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투명한 독액이 우유의 하얀 표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동그란 파문이 번져 나가며 달콤하던 바닐라 빈의 향기가 순식간에 비릿한 탄내로 얼룩졌다.
제라드의 심복 살수는 입꼬리를 뱀처럼 비틀어 올렸다.
“이것으로 에스카르트의 더러운 짐승들은 모두 숨통이 끊어지겠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요새의 주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창틈으로 스며든 푸른 달빛만이 은색 우유통의 잔인한 표면을 차갑게 비출 뿐이었다. 살수는 품속으로 빈 유리병을 밀어 넣고는, 아무런 발자국 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주방 선반 구석, 레티샤가 직접 짠 털실 바구니 속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
살수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달콤한 밤꿀 냄새가 나던 바구니 틈새로, 타오르는 태양을 닮은 붉은 안광 두 개가 번뜩이고 있었다.
모카였다.
평소라면 레티샤의 품에 안겨 도토리를 오물거리며 갸릉거렸을 작은 몸집의 불꼬리다람쥐가, 지금은 등털을 바짝 세운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모카의 예민한 후각은 우유통에서 풍겨 나오는 치명적인 맹독, ‘검은 과부의 눈물’이 가진 썩은 늪지대의 냄새를 정확히 짚어냈다.
이 우유는 엄마가 자신과 아기 그리핀을 위해 온종일 약초를 달이고 염소 젖을 짜서 만든 소중한 보물이었다.
감히 저 비열한 인간이 엄마의 정성을 더럽혔다.
“캬아아아악!”
모카가 바구니를 박차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꼬리 끝에서 붉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며 주방의 어둠을 붉게 물들였다.
“쯧, 하찮은 쥐새끼가……!”
살수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휘둘렀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모카의 작은 귀끝을 스쳤다. 하지만 모카는 물러서지 않았다. 녀석의 목적은 살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탁!
모카의 단단한 앞발이 은빛 우유통의 모서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무거운 우유통이 기우뚱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얀 우유가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중 일부가 공중에서 흩뿌려졌다.
쪼르륵.
그리고 모카는, 흩날리는 우유 방울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살수가 타고 간 독극물이 섞인 하얀 액체가 모카의 작은 목구멍 속으로 가감 없이 흘러 들어갔다.
“모카야!”
마침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서던 레티샤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모카의 작은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얀 거품 대신 검붉은 마력이 모카의 입가에서 피어올랐다. 검은 과부의 눈물은 마수의 심장을 단숨에 얼려 터뜨리는 최악의 극독이었다.
“안 돼, 안 돼……!”
레티샤는 주저 없이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이 찧어 멍이 드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품에 안아 든 모카의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있었고, 불꽃처럼 붉던 꼬리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며 잿빛으로 변해 갔다.
그 가녀린 숨결이 손끝에서 바스러지려 하자, 레티샤의 심장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듯했다. 전생에서 버려지고 홀로 남겨졌던 그 지독한 고독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또 내 곁의 존재가 사라지려 하는가. 내가 이 아이를 지키지 못하는 것인가.’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두 눈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모카의 젖은 털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레티샤의 망막 위로 찬란한 파스텔 톤의 환영이 번쩍이며 펼쳐졌다.
[시스템: ‘영혼 보육 대장’이 긴급 활성화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분홍색과 민트색의 빛나는 홀로그램 장부가 거칠게 흔들렸다.
================================== [대상: 불꼬리다람쥐 ‘모카’] - 상태: 치명적인 맹독 ‘검은 과부의 눈물’ 중독 (생존율 0.7%) - 감정: 엄마를 지켰다는 안도감, 타들어 가는 고통. - 잠재 결함: 잠겨 있는 전설의 신수(神獸) 유전핵. - 솔루션: 영혼 보육 대장의 절대적 정화 솔루션 실행. ※ 경고: 솔루션 실행 시 시전자에게 극심한 ‘한빙증’ 발작이 강제 시전됩니다. 체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급강하합니다. 감당하시겠습니까? ==================================
‘한빙증.’
뼛속까지 얼어붙어 영혼이 조각나는 듯한 그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니. 레티샤의 온몸이 본능적인 공포로 잘게 떨렸다. 갈등이 닥쳐오면 늘 보따리부터 싸서 도망치고 싶어 하던 그녀의 유약한 자아가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이 무서운 요새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 버리라고.
하지만 품 안에서 “뀨우……” 하며 마지막 신음을 뱉는 모카의 작은 앞발이 레티샤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 작고 애처로운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 회피하고 싶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 아이를 잃는다면, 설령 도망쳐 살아남는다 한들 그곳이 진정한 내 집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행해.”
레티샤가 이를 악물고 이를 덜덜 떨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장, 실행하라고……!”
[시스템: 절대적 정화 솔루션을 실행합니다.] [디메리트 발생: 시전자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화아아앗!
주방 전체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주방 벽면에 피어오르던 파스텔빛 민트색 마력이 서리꽃으로 변해 사그라들었다. 레티샤의 손끝부터 시작해 팔목, 어깨까지 순식간에 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으, 윽……!”
심장이 얼어붙는 고통에 레티샤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김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서리가 공중에 흩날렸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모카를 안은 두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때였다.
모카의 심장 부근에서 작은 황금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스템: 모카의 상태창에 잠겨 있던 ‘전설의 신수 유전핵’이 외부 자극(맹독)과 시전자의 절대적 정화 온기에 반응하여 해금됩니다!]
스르릉,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맑은 소리가 주방 가득 울려 퍼졌다.
체온을 잃어가던 모카의 몸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평범한 다람쥐의 외형을 하고 있던 녀석의 몸 주변으로, 레몬 옐로 빛깔의 찬란한 황금색 오라가 폭풍처럼 회오리쳤다.
“저, 저게 대체 무슨……!”
그늘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살수의 눈이 경악으로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모카의 몸집이 우아하게 부풀어 올랐다. 등 뒤로 환상적인 황금빛 날갯짓을 닮은 잔상이 어른거렸고, 타버렸던 붉은 꼬리는 이제 단순한 불꽃이 아닌, 세상을 정화하는 신성한 수호의 염화(炎花)로 가득 채워졌다.
단순한 마수가 아니었다. 역사서의 먼지 쌓인 페이지 속에나 존재하던 고대 정화 신수, ‘황금 화염의 수호수’가 눈앞에서 각성한 것이었다.
“뀨우우우-!”
모카가 맑고 장엄한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녀석의 몸속을 헤집던 검은 독기가 황금빛 불꽃에 닿자마자 하얀 연기가 되어 증발해 버렸다. 검은 과부의 눈물이라는 최악의 맹독조차, 각성한 신수의 신성한 정화력 앞에서는 한낱 가벼운 땔감에 불과했다.
완벽한 정화였다.
독기를 완전히 흡수해 제 힘으로 치환한 모카는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오들오들 떨고 있는 레티샤를 향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황금빛 온기가 레티샤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아……”
뼛속까지 시려 오던 한빙증의 고통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레티샤는 볼에 닿는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에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다가온 모카가 황금빛 꼬리로 레티샤의 뺨을 간지럽히며 볼때기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뀨웅, 꺄릉!”
언제 아팠냐는 듯, 모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스코트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황금빛 파스텔 톤의 마력은 이 아이가 전설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레티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카를 품에 꼭 안았다.
“살아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 이 괴물 같은 년놈들이……!”
그때, 구석에서 기회를 노리던 살수가 독기가 서린 눈으로 단검을 치켜들고 레티샤를 향해 돌진했다. 비록 독살은 실패했으나, 한빙증의 여파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보육사 하나쯤은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레티샤의 목덜미를 겨눈 그 찰나.
쿠우우웅-!
주방의 거대한 연철 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폭발하듯 뜯겨 나갔다.
“어딜 감히 손을 대느냐.”
낮고 서늘한, 영하의 빙하보다도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지배했다.
어둠을 찢고 나타난 것은 디트리히였다. 그의 몸 주변으로 폭압적인 검은 마기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사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기 직전의 폭풍과도 같았다.
스윽.
디트리히가 검을 뽑아 들기도 전, 그의 신형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살수가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없었다.
서걱!
“아아악!”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피가 장미 꽃잎처럼 흩뿌려졌다. 디트리히의 검 끝이 살수의 오른쪽 어깨를 정확히 관통해 벽면에 그대로 박아 넣은 것이었다. 살수는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레티샤는 반사적으로 모카의 눈을 가렸다. 잔인한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디트리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자루를 잡은 채, 천천히 살수에게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마다 바닥의 피가 검게 물들며 타들어 갔다.
“에스카르트 공작…… 윽, 이 괴물……!”
살수가 이를 갈며 침을 뱉으려 했으나, 디트리히는 무자비하게 그의 턱뼈를 구두굽으로 짓밟아 으스러뜨렸다.
우드득,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살수의 비명이 주방을 가득 채웠다. 디트리히의 얼굴에는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오직 피에 굶주린 야수 같은 냉혹함만이 서려 있었다.
그의 분노는 오롯이 레티샤를 향한 위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레티샤는 디트리히의 등 뒤로 은은하게 일렁이는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디트리히 에스카르트] - 상태: 마기 정제율 82% (고대 마수 인도자의 혈통이 레티샤의 정화 온기와 공명하여 급격히 자극받는 중) - 감정: 극도의 분노, 레티샤를 잃을 뻔했다는 파괴적 충동.
그의 혈통이 깨어나고 있었다. 레티샤가 가진 정화의 힘과 맞물려, 디트리히 내면에 잠든 고대 인도자의 힘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리라. 레티샤는 한기를 완전히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공작님, 진정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모카도 무사해요.”
레티샤가 그의 차가운 철갑 장갑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디트리히의 몸을 감싸고 돌던 검고 흉포한 마기가 파스텔 분홍빛 온기에 녹아내리듯 차분히 가라앉았다.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이성을 되찾으며 레티샤를 응시했다.
“……바보같이, 또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군.”
말은 차가웠지만, 그의 눈빛에는 깊은 안도감과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디트리히는 짓밟고 있던 살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벽에서 거칠게 잡아 뜯어 바닥에 메쳤다.
“말해라. 네놈을 보낸 자가 제라드인가? 그 가식적인 성황청의 개새끼가 시키더냐.”
살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쿨럭이며 피를 토해냈다.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하얗게 얼어붙은 주방 바닥을 더럽혔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살수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쿨럭, 흐…… 흐흐흐…… 에스카르트의 괴물 놈들…… 지금 나 하나를 잡았다고 이긴 줄 아는가?”
살수의 차가운 미소에 레티샤의 등등이 서늘해졌다.
“무슨 소리냐.”
디트리히가 검날을 살수의 목줄기에 바짝 들이댔다. 살짝만 힘을 주어도 목뼈가 끊어질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살수는 이미 제 목숨을 포기한 듯, 눈을 부릅뜨고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미 늦었다……. 제라드 님께서는 이 요새를 통째로 쓸어버릴 준비를 끝마치셨지.”
살수의 목구멍에서 피 섞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이 순간…… 황실이 파견한 중앙 정규 기사단 삼천 명이, 이 윈터헤이븐 요새를 사방에서 포위 완료했다.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원형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단 말이다!”
“……!”
레티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삼천 명의 정규 기사단이라니. 그것은 단순한 수색이나 정찰이 아니었다. 이 요새를 완전히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제국의 명백한 학살 선포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순간, 레티샤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요새 도면 뒤에 숨겨져 있던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
제라드의 대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지하의 비밀 격리 벽을 가동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가여운 아기 마수들과 요새의 사람들은 모두 무자비한 철검 아래 도살당할 것이었다.
“이 비열한 놈들이……!”
디트리히의 눈에 다시금 푸른 마기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요새 밖에서, 마치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천 대의 말발굽 소리와 거대한 쇠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지진처럼 땅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붉은 횃불의 불빛들이 윈터헤이븐의 하얀 설산을 포위하듯 붉게 수놓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위기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