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예린의 손가락이 단말기 화면을 강하게 내리누른 순간, 이사회장 천장에 매립된 입체 음향 스피커에서 거친 하울링이 터져 나왔다.
지직거리는 기계음 뒤로, 이사회장의 고요를 찢고 흘러나온 것은 지극히 사적인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대표님과 나 사이에 비즈니스 외의 사적인 선은 없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우린 철저한 파트너일 뿐이에요.] [—그 선을 지키는 게 네 진짜 본심인가, 한서윤?] [—제 감정은 제 커리어만큼이나 통제 가능합니다. 대표님 역시 계약 파기의 대가가 무엇인지 잘 아실 텐데요.]
낮고 서늘한 한서윤의 음성과, 그녀의 숨결을 옭아매듯 묵직하게 가라앉은 강태준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이사회장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원로 이사들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고, 여기저기서 밭은 기침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단상 위에서 서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목에 찬 센티넬-K 단말기가 피부를 찌르듯 미세한 진동을 울려 대고 있었다. 액정 화면에 표시된 심박수는 이미 115bpm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어긋나면, 3년 전처럼 가문의 진흙탕 속으로 처참하게 끌려 내려가 모든 커리어를 박탈당할 터였다. 본능적인 공포가 서윤의 목을 옥죄어 왔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비즈니스 파트너? 계약서?"
원로 이사들 사이에서 고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차예린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전광판 제어 콘솔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이사님들!" 예린의 목소리가 한껏 격앙되어 이사회장을 채웠다. "지금 보시는 저 두 사람은 우리 태강그룹과 주주들을 철저히 기만했습니다! 가문의 압박을 피하고 지분을 방어하기 위해 '계약 연애'라는 가짜 연극을 꾸민 거라고요! 방금 들으신 음성이 그 결정적 증거입니다. 불법적인 계약으로 이사회를 속인 강태준 대표이사의 해임안은 지금 즉시 가결되어야 마땅합니다!"
한민우 역시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폈다. 그는 양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윤을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한서윤, 이제 끝이야. 네까짓 게 감히 선일의 지분을 가로채고 태강의 안방까지 차지하려 들어? 그 가짜 계약서가 까발려진 순간, 네가 가진 지분도, 그 잘난 실장 자리도 전부 무효야. 넌 그냥 사기꾼일 뿐이라고!"
사방에서 들이치는 비난의 화살 속에서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야가 흐려지려는 찰나, 시선 끝에 강태준이 걸려들었다.
태준은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깊고 차분한 눈동자는 오직 서윤만을 향해 있었다. 태준의 입가에 아주 옅은, 그러나 확신에 찬 미소가 걸렸다. 그 눈빛이 서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를 믿어, 서윤아. 네가 준비한 무대를 완성해.'
그 찰나의 눈빛 교환만으로 서윤의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태준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뒤에서 어떤 판을 깔아두었는지, 서윤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기묘한 신뢰가 혈관을 타고 뜨겁게 돌았다.
서윤은 턱을 치켜세웠다. 흔들리던 동공이 이내 차갑고 예리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단상에 놓인 마이크를 잡고, 이사회장 전체를 압도하는 맑고 명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 본부장님, 그리고 한민우 상무님. 훌륭한 티저 오디오 테스트였습니다. 덕분에 이사님들의 몰입도가 극대화되었군요."
예상치 못한 서윤의 여유로운 태도에 차예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 "뭐... 뭐라고? 오디오 테스트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서윤은 단상 위의 태블릿을 가볍게 터치했다.
화면이 전환되며 이사회장 전면에 거대한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가 펼쳐졌다. 화면 상단에 굵은 서체로 박힌 타이틀은 다름 아닌 [태강그룹 신규 에코-스마트 라인: 사용자 감성 동기화 모바일 제어 시스템 전사 기획안]이었다.
"방금 들으신 음성은 저희 미래전략기획실이 이번 분기 핵심 플래그십으로 준비 중인 인터랙티브 UI/UX 시스템의 티저 광고 리허설 녹취본입니다." 서윤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판교의 냉혹한 PT 현장에서 수백 번은 다듬어졌을 법한, 완벽하게 정제된 실무자의 어조였다. "스마트폰과 차량, 그리고 주거 공간이 완벽히 연동되는 '에코-스마트 라인'의 핵심은 바로 사용자의 생리적 흐름과 감정을 분석해 맞춤형 공간을 제어하는 기술입니다. 저희는 이 혁신적인 기술을 대중에게 가장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가장 이성적인 비즈니스 관계에서 시작해 감정의 한계를 시험하는 남녀'라는 콘셉트의 고감도 오디오 드라마 마케팅을 기획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한민우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게 어떻게 광고 마케팅이야? 너희 둘이 주차장에서 은밀하게 나눈 대화잖아! 내가 직접—"
"직접 감청이라도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오라버니?" 서윤이 날카롭게 말을 자르며 한민우를 쏘아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개발 보안 구역인 대표이사 전용 주차장에서 진행된 극비 리허설 음원을 선일정밀의 상무인 오라버니가 어떻게 소지하고 계신지 설명이 안 되는데요."
"그, 그건...!" 한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사회장의 원로 이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서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면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화면에는 특허청의 공식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특허 원장과 마케팅 대행사와의 계약서가 떠올랐다.
"이미 사흘 전, 해당 마케팅 기획안의 지식재산권 소유권 등록과 함께, 방금 들으신 독점 오디오 콘텐츠의 음량 전사 솔루션 특허 출원이 완료되었습니다. 차 본부장님이 실행하신 그 파일은 저희가 특허청에 제출한 기술 시연용 샘플 파일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서윤의 발표가 이어지는 동안, 이사들의 눈빛은 의혹에서 경탄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적들이 회심의 카드로 준비한 '도청 폭로'가, 서윤의 손을 거치자마자 태강그룹의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할 초대형 마케팅 쇼로 완벽하게 둔갑한 순간이었다.
이때, 굳게 닫혀 있던 이사회장 문이 열리며 태강그룹 법무팀장과 서초경찰서 소속 형사 세 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등장에 이사회장 내부의 동요는 정점에 달했다.
법무팀장이 강태준 대표이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한 뒤, 이사회를 향해 서류 봉투를 들어 보였다.
"태강그룹 법무팀입니다. 금일 오전, 미래전략기획실 한서윤 실장 차량 및 전용 집무실에 대한 불법 도청 및 감청 장치 설치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수거한 디바이스의 Mac 주소와 IP 추적 결과, 해당 불법 감청을 사수하고 지휘한 배후가 선일정밀 한민우 상무와 태강그룹 차예린 본부장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아니야! 저 여자가 꾸민 짓이라고!" 차예린이 단말기를 떨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단말기가 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법무팀장의 낭독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차예린 본부장이 그간 선일정밀 한민우 상무에게 태강의 신규 핵심 기술 소스 코드를 유출하려 모의한 정황이 담긴 연계 부패 리포트가 이사회 구성원 전원의 메일함으로 방금 발송되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및 업무상 배임, 산업스파이 행위에 해당합니다."
"말도 안 돼... 강태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차예린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태준을 바라보았지만, 태준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트의 단추를 채우는 그의 손길은 지극히 우아했고, 이사회장을 압도하는 아우라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차 본부장. 그리고 한 상무." 태준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장내를 가라앉혔다. "태강의 기술을 탐내고, 내 파트너를 음해하려 한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겁니다. 법무법인 태평양을 통해 청구할 수 있는 모든 민형사상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니, 남은 이야기는 조사실에서 하시죠."
형사들이 한민우와 차예린의 가로막고 나섰다. 한민우는 발악하며 서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보안요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이사회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차예린 역시 초점 잃은 눈으로 흐느끼며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끌려 나간 문이 닫히자, 이사회장은 기묘할 정도의 침묵에 휩싸였다.
그 침묵을 깨고 전광판 화면에 새로운 법적 문서 하나가 추가로 상영되었다. 태강그룹 파트너 계약서의 원본, 그리고 그 아래에 붉은색 직인과 함께 명시된 **[특약 제9조]**의 내용이었다.
원로 이사 중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화면을 소리 내어 읽었다. "특약 제9조... '제3자 감사 침입 및 불법적인 정보 유출 시, 피고용인 한서윤의 모든 귀책 사유는 면책되며, 이에 따른 모든 법적·경제적 리스크와 배상 책임은 대표이사 강태준 일방에게 귀속된다. 동시에 한서윤 실장에게 약정된 지분 8.5%의 소유권은 즉시 무조건적으로 이전 확정된다'라니..."
서윤은 화면을 바라보며 숨을 멈췄다.
과거 태준이 자신 몰래 수정해 두었다던 계약서의 실체가 마침내 이사회 전체의 눈앞에 드러난 것이었다. 그것은 계약이라는 이름의 쇠사슬이 아니었다. 어떤 풍파가 몰아쳐도 한서윤이라는 존재만큼은 완벽하게 보호하겠다는, 강태준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만든 '절대적인 방패'였다.
자신이 다칠지언정 그녀의 날개는 꺾이지 않게 하겠다는 피학적인 구원자의 맹세.
서윤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시울이 시려 왔지만, 이사회장 안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은 그저 묵묵히, 수고했다는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대단하군..." 이사회석 중간에 앉아 있던 한 원로 이사가 감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단순한 스캔들 루머인 줄 알았더니, 이런 완벽한 마케팅 쇼와 보안 대책까지 세워두었을 줄이야. 강 대표와 한 실장의 혜안이 아주 놀라워."
"선일정밀의 지분 의결권까지 확보하고 역공을 펼치다니, 실장의 자격은 이미 검증된 셈이군요."
우호적인 여론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주총을 앞두고 대표이사 해임안을 밀어붙이려던 반대파 임원들은 완전히 기가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 서윤의 완벽한 데이터 입증과 태준의 철저한 방어가 만들어 낸 완벽한 사이다 판정승이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였다.
이사회장의 가장 상석,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없이 상황을 관망하던 최고령 원로이자 이사회 의장인 오 실장이 천천히 마이크를 앞으로 당겼다. 그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서늘한 안광이 빛났다.
"조용히 하시오."
오 실장의 묵직한 한마디에 달아오르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태준과 서윤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방금 한 실장의 발표는 아주 흥미로웠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그 대담함과 실력은 인정하지. 하지만..."
오 실장이 서류를 톡톡 치며 말을 이어갔다.
"비즈니스 마케팅 쇼니 특허니 하는 것들로 본질을 흐리려 하지 말게. 자네들이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결국 주주들이 원하는 건 태강그룹 후계 구도의 안정성이야. 두 사람이 정말로 정략적 가짜 연애를 하는 파트너에 불과한지, 아니면 진짜 미래를 약속한 사이인지가 핵심이라는 뜻이네."
오 실장의 시선이 강태준의 얼굴에 꽂혔다.
"강 대표. 그리고 한 실장. 자네들의 그 결속이 연출이 아니라 진짜라면, 연말 주주 서약식에서 이를 정식으로 증명하게. 두 사람의 결혼과 지분 결합을 주주 공시로 명문화하라는 말일세."
이사회장의 대형 전광판 위로 연말 주주 서약식의 일정이 붉은 글씨로 번쩍였다.
"만약 연말까지 공시를 이행하지 못하거나, 이 모든 게 주주들을 기만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연극이었음이 드러난다면..." 오 실장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그때는 대표이사 해임안뿐만 아니라, 한 실장이 취득한 지분 전체의 효력 상실 및 강제 퇴출을 이사회 권한으로 의결하겠네. 자, 어떤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겠나?"
숨 막히는 긴장감이 다시금 이사회장을 지배했다.
피할 곳 없는 외통수였다. 진짜 연인이 되어 연말에 결혼을 공시하거나, 아니면 계약의 위반으로 모든 커리어와 지분을 잃고 파멸하거나.
서윤의 손목에 감긴 센티넬-K 디바이스의 액정이 붉은빛을 깜빡이며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심박수 소리가 이 정적 속에서 오직 태준과 서윤 두 사람에게만 선명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