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귓가를 스치는 숨결은 가을날 밤의 벽난로 불빛처럼 뜨거웠사옵니다.

서리가 내려앉은 창밖의 푸르스름한 새벽하늘과 대비되게도, 디트리히의 넓은 품 안은 오직 저만을 위해 준비된 온실처럼 아늑하고 붉은 열기를 품고 있었지요. 가늘게 떨리던 제 손가락 끝이 그의 검은 제복 깃을 꽉 움켜쥔 채 놓지 못하자, 그의 수려한 눈썹이 비스듬히 기울어졌사옵니다.

“원하는 대로 온기를 주지. 그러니 내 허락 없이 멋대로 사라지려 하지 마라, 레티샤.”

낮고 은밀한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순간,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제 시야를 가득 채웠사옵니다.

이윽고 닿아온 그의 입술은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침향의 냄새를 듬뿍 머금고 있었지요. 뼛속까지 얼어붙어 바스라질 것만 같던 제 전신에, 그의 단단한 가슴으로부터 밀려드는 정제된 마기가 파도처럼 들이쳤사옵니다. 지독한 한빙증으로 굳어 가던 손끝과 발끝이 마치 봄날의 따스한 햇볕을 받은 얼음 계곡처럼 스르륵 녹아내리기 시작했지요.

“음…….”

저도 모르게 입술 틈새로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왔사옵니다. 그가 제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머금었다가 떼어내며, 한층 더 깊숙이 숨결을 불어넣었지요. 그의 정제된 마력은 차가운 얼음 성벽 같던 제 혈관 속을 타고 흐르며 분홍빛과 민트색의 부드러운 온기로 변해 온몸을 구석구석 채워 나갔사옵니다.

어찌 이리 뜨겁고 다정하게 제 안을 채워주시는 것이옵니까.

공작님의 심장 소리가 제 가슴뼈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와, 제 심장마저 그 박자에 맞춰 쿵쾅쿵쾅 요동쳤사옵니다. 마기를 다루는 냉혈한이라 불리던 남자의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요람처럼 느껴지는 이 모순에 저는 그저 그가 건네는 온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일 뿐이었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마침내 디트리히가 서서히 입술을 떼어냈사옵니다. 그의 이마가 제 이마에 가볍게 맞닿은 채, 거친 숨결을 고르고 있었지요. 가늘게 뜬 제 눈동자에 비친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무척이나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보였사옵니다.

“……이제 좀 살 것 같나.”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커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사옵니다.

“예…… 공작님 덕분에, 온몸이…… 봄날의 정원처럼 따뜻해졌사옵니다.”

부끄러움에 귓가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수기자, 디트리히는 나직한 한숨을 쉬며 저를 더 꽉 끌어안았지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저는 비로소 차가운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사옵니다.

***

다음 날 아침, 윈터헤이븐 요새 남포 장벽 인근의 농경지는 매서운 북부의 칼바람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사옵니다. 영지민들은 겨우내 먹을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얼어붙은 밭고랑을 곡괭이로 내리치고 있었지요.

“에구구, 이놈의 땅덩어리는 매년 더 단단해지는구먼. 올해는 감자 한 알 건지기도 힘들겠어.”

나이 든 농부가 허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사옵니다.

장벽 너머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 몇 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사옵니다.

“마, 마수다! 마수가 나타났다!”

영지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 손에 든 농기구를 무기 삼아 치켜들었사옵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언제 찢겨 죽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서려 있었지요.

하지만 수풀을 헤치고 나온 존재들은 흉포한 괴수가 아니었사옵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분홍빛 그리핀이었지요. 녀석은 어제까지만 해도 독성 폭발로 괴로워하던 아기 그리핀이었사옵니다. 완전히 정화되어 보랏빛 광기를 털어내고 아름다운 연분홍빛 마력을 뿜어내는 녀석은, 영지민들의 경계 섞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사옵니다.

“뀨우?”

그리핀이 동그란 금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밭고랑 사이에 박혀 있던 커다란 바위 앞으로 걸어갔지요. 농부 서넛이 매달려도 끄떡없던 거대한 암석이었사옵니다. 녀석은 몽실몽실한 날개깃을 힘차게 퍼덕이더니, 앞발로 바위를 꽉 움켜쥐고 가볍게 들어 올렸사옵니다.

영차, 영차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뽀짝한 몸짓으로 녀석은 바위를 저 멀리 안전한 곳으로 부드럽게 내려놓았지요. 그러고는 칭찬을 바라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사옵니다.

“어……?”

농부들의 입이 떡 벌어졌사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지요. 모카는 도토리처럼 동그란 뺨을 한껏 부풀린 채 밭고랑 사이를 뽈뽈거리고 돌아다녔사옵니다. 모카의 불꽃 꼬리가 살구색 따스한 스파크를 파닥파닥 터뜨릴 때마다, 마력의 온기가 얼어붙은 흙바닥으로 스며들었지요. 서리가 내려앉아 거뭇하게 죽어가던 농작물의 줄기들이 순식간에 파릇파릇한 생기를 되찾으며 고개를 치켜들었사옵니다.

“이, 이게 무슨 능동적인 기적이람…….”

한 꼬마 아이가 겁도 없이 모카에게 다가가 작은 손을 내밀었사옵니다. 모카는 낯선 인간의 손길에 잠시 불꽃을 키우는 듯하더니, 이내 레티샤의 따스한 보육실을 떠올렸는지 꼬리를 낮추고 아이의 손바닥에 제 말랑한 볼때기를 갸릉거리며 비벼댔사옵니다.

“엄청 보들보들해! 따뜻하고 착한 아이잖아!”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얼어붙었던 영지민들의 마음을 사르르 녹여내렸사옵니다.

“괴물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를 돕고 있어. 저 마수들이 땅을 녹이고 돌을 치워주고 있단 말일세!”

“공작가의 마수들이 미쳐 날뛰는 괴물이 아니라, 영지를 지키는 수호수였다니!”

장벽을 가득 채운 전율과 감동의 속삭임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퍼져나갔사옵니다. 평생을 마수의 공포와 제국의 핍박 속에서 숨 죽여 살던 영지민들의 눈가에 붉은 눈물이 고였지요. 그들은 마수들의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보며, 마침내 이 얼어붙은 북부 땅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사옵니다.

***

오후가 되자, 윈터헤이븐 요새의 굳게 닫혀 있던 영문 앞으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사옵니다.

수십, 수백 명의 영지민들이 저마다 무언가를 가득 짊어진 채 요새 앞으로 모여든 것이었지요. 보육원 테라스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저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보육의 천사님! 천사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우리 아이들과 밭을 지켜준 마수 아이들에게 이 선물을 바치고 싶습니다!”

영지민들이 요새 문지기 기사들에게 간청하며 제 손에 들고 온 보따리를 내려놓았사옵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잘 무두질하여 눈처럼 하얗고 포근한 보온용 모피들과, 겨우내 아껴두었던 달콤한 야생 꿀단지, 그리고 갓 수확해 흙을 털어낸 싱싱한 구호 식량들이었지요.

“레티샤 님…… 정말 대단하옵니다.”

옆에 서 있던 유리엘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제 소맷자락을 꽉 쥐었사옵니다.

“영지민들이 이토록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고 선물을 가져온 적은 공작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사옵니다. 모두 레티샤 님이 마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시고 정화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유리엘…….”

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사옵니다.

전생에서 쓸쓸히 버려졌던 기억, 현생에서 처형당할 뻔했던 공포심에 늘 도망치고만 싶었던 제 나약한 마음이 떠올랐지요. 갈등이 닥쳐오면 소중한 마수들만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꼭꼭 숨어버리려 했던 저였사옵니다.

하지만 저를 '엄마'라고 부르며 졸졸 따르는 뽀짝한 마수들과, 이제는 저를 향해 '천사'라 부르며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는 이 영지민들을 보며 제 안의 무언가가 단단히 못 박히는 기분이 들었사옵니다.

‘더는 도망치지 않겠사옵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지켜야 할 온전한 내 집이자, 우리 아이들의 요새이옵니다.’

저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품 안에서 갸릉거리는 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사옵니다.

그러자 제 눈앞에 연분홍빛 파스텔톤의 [영혼 보육 대장] 시스템 UI가 반짝이며 떠올랐지요.

구석진 자리에 여전히 자물쇠 모양으로 잠겨 있는 ‘전설의 신수 유전핵’ 표시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사옵니다.

‘이 유전핵을 반드시 해금해야 하옵니다. 제국의 암살 공작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지요.’

더불어 이전에 지도 뒤편에서 발견했던 ‘윈터헤이븐 요새 지하의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 역시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었사옵니다. 만에 하나 제국의 군대가 들이닥치더라도, 그 비밀 대피로를 통한다면 아이들과 유리엘을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을 터였지요. 저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사옵니다.

하오나 평화는 그리 길게 허락되지 않았사옵니다.

쾅-! 쾅-! 쾅-!

요새 외곽의 거대한 철문이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사옵니다.

온 누리를 얼려버릴 듯한 서슬 퍼런 살기와 함께, 요새 내부로 매캐한 쇠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지요.

“황실의 명령이다! 마수를 은닉하고 황법을 위배한 반역의 소굴, 에스카르트 요새는 즉시 영문을 개방하라!”

지독하게 낮고 위선적인 목소리가 확성 마법을 타고 요새 전체를 통째로 뒤흔들었사옵니다.

제라드 크로이츠였사옵니다.

그는 황실에서 파견된 무시무시한 ‘마수 말살 위원회’ 합동 조사단을 직접 이끌고, 중장갑으로 무장한 군마들을 몰아 요새 영문 앞까지 전속력으로 돌격해 들어온 것이었지요. 하얀 사제복 위에 차가운 은빛 갑주를 덧입은 제라드는, 한 손에는 번쩍이는 성경을 든 채 입가에 뱀처럼 끈적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사옵니다.

“더러운 마수의 피로 오염된 죄인들아, 신성한 제국의 심판을 받으라!”

그의 뒤로 붉은 눈을 한 제국의 정예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살기를 뿜어냈사옵니다. 순식간에 요새 앞마당은 평화로운 잔치 분위기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전초 기지로 돌변하고 말았지요.

“어딜 감히 들이닥치는 거냐, 더러운 쥐새끼가.”

그때, 요새 본관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디트리히가 천천히 걸어 나왔사옵니다.

그의 몸 주변으로 폭압적인 검은 마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제라드의 기세를 단숨에 눌러버렸지요.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제라드의 목을 베어버릴 듯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사옵니다.

“내 영지에서 허락 없이 칼을 뽑아 든 대가는 가볍지 않을 텐데, 제라드.”

“오, 에스카르트 공작이시여. 저희는 그저 마수 말살법에 따라, 요새 내부에 숨겨진 불법 마수들을 처단하고 정화하러 온 것뿐입니다. 협조하지 않으신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사옵니다.”

두 남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사옵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마당을 가득 채운 영지민들과 기사들의 숨통을 옥죄었지요.

모두의 시선이 영문 앞의 거대한 대치 상황에 쏠려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사옵니다.

요새 내부의 음침하고 고요한 주방.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푸른 빛줄기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들었사옵니다. 제라드가 보낸 심복 살수였지요. 그는 혼란을 틈타 요새의 심장부로 잠입하는 데 완벽히 성공한 것이었사옵니다.

살수의 차가운 눈동자가 주방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은색 통을 향했사옵니다.

그곳은 매일 아침 레티샤가 아기 마수들을 위해 신선한 염소 젖과 영양 약초를 섞어 보관해 두는 ‘마수 전용 우유통’이었지요.

스윽-.

살수가 품속에서 검고 끈적한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냈사옵니다. 마수의 심장을 단숨에 마비시키고 내장을 녹여버리는 희귀한 맹독, ‘검은 과부의 눈물’이었지요.

살수의 입가에 잔혹한 비틀린 미소가 걸렸사옵니다.

쪼르륵, 톡.

우유통의 뚜껑이 열리고, 투명하게 변한 독액이 하얀 우유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기 시작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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