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를 간지럽히는 숨결은 잔인할 만큼 뜨거웠다. 강태준의 입술이 뺨을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이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네 몸과 마음의 소유권은 나한테 있어. 사적인 진심을 들키거나 내 몸에 허락 없이 손대는 순간, 페널티가 발동한다는 걸 잊지 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밀폐된 스위트룸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서윤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삼켰다. 대리석 테이블을 짚은 그의 단단한 팔뚝이 거대한 벽처럼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차가운 대리석에 등이 닿을 터였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서윤의 입술에 머물렀다. 3년 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쳤던 그 밤의 온도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흉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하지만 여기서 동요를 내비치는 순간, 강태준이라는 덫에 완전히 걸려들고 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떨림을 감추기 위해 은빛 만년필을 꽉 쥔 손목에 핏줄이 돋아났다.
“단순한 계약 조건일 뿐이에요. 대표님.”
서윤은 일부러 사무적이고 건조한 톤으로 대꾸했다. 붉게 달아오른 귀끝과는 대조적인,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만년필을 내리눌렀다. 사각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계약서 마지막 장 서명란에 ‘한서윤’ 세 글자가 정갈하게 새겨졌다.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손목을 단단히 죈 것 같은 기묘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서윤은 만년필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태준의 가슴을 밀쳐냈다. 물론 단단한 대리석 조각을 미는 것처럼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서윤의 단호한 태도에 태준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훌륭해. 그 냉정함, 부디 3년 동안 유지하길 바라지.”
태준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두 사람의 개인 스마트폰이 동시에 기분 나쁜 고주파 진동을 울렸다.
징-.
동시에 태블릿 PC의 화면이 파란색에서 핏빛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화면 중앙에는 태강그룹 보안 개발팀이 특수 설계한 애플리케이션의 인터페이스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시스템 얼라인 완료: 감정 제한 페널티 솔루션 ‘센티넬-K’ 작동 시작.] [대상자: 강태준, 한서윤.] [현재 감정 동기화 지수: 0.00%]
화면을 바라보는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앱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양가 가문의 집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완벽한 연인을 연기하되, 서로의 사적인 진심이 개입되는 순간 모든 것을 박탈하는 법적 장치였다. 스마트 워치와 연동되어 실시간 심박수, 체온, 미세한 혈류 변화까지 체크하는 잔혹한 계량기.
“지분 양도 조건과 미래전략실장 발령의 대가치고는 꽤 직관적이지?”
태준이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검은색 스마트 워치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사적인 감정을 고백하거나, 상호 동의 없는 물리적 접촉으로 흥분 지수가 70%를 넘어서는 순간, 계약은 즉시 파기된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선일정밀로부터의 완벽한 자립, 그리고 네 가치를 증명할 커리어는 그 즉시 공중분해 될 거야.”
“알고 있어요.”
서윤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뒤집어 놓으며 차갑게 응수했다.
“질척이는 감정 따위에 휘둘려 제 인생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대표님 역시 그 오만한 질투심이나 독점욕을 잘 통제하셔야 할 겁니다. 이 페널티는 쌍방 과실이니까요.”
“독점욕이라.”
태준이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서윤을 집어삼킬 듯 깊고 어두웠지만, 목소리만큼은 비즈니스 파트너의 그것으로 완벽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기대하지. 네가 그 지독한 방어기제 뒤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 * *
다음 날 오전 10시. 태강그룹 본사 28층 대회의실.
무겁게 내리앉은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회의실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길게 뻗은 마호가니 테이블 안쪽에는 태강그룹의 내로라하는 원로 임원들과, 선일정밀 한 회장의 입김을 받은 사외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테이블 말단에 당당히 서 있는 한서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미래전략기획실장 자리가 장난인 줄 아십니까? 아무리 한 회장님 댁 여식이라 해도, 경영 기획 경력도 없는 인사를 낙하산으로 앉히는 건 주주들에 대한 기만입니다!”
선일정밀 측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는 정 이사가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로 쾅 소리가 나게 던지며 포문을 열었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맞습니다. 태강의 브레인이라 불리는 비전실 수장 자리입니다. 고작 서른도 안 된 인물이, 그것도 정략결혼의 도구로 거론되던 인사가 맡을 자리가 아니지요.”
임원들의 노골적인 무시와 멸시가 서윤의 어깨를 짓눌렀다. 가부장적인 가문의 억압 속에서 늘 ‘조용히 시집이나 갈 존재’로 취급받던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려 했다.
하지만 서윤은 주먹을 꽉 쥐며 떨림을 억눌렀다. 지금 밀리면 평생 그들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한다.
서윤은 단상 앞으로 걸어나가 빔프로젝터 화면을 켰다. 화면 가득 태강그룹의 지난 3년간 신규 사업 포트폴리오 분석과, 선일정밀과의 합작 법인 설립 시 발생할 리스크 헤징 방안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경력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정 이사님?”
서윤의 맑고 단단한 목소리가 회의실의 웅성거림을 단숨에 잠재웠다.
“지난 2년간 태강그룹이 추진한 해외 바이오 펀딩 프로젝트, 그리고 선일정밀의 배터리 소재 독점 공급망 다변화 기획안. 그 배후에서 실무 PM으로 리스크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컨설팅을 진행했던 게 누구였는지, 이 보고서의 메타데이터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서윤이 화면을 넘기자, 각 프로젝트의 최종 검토자 란에 그녀의 영문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임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가문의 후광 뒤에 숨어 무임승차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태강과 선일의 카르텔이 가진 고질적인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독자적인 신규 플랫폼의 BM을 구축할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러 왔습니다.”
그녀는 거침없이 발표를 이어 나갔다. 판교와 강남의 거친 IT 바닥에서 구르며 다져진 실무 용어와 날카로운 데이터 분석이 임원들의 숨통을 조였다.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이사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대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완벽하게 재단된 다크 네이비 수트 차림의 강태준이 보좌진을 거느리고 걸어 들어왔다. 그의 등장만으로 회의실의 공기 압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태준은 상석에 앉아 있던 임원들을 한번 쓱 훑어본 뒤, 단상 옆에 서 있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미세한 만족감과, 기묘한 열망이 스쳤다.
“회의가 아주 생산적으로 흘러가고 있군.”
태준이 정 이사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눈빛이 정 이사의 정수리를 내리눌렀다.
“질문이 더 있습니까, 정 이사님? 한서윤 실장의 역량에 대해 의구심이 남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이렉트 리포트를 받아보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제 인사 결정권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시겠습니까?”
정 이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대표님. 분석이 워낙 치밀해서……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태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 전면을 향해 선언했다.
“오늘부로 한서윤 실장을 태강그룹 미래전략기획실장으로 정식 발령합니다. 이견이 없으시다면 본 안건은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땅, 땅, 땅.
서윤은 턱을 치켜세웠다. 자신을 억누르던 가문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당당히 태강그룹 최연소 기획실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릿한 해방감이 솟구쳤다.
* * *
회의가 끝난 후,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미래전략기획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외부 임직원들의 시선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극도로 투명하고 위태로운 공간이었다. 서윤은 실장실 책상 위에 서류들을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근육이 뻐근해졌다.
“첫 출근 치고는 나쁘지 않은 퍼포먼스였어.”
어느새 다가온 태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대표님의 백업 덕분이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역할은 확실하게 해 주시네요.”
“말했잖아. 난 계약서에 적힌 조항은 철저히 지킨다고.”
태준이 서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서윤의 목덜미 부근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건 좀 거슬리는군.”
“네?”
태준이 무심한 듯 손을 뻗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서윤의 자켓 깃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대회의실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느라 안쪽 셔츠의 깃이 살짝 뒤집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서윤의 쇄골 바로 위, 민감한 살결에 닿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열감이 피부를 타고 심장으로 직행했다. 3년 전의 기억,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밤의 체온이 머릿속을 하얗게 채웠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좁혀졌다. 태준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무심한 척 옷깃을 정돈하는 그의 손길은 지독하게 느렸고, 의도적인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그 순간.
징-. 징-. 징-.
서윤의 손목과 태준의 손목에서 동시에 격렬한 진동이 울렸다.
스마트 워치의 화면에 시뻘건 경고 문구가 깜빡였다.
[경고: 대상자 간 미세 흥분 수치 급증.] [강태준 심박수: 118 bpm / 한서윤 심박수: 125 bpm] [현재 감정 동기화 지수: 18.5% - 주의 단계 진입]
기계적인 경고음이 두 사람의 억눌린 텐션을 사정없이 깨트렸다.
서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태준의 손을 거칠게 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스마트 워치의 수치가 빨간색으로 깜빡이며 서서히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대지 마세요.”
서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호 동의 없는 접촉은 페널티 대상입니다. 방금 지수가 18%까지 치솟았어요. 계약을 파기하고 싶으신 건가요?”
태준은 쳐내진 자신의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다시 냉혹한 가면을 쓴 것처럼 굳어 있었지만, 붉게 달아오른 눈가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고작 이 정도로 심박수가 뛰다니. 한서윤, 아직도 나한테 흔들리고 있는 건가?”
“착각하지 마세요.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반응일 뿐이니까.”
서윤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들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고 억누르기 위해 만든 계약서와 페널티 앱. 하지만 이 장치는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향한 억눌린 독점욕과 긴장감을 매 순간 가장 노골적으로 계량해 보여주는 고문 도구와 다름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 끝에 아슬아슬한 스파크가 튀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
미래전략기획실의 두꺼운 강화 유리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을 찢어발겼다.
비서들의 만류하는 비명 소리가 뒤섞인 가운데, 구두 굽 소리가 난폭하게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아이고, 우리 기특한 동생님께서 아주 대단한 짓을 벌이셨네?”
비열한 조소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남자.
서윤의 이복오빠이자, 그녀를 정략결혼의 제물로 바쳐 선일정밀의 후계 구도를 독점하려 했던 적대자, 한민우였다. 그의 손에는 정교한 녹음 장치처럼 보이는 검은색 단말기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