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정식 약혼이라니요. 이건 비즈니스 계약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일입니다, 대표님.”

서윤의 목소리가 서늘한 기획실의 정적을 찢었다.

방금 전까지 한민우와 감사팀장이 보안요원들에게 끌려 나가며 내지르던 악에 바친 고함이 아직도 복도 끝에 잔선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태준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짙은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을 지나 서윤의 구두 앞코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판을 흔들려면, 놈들이 쥐고 흔들던 판 자체를 깨부숴야 해.”

태준이 서윤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손아귀의 힘이 테일러드 재킷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웠고, 그 안에는 기묘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한민우가 흘린 입찰 스캔들의 찌꺼기를 하나하나 해명하는 건 시간 낭비야. 언론과 주주들은 해명보다 더 자극적인 먹잇감을 원하지. 태강의 후계 구도와 선일의 결탁,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우리 두 사람의 공식적인 결합.”

“그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를 던져주는 거다. 의심할 틈조차 주지 않고,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말이야.”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가장자리로 살짝 드러난 센티넬-K 스마트 디바이스의 액정이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생리적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기계. 가짜 연애를 숨기기 위해 스스로 채운 은밀한 족쇄가 차갑게 빛났다.

과거의 이별이 남긴 흉터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욱신거렸다. 진심을 꺼내 보이는 순간, 모든 관계는 파멸이었다. 계약서 제9조가 명시한 가혹한 페널티. 사적인 감정을 고백하거나 선을 넘는 즉시,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커리어와 자립의 기회는 허공으로 사라질 터였다.

하지만 태준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서윤의 이마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넌 내 옆에 서기만 하면 돼, 한서윤. 나머지는 내가 전부 감당할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피학적인 구원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서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어떤 사지로든 몰아넣겠다는 맹목적인 의지. 서윤은 그 눈빛을 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대표실 책상 한구석, 반쯤 열린 서랍 틈새로 은빛 만년필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3년 전 이별의 날, 서윤이 그에게 던져 망가뜨렸던 바로 그 만년필이었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저려왔다.

***

사흘 뒤, 금요일 오전. 태강그룹 본사 2층 대강당.

무대 뒤편의 대기실은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백 명의 기자가 뿜어내는 열기와 웅성거림이 두꺼운 방음문을 뚫고 들어와 고막을 두드렸다.

“한 실장님, 준비되셨습니까?”

김 비서가 태블릿을 든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윤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군더더기 없이 떨어지는 크림 화이트 컬러의 실크 블라우스와 테일러드 팬츠 슈트.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단발머리. 누가 보아도 완벽한 대기업의 젊은 임원이자, 태강의 황태자를 사로잡은 당당한 파트너의 모습이었다.

“네, 준비됐습니다.”

서윤이 심호흡을 하며 대기실 문을 열었다.

무대로 들어서는 순간,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광포하게 터져 나왔다.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섬광 속에서, 태준이 먼저 걸어가 단상 중앙에 섰다. 그의 완벽한 수트 핏과 흔들림 없는 태도는 그 자체로 거대한 벽 같았다.

태준이 마이크 앞에 서서 장내를 압도하는 시선으로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마이크가 켜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신 기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태강그룹 대표이사 강태준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이 넘쳤다. 판교와 강남의 정교하게 조율된 비즈니스 포럼에서나 들을 법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어투였다.

“최근 사내외에서 발생한 몇 가지 악의적인 루머와 입찰 관련 스캔들에 대해, 이 자리에서 명확한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미래전략기획실 한서윤 실장의 임명은 철저한 실무 데이터와 이사회의 적법한 절차를 거친 결과물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는 당사 법무팀을 통해 즉각적인 형사 고소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단호한 선언에 기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민우가 뒤에서 조종하던 언론 플레이의 맥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태도였다. 태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저와 한서윤 실장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서윤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태준의 곁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긴장으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서윤은 입가에 비즈니스용 미소를 띠었다.

“저 강태준과 한서윤 실장은 단순한 파트너십을 넘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서 약혼을 약속했습니다.”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가 폭풍처럼 강당을 가득 채웠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질문을 쏟아냈지만, 태준의 완벽한 방어벽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한민우가 서윤을 끌어내리기 위해 파놓았던 구렁텅이가, 오히려 두 사람의 결속을 증명하는 완벽한 무대로 뒤바뀌는 통쾌한 역전의 순간이었다.

***

“약혼의 증표로, 이 자리를 빌려 제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태준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짙은 청색의 벨벳 케이스를 꺼냈다.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나리오에 반지를 교환하는 순서 같은 건 없었다. 이건 태준의 독단적인 애드리브였다.

태준이 케이스를 열자, 조명빛을 받아 부서질 듯한 광채를 뿜어내는 3캐럿짜리 물방울무늬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태준이 서윤의 왼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가 서윤의 차가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연극이야. 가만히 있어.”

태준이 아주 미세하게 입술을 움직여 속삭였다. 그의 깊디깊은 눈동자가 서윤의 시선을 옭아맸다. 서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수백 개의 눈동자와 카메라 렌즈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태준의 긴 손가락이 서윤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차가운 백금 링이 살결을 파고들며 안착하는 순간, 단상의 조명이 내뿜는 열기가 두 사람을 가두듯 휘감았다.

쿵, 쿵, 쿵.

서윤의 가슴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연기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손가락에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과 태준의 손길이 주는 자극은 너무나도 실재적이었다.

손목에 찬 센티넬-K 디바이스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액정 화면에 표시된 심박수가 100을 넘어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태준은 반지를 완전히 끼워준 후, 서윤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부위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가짜 약혼이라는 거대한 기만 속에서, 두 사람의 호흡은 위험할 정도로 뒤엉키고 있었다.

***

같은 시각, 강당 2층의 VIP 참관실.

유리창 너머로 단상 위의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차예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고급 가죽 장갑이 찌그러질 정도로 강하게 쥐여 있었다.

“약혼? 강태준, 네가 감히 저런 하찮은 여자와 약혼을 해?”

차예린의 눈에 극도의 결핍과 분노가 서렸다.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완벽한 남자가,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한서윤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은 그녀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예린 씨, 아무래도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표님의 눈빛이…….”

옆에 서 있던 비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닥쳐!”

차예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숨을 씩씩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누르는 손가락이 분노로 잘게 떨렸다.

“강태준이 저 계집을 진짜로 사랑할 리가 없어. 이건 분명히 한민우를 쳐내고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가짜 쇼야. 계약서든 뭐든, 저 둘 사이에 묶인 진짜 조건이 있을 거야.”

차예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거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어, 차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파파라치 팀 더 고용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당장 오늘부터 저 두 사람을 24시간 밀착 감시해. 출퇴근 동선은 물론이고, 대표실 내부, 사적인 공간까지 전부 털어.”

차예린의 목소리가 뱀처럼 스산하게 흘러나왔다.

“특히 신체 접촉이 있을 때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찍어. 저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할 때 숨기는 틈새가 반드시 있을 거야. 그걸 찾아내서 내 손에 쥐여줘. 저 가짜 연극을 내 손으로 직접 찢어발겨 줄 테니까.”

전화를 끊은 차예린은 단상 위의 서윤을 노려보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한서윤,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지.”

***

기자회견이 끝나고, 두 사람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뒤로한 채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묵직한 정적이 좁은 공간을 채웠다. 사방이 거울로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하아…….”

긴장이 풀린 탓일까, 서윤의 무릎이 꺾이며 몸이 스르륵 아래로 무너졌다. 사흘 동안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버텨온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서윤아!”

태준이 거칠게 서윤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의 단단한 팔이 서윤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어깨를 지탱했다. 상호 동의가 없는, 갑작스럽고도 너무나 밀접한 신체 접촉이었다.

순간, 두 사람의 손목에서 신경질적인 경고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센티넬-K 디바이스의 화면이 붉은색으로 피처럼 물들며 깜빡였다.

[경고: 상호 합의되지 않은 신체 접촉 감지.] [경고: 심박수 130 bpm 초과. 감정 한계 수치 70% 돌파.] [경고: 계약 제9조 위반 위험. 즉시 냉각 조치를 시행합니다.]

“아……!”

서윤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극심한 호흡 곤란을 느꼈다. 디바이스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물리적 압박과 심리적 제어 신호가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숨을 들이쉬려 해도 공기가 허파로 들어가지 않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었다.

태준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디바이스의 냉각 조치가 시작되면서, 손목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미세 전류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태준은 서윤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 품에 세차게 끌어안으며 고통을 견뎌냈다.

“놓으세요…… 대표님, 이거 놓으셔야 해요……!”

서윤이 그의 가슴을 밀쳐내려 했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계약 파기의 공포와 몸을 지배하는 호흡 곤란 속에서, 그녀의 이성은 빠르게 흐려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지금 놓으면 너 쓰러져.”

태준의 목소리 역시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페널티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는 오직 서윤을 지탱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태준은 일그러진 안색을 필사적으로 수습하며, 반쯤 정신을 잃어가는 서윤을 안아 들다시피 하여 미래전략기획실 안쪽의 대표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기획실 직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극비 통로를 지나, 마침내 대표실 안쪽의 밀폐된 개인 집무실로 들어섰다.

철컥.

무거운 방음문이 잠기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태준은 서윤을 벽에 기대어 세우고, 그녀의 탈출구를 완벽히 차단하듯 양손으로 벽을 짚어 가두었다. 좁은 틈새로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사납게 부딪쳤다.

디바이스의 경고음은 여전히 붉은 빛을 내뿜으며 멈추지 않고 있었다.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땀에 젖은 그의 앞머리 사이로, 이성을 잃어가는 듯한 어둡고 뜨거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큰 손으로 서윤의 가녀린 턱 끝을 강하게 쥐어 들어 올렸다.

서윤의 젖은 눈동자가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말해 봐, 한서윤.”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스치며 차갑게 식어가는 턱 선을 강하게 압박했다.

“방금 그 심박수…… 정말로 연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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