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암전된 미래전략기획실을 기괴하게 물들였다.
손목을 조여 오는 센티넬-K 스마트 디바이스의 진동은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멸을 고하는 초읽기였다.
비비빅- 삐비빅-!
[경고: 착용자 간 심박수 122 bpm 돌파. 흥분 지수 89% 기록.] [가이드라인 제3조 위반 경보. 페널티 발동 10초 전.]
액정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숫자가 기형적으로 요동쳤다. 태준의 가슴팍에 밀착한 서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넓은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셔츠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3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그 비 오는 날의 밤바다 냄새가 그의 시더우드 향과 섞여 뇌리를 헤집었다.
“이거 놓으세요, 대표님.”
서윤이 목소리를 낮추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태준의 단단한 팔은 거대한 쇠창살덩어리처럼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구속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검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가 서윤의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
“놓으라고?”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긁혔다. 평소의 냉정함은 찾아볼 수 없는, 짐승 같은 갈증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이 경고음이 들리지 않는 겁니까? 90%가 넘었어요. 여기서 더 가면 계약은 끝입니다. 대표님이 약정하신 지분도, 제 커리어도 전부 다 날아간다고요!”
“날아가라고 해.”
태준의 입술이 서윤의 귓가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지럽히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깟 지분 따위, 너 하나 가둘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버릴 수 있어.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 하지 마, 서윤아.”
그의 손가락이 서윤의 가는 손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순간, 디바이스의 경고음이 한 옥타브 더 높아졌다.
[흥분 지수 94% 돌파. 페널티 강제 집행 5초 전.]
서윤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다.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른 그 모든 수모가 물거품이 된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온 힘을 다해 태준의 가슴을 밀쳤다. 동시에 구두 굽으로 그의 발등을 강하게 짓눌렀다.
툭.
짧은 마찰음과 함께 태준의 신형이 미세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 찰나의 틈을 타 서윤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스르릉-!
거울 벽 너머로 숨겨진 비밀 스위트룸의 센서가 서윤의 홍채를 인식하고 미끄러지듯 열렸다. 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탁!
육중한 방음문이 닫히자마자 기획실의 전력이 거짓말처럼 복구되었다. 환한 형광등 불빛이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서윤은 스위트룸 내부의 대리석 세면대로 달려가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수가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거칠게 물을 움켜쥐고 얼굴과 목덜미에 끼얹었다.
“하아, 하아…….”
거울 속의 여자는 엉망이었다. 입술은 붉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흔들리는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손목의 센티넬-K 화면을 확인했다.
[심박수 98 bpm. 안정 상태 진입 중. 페널티 보류.]
느리게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며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스스로의 뺨을 가볍게 내리치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 차려, 한서윤. 저 남자는 구원자가 아니야. 너를 파멸로 이끌 가장 달콤한 덫일 뿐이야.’
그녀는 손을 닦기 위해 세면대 옆 수건걸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태준의 개인 집무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크리스탈 스탠드 옆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에 아주 낯익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은빛 만년필.
바디 곳곳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지만, 장인의 손길로 정교하게 복원된 흔적이 역력한 물건이었다. 3년 전 이별하던 날, 서윤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내던져 산산조각 냈던 바로 그 만년필이었다.
서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대체 왜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지? 그것도 이렇게 새것처럼 고쳐서?
그의 집착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깨닫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태준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가면을 쓴 채, 그녀가 제 발로 그의 영역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을 뿐.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똑, 똑.
“실장님, 김 비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서윤은 재빨리 만년필에서 시선을 거두고 옷가지를 정돈했다. 호흡을 완벽한 비즈니스 톤으로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김 비서님.”
문을 열고 나가자, 기획실 안에는 태준이 다시 차가운 대표이사의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폭주하던 남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오직 그의 붉어진 손목 피부만이 조금 전의 열기를 증명할 뿐이었다.
김지훈 비서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는 태준과 서윤을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보안팀을 통해 들어온 첩보입니다. 한민우 전무가 감사팀장 박진우와 청담동의 한 밀실 요정에서 접촉했습니다. 저희 기획실의 내부 전력 차단 사고가 단순 과부하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전력 차단을 미끼로 실시간 생체 데이터 로그를 가로채려 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감사팀장이 사내망을 통해 실장님과 대표님의 센티넬-K 동기화 데이터를 강제로 백업하려 시도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다행히 대표님께서 심어두신 방화벽에 걸려 패킷은 난독화 처리가 되었습니다만…….”
태준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펜을 굴리며 차갑게 읊조렸다.
“한민우가 슬슬 한계에 다다랐군. 쥐새끼처럼 구석에 몰리니 덫을 놓기 시작했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우리가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는 물증입니다. 만약 우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이사회는 당장 대표님의 해임안을 상정할 겁니다. 제 지분 회수는 물론이고요.”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묘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 영역 안에서 네가 다치는 일은 없어.”
그 오만한 배려가 서윤의 방어기제를 자극했다.
“대표님 혼자 영웅 행동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제 싸움이기도 하니까요.”
그때였다. 기획실 내의 대형 모니터와 직원들의 PC에서 동시에 경쾌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디링-!
[전사 공지: 미래전략기획실 한서윤 실장의 부정행위 및 정보 유출 건에 대하여.]
서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사내 인트라넷 전체 메일이었다. 발신인은 무기명의 고발자 계정이었지만, 첨부된 파일은 선일정밀과의 신규 비전 사업 입찰 관련 보안 문서였다.
메일의 내용은 자극적이기 짝이 없었다. 한서윤 실장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경쟁사인 태성그룹 측에 기밀 입찰가를 무단 유출했으며, 그 대가로 개인 차명 계좌를 통해 리베이트를 수령했다는 고발성 스캔들이었다. 사내 게시판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낙하산 실장이 사고 칠 줄 알았다.’ ‘대표 백 믿고 날뛰더니 결국 회사 팔아먹었네.’
악의적인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기획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민우가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기고만장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이고, 내 동생 서윤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
민우가 과장된 몸짓으로 혀를 찼다.
“최연소 실장 자리에 앉혀놨더니, 오빠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회사의 핵심 기술과 입찰안을 경쟁사에 넘겨? 이건 단순한 징계 수준이 아니라 형사 고발감이야.”
태준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살기에 민우의 경호원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한 전무, 내 허락 없이 대표실 구역에 발을 들이는 버릇은 언제 고칠 건가?”
“강 대표,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돼? 당신이 끼고도는 그 계집애가 태강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고! 감사팀장! 당장 한서윤 실장을 격리하고 감사실로 연행해!”
민우의 외침에 대기하고 있던 감사팀 직원들과 박진우 감사팀장이 기획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서윤은 그들의 위압적인 태도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오라버니, 여전하시네요. 머리 쓰는 수준이 3년 전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요.”
“뭐라구?”
민우의 미간이 꿈틀했다.
서윤은 자신의 태블릿 PC를 들어 기획실 메인 스크린에 연결했다. 화면 가득 복잡한 코드와 IP 추적 경로가 담긴 로그 파일이 떠올랐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박진우 팀장님?”
서윤이 감사팀장을 응시하며 차갑게 물었다. 박 팀장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건…….”
“오늘 오전 10시 14분. 경쟁사인 태성그룹의 IP로 접속해 기밀 입찰안을 다운로드한 계정의 로그입니다. 이 계정의 마스터 권한은 놀랍게도 감사팀장인 당신의 사번으로 되어 있더군요.”
서윤이 화면을 터치하자, 또 다른 문서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건 고발 메일이 발송되기 정확히 30분 전, 한민우 전무님의 개인 태블릿 PC에서 작성된 PDF 파일의 메타데이터입니다. 최종 수정자 이름에 친절하게도 ‘HAN_MW’라고 적혀 있네요.”
기획실 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우는 당황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건 조작이야! 네가 해킹이라도 해서 날조한 모양인데……!”
“조작인지 아닌지는 지금 당장 사내 보안관제실과 사이버수사대에 의뢰하면 밝혀지겠죠.”
서윤이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제가 미래전략기획실장으로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사내 모든 네트워크망의 백업 이중화 작업입니다. 당신들이 어떤 지저분한 수작을 부릴지 훤히 보였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박진우 감사팀장. 경쟁사와의 유착 및 사내 기밀 유출 혐의로 즉각 직위해제합니다. 또한 한민우 전무님 역시 이번 유출 조작 사건의 배후로서 이사회에 징계 및 해임 요구안을 제출하겠습니다.”
“한서윤, 네가 감히 나를……!”
민우가 분을 참지 못하고 서윤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탁-!
태준이 민우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한 기세로 움켜잡았다. 민우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흘러나왔다.
“내 눈앞에서 내 여자에게 손을 대겠다?”
태준의 목소리는 지옥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낮고 잔혹했다.
“김 비서, 당장 보안팀 불러서 한 전무와 박 팀장을 건물 밖으로 끌어내. 거부하면 경찰에 무단침입 및 업무방해로 현행범 체포해 넘겨라.”
“네, 대표님.”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던 민우와 감사팀장은 보안 요원들의 손에 붙들려 비참하게 끌려 나갔다. 복도 너머로 민우의 악에 바친 고함이 멀어졌다.
“한서윤! 강태준!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아? 내 반드시 너희들의 그 가짜 연극을 세상에 까발려 주마!”
소란이 가라앉은 기획실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서윤은 태블릿을 정리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승리의 쾌감보다 밀려오는 피로감이 더 컸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일단 급한 불은 껐네요. 하지만 한민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겁니다. 감사팀장을 날렸으니, 다음엔 더 거칠고 노골적인 방법으로 우리 계약의 허점을 찌르려 하겠죠.”
태준은 대답 대신 서윤에게 다가왔다. 그의 긴 그림자가 서윤의 위로 짙게 드리워졌다.
그는 서윤의 손목에 채워진 센티넬-K 디바이스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여전히 그들의 관계를 감시하는 붉은 빛이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맞아. 놈들은 우리의 틈을 노려 끊임없이 덫을 놓겠지.”
태준의 목소리에 전에 없는 결연함이 서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고, 동시에 뜨거웠다.
“그래서 더 이상 숨어서 연극하지 않기로 했다.”
서윤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태준이 김 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이 열리며, 기획실의 공기를 완전히 얼려버릴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김 비서, 당장 홍보실에 지시해. 이번 주 금요일, 태강그룹 본사 강당에서 정식 기자회견을 잡는다.”
태준이 서윤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그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서윤의 심장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 강태준과 미래전략기획실 한서윤 실장의 정식 약혼을 언론에 공표한다. 놈들이 의심할 시간조차 주지 못하도록, 판을 완전히 바꾸겠다.”
서윤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커졌다.
단순한 계약 연애를 넘어선 약혼 공표.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외통수였다. 태준의 선언과 함께, 두 사람을 옭아맨 계약의 사슬은 더욱더 단단하고 위험하게 조여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