러나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갑자기 요새를 둘러싼 거대한 설산의 절벽 너머에서, 대지를 찢어발기는 듯한 불길한 진동과 함께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요새를 비추던 따스한 파스텔톤 결계의 바깥쪽, 차가운 눈보라를 뚫고 솟아오른 것은 황실 기사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괴하게 뒤틀린 날개와 검붉은 가시뼈가 돋아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볼 수 없는 거대한 괴수들이었다. 제라드가 고대 흑마석의 사악한 마력을 주입해 강제로 부활시킨 전설의 괴수, ‘추락한 키메라’ 군대였다.

크아아아아아윽-!

하늘을 찢는 기괴한 포효 소리가 눈보라와 함께 윈터헤이븐의 장막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거대한 키메라들이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요새를 향해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채 전진해 오고 있었다.

진짜 절망적인 사투가, 이제 막 요새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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