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이기는 소리가 기획실 내부의 무거운 침묵을 깨부쉈다.

한민우는 비서들의 다급한 제지를 한 손으로 거칠게 밀쳐내며 한서윤과 강태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손에 쥐인 검은색 단말기는 태강그룹 보안망조차 우회하는 불법 주파수 탐지기 겸 녹음 장치였다. 붉은색 LED 표시등이 불길하게 깜빡이며 주위의 전파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기특한 동생님께서 아주 대단한 짓을 벌이셨네?”

한민우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의 시선은 서윤의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기류를 집요하게 훑었다.

“대표이사실 바로 옆방을 꿰차고 앉아서 뭘 하나 했더니, 아주 안방을 차리셨어. 한서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한 기획 전문가였다고 미래전략기획실장 자리를 넙죽 받아먹어? 선일정밀의 지분을 빼돌리려는 수작치고는 제법 그럴듯하다만, 이 오빠 눈은 못 속이지.”

서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손끝이 차갑게 굳어 들어갔다. 가문에서 늘 자신을 정략결혼의 소모품이자 후계 구도의 걸림돌로만 취급하던 한민우의 폭력적인 시선이 3년 전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끄집어냈다. 본심을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내쳐질 것이라는 공포가 서윤의 발목을 무겁게 옭아맸다.

“오빠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여긴 선일정밀의 사유지가 아니라 태강그룹의 핵심 업무 공간이야. 보안 규정 위반이야, 당장 나가.”

서윤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갑게 경고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완벽한 비즈니스 톤이었다. 하지만 한민우는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검은 단말기를 서윤의 턱밑까지 들이밀었다.

“보안 규정?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네. 너희 둘, 연애한다는 헛소문 퍼뜨려서 주주들 눈속임하는 거지? 이 단말기에 찍힌 전파 신호가 아주 재미있더라고. 특수 주파수로 묶여서 실시간으로 데이터 교환을 하는 기기가 이 좁은 방안에 딱 두 개 있어. 바로 너랑 저 강태준 대표의 손목에 있는 저 시계.”

한민우의 손가락이 서윤의 스마트 워치를 가리켰다.

“연인끼리 커플 워치라도 찬 줄 알았더니, 신호가 오고 가는 꼴이 꼭 서로를 감시하는 계측기 같단 말이지. 진짜 연애를 하는 게 맞다면, 어디 내 눈앞에서 증명해 봐. 계약서라도 쓰고 가짜 연기하는 거라면, 당장 선일정밀 이사회에 고발해서 네 지분부터 한 푼도 남김없이 몰수해 줄 테니까.”

서윤의 호흡이 멎었다. 한민우의 의심은 정확히 과녁을 꿰뚫고 있었다. 계약서의 존재가 들통나거나, 이 관계가 거짓임이 증명되는 순간 서윤이 쌓아 올린 모든 커리어와 자립의 기회는 허공으로 날아간다. 가혹한 '감정 제한 페널티'가 적용되어 태강그룹에서의 지위도 즉시 박탈당할 터였다.

그 순간, 서윤의 어깨 위로 묵직하고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한민우 전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간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렸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서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한민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맹목적인 포식자의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 구역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내 여자에게 무례하게 구는군.”

“하, 내 여자? 강 대표, 연극치고는 대사가 너무 진부한 거 아닌가?”

한민우가 비아냥거렸다.

“진부한지, 진심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

태준의 입가에 잔혹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가 서윤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서윤이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태준은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넓은 집무용 책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서윤의 허벅지 사이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와 밀착했다.

“……앗!”

서윤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태준의 단단한 가슴팍이 서윤의 가슴을 압박했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서윤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징-. 징-. 징-.

두 사람의 손목에서 다시 한번 격렬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고: 대상자 간 미세 흥분 수치 급증.] [강태준 심박수: 130 bpm / 한서윤 심박수: 135 bpm] [현재 감정 동기화 지수: 35.2% - 경고 단계 진입]

빨간 불빛이 손목에서 미친 듯이 깜빡였다. 조금만 더 지수가 상승하면 계약 파기 조건인 70%에 도달해 파멸에 이를 터였다. 하지만 태준은 진동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윤의 턱을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쥐어 올렸다.

“한 전무가 보는 눈이 없어서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태준의 시선이 서윤의 젖은 입술에 머물렀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서윤의 아랫입술을 느리고 자극적으로 쓸어내렸다. 서윤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것을 느꼈다. 태준의 눈빛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3년 동안 억눌러왔던 지독한 독점욕과 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는 피학적인 구원자의 눈빛.

“우린 매 순간 서로를 갈망하느라 심박수가 멈추질 않거든. 이 기기가 감시용으로 보이나? 아니, 이건 우리가 서로에게 미쳐서 선을 넘지 않도록 통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야.”

태준이 서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으며, 지독하게 야릇했다.

“보여줄까? 우리가 여기서 어떤 식으로 사랑을 나누는지.”

그의 손길이 서윤의 재킷 안쪽으로 스며들 듯 파고들었다. 얇은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태준의 손바닥 온기에 서윤은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한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농밀하고도 위험한 텐션은 결코 가짜로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검은색 단말기의 수치 역시 두 사람의 생리적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증명하듯 요동치고 있었다.

“너, 너희들…… 미쳤군. 회사에서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민우가 뒷걸음질을 쳤다.

태준은 서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시선은 여전히 한민우에게 고정시킨 채 차갑게 비웃었다.

“원한다면 더 노골적인 장면을 중계해 줄 수도 있지. 하지만 태강그룹 미래전략기획실의 보안 등급은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라서 말이야.”

태준이 책상 밑의 은밀한 버튼을 누르자, 기획실 벽면을 채우고 있던 대형 거울 벽이 부드러운 구동음과 함께 양옆으로 갈라졌다.

스르륵-.

거울 벽 너머로 드러난 곳은 외부의 그 어떤 전파나 도청 장치도 통과할 수 없도록 특수 설계된 비밀 스위트룸이었다. 아늑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소파, 그리고 철저한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외부의 눈길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요새 같았다.

“이곳은 오직 내 홍채 인식으로만 열리는 공간이지. 어떤 도청기나 불법 단말기도 여기선 무용지물이 돼.”

태준은 서윤을 품에 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압도적인 피지컬이 한민우를 위에서 아래로 짓눌렀다.

“한 전무가 들고 있는 그 조잡한 장난감으로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는 뜻이야.”

한민우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강태준……! 네가 감히 선일정밀의 후계자인 나를 이렇게 대우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고작 계집애 하나 때문에 태강과 선일의 동맹을 깨겠다는 건가?”

“동맹?”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한민우 전무. 선일정밀이 우리 태강그룹의 1차 벤더로 등록되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그리고 방금 자네가 들고 들어온 불법 전파 단말기는 태강그룹 본사 보안 규정 제14조, ‘비밀정보 유출 및 해킹 시도’에 정확히 저촉되네.”

태준의 목소리에는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김 비서.”

태준이 인터콤을 누르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지훈 비서실장과 건장한 사내 보안요원 네 명이 순식간에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예, 대표님.”

“한민우 전무가 소지한 불법 단말기를 압수하고, 태강그룹 보안 침해 혐의로 즉각 사내 감사팀에 인계해. 또한, 선일정밀과의 모든 신규 프로젝트 협상을 일시 중단하고, 한 전무의 본사 출입 권한을 영구 정지시킨다.”

“무슨……! 강태준, 네가 미쳤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

한민우가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보안요원들은 자비 없이 그의 양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색 단말기는 김지훈 비서의 손에 허망하게 회수되었다.

“놓아라! 이거 놓지 못해! 한서윤, 너 가만 안 둬! 아버지가 알면 네년 목을 부러뜨려 놓을 거야!”

“입이 더럽군. 감사실로 내려가는 동안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조치해.”

태준의 냉혹한 명령에 보안요원들은 한민우의 입을 틀어막고 거칠게 끌고 나갔다.

바닥을 긁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 기획실 문이 굳게 닫혔다. 방 안에는 다시 깊고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윤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풀리며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징-.

스마트 워치의 화면을 보니, 동기화 지수가 25% 선에서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페널티 기준인 70%를 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방금전 태준의 뜨거운 손길과 거친 숨결이 닿았던 피부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태준은 흩어진 셔츠 깃을 단정하게 정리하며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가운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3년 전, 이별의 순간에 서윤이 던져 망가뜨렸던 은빛 만년필을 서랍 깊숙이 보관하고 있는 그의 집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저 자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어.”

태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알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최선의 대처였습니다.”

서윤은 애써 심장 고동을 감추며 차갑게 대답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꽁꽁 싸매는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진심을 들키면 버려진다. 3년 전의 그 참혹한 이별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쉬는 게 좋겠어. 한민우는 당분간 우리 근처에 얼씬도 못 할 테니까.”

태준은 그렇게 말하며 비밀 스위트룸의 거울 벽을 다시 닫았다. 거울에 비친 서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윤은 헝클어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기획실 한쪽에 마련된 탕비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 한 잔이 간절했다. 컵에 물을 따르는 손이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준의 무릎 위에서의 감각, 그의 단단한 가슴과 뜨거웠던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즈니스 계약일 뿐인데, 왜 이리 가슴이 저릿하고 아파오는 걸까.

꿀꺽, 꿀꺽.

차가운 물을 들이켜며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탕비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탁. 탁. 탁.

느리고 우아한 구두 굽 소리.

서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탕비실 입구에 서 있는 여자는 완벽하게 세팅된 칼단발에, 명품 트위드 재킷을 걸친 차예린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서윤의 이력을 분석한 포트폴리오 서류가 들려 있었다.

“어머, 한서윤 실장님. 여기서 혼자 속을 태우고 계셨네?”

차예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서윤을 향한 강한 적대감과 소유욕이 번득이고 있었다.

“방금 밖에서 아주 대단한 구경거리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유치한 연극으로 태강그룹 주주들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차예린이 슬며시 다가와 서윤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음 주에 있을 ‘신규 비전 실적 품평 위원회’, 내가 특별 참관인으로 참석하게 됐어. 거기서 네가 가진 밑천이 가짜라는 걸 주주들 앞에서 낱낱이 밝혀줄게. 기대해, 한서윤.”

차예린의 차가운 선언이 탕비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또 다른 거대한 위기가 서윤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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