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차예린의 붉은 입술이 뱀처럼 휘어졌다. 화면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이사회 임시 소집 통보 문자가 서윤의 망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대표이사 해임안 상정. 내일 아침 9시. 차갑게 식어 내린 기획실 복도의 공기 사이로 한민우의 밭은 숨소리와 감사팀원들의 눈치 보는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서윤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태준의 묵직한 존재감을 의식하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예린의 안광을 마주 보았다.

"겨우 내놓은 카드가 고작 이사회 흔들기인가요, 차 본부장님?"

서윤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호수처럼 투명해서, 오히려 그 안에 담긴 냉기가 도드라졌다.

"흔들기라니요. 이건 정당한 주주들의 권리 행사랍니다, 한 실장님. 아니, 이제 실장이라는 타이틀을 언제까지 붙이고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차예린이 턱을 치켜들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가 뿌린 매혹적인 향수 냄새가 비릿하게 코끝을 스쳤다.

"강 대표의 날개가 꺾이는 순간, 당신이 쥐고 있는 그 알량한 실무 권한도 전부 휴지조각이 될 텐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서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비웃음조차 섞이지 않은, 철저하게 상대를 무시하는 조소였다.

"상황 파악은 내가 아니라 오라버니와 차 본부장님이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불법 감청의 형사 책임과 경영권 찬탈을 위한 이사회 선동이 엮였을 때, 시장이 어느 쪽에 등을 돌릴지. 내일 아침 이사회장에 기자들이 얼마나 몰려들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너, 너 이년이 끝까지……!"

한민우가 핏대를 세우며 손을 뻗으려 했으나, 서윤의 뒤편 어둠 속에서 태준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서윤의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복도 전체에 숨 막히는 압박감이 내려앉았다. 흐트러짐 없는 블랙 수트 핏 아래로 강인한 어깨가 솟아 있었고, 반쯤 풀린 셔츠 깃 너머로 굳게 다문 턱선이 날카로웠다. 태준의 서늘한 눈길이 한민우의 손끝에 닿자, 민우는 흠칫하며 번개라도 맞은 듯 손을 거두었다.

"그 손 치워, 한민우 상무."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바닥을 긁는 듯한 공명음을 냈다.

"그리고 차 본부장. 내일 아침 9시 이사회라니,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겠군.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줄 테니, 오늘 밤새도록 쥐어짜 낸 카드나 마저 다듬고 오도록 해."

태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윤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가 서윤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들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미래전략기획실 안쪽의 비밀 스위트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차예린의 가쁜 숨소리와 한민우의 신경질적인 구두 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

*

철컥, 하고 이중으로 설계된 거울 벽 프레임이 맞물리며 은밀한 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외부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스위트룸 내부의 은은한 간접 조명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태준은 벽에 기대어 서서 이마를 짚었다. 그의 긴 손가락 사이로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이성이 한순간에 느슨해진 탓인지,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윤은 데스크 위에 놓인 태강그룹 파트너 계약서 가죽 바인더를 집어 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주저 없이 바인더를 열어젖히고, 그동안 차마 들여다보지 못했던 계약서의 마지막 문단, '특약 제9조' 페이지를 거칠게 넘겼다.

[특약 제9조: 제3자 감사 침입 및 계약 무효화 시도 발생 시, 본 계약의 모든 대내외적 책임과 민형사상 손해배상 의무는 을(한서윤)에게 귀속되지 아니하며, 전적으로 갑(강태준)이 부담한다. 이때 갑이 보유한 태강그룹 지분 중 15%는 즉시 신탁 기관에 동결되며, 을의 커리어적 안정성이 보장될 때까지 처분 권한이 제한된다.]

활자들이 서윤의 시야 속에서 번져 나갔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서류를 쥔 채 태준에게 다가갔다.

"강태준. 대답해. 이게 왜 여기에 이렇게 적혀 있어?"

태준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밤의 바다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아무런 변명도, 후회도 담겨 있지 않은 무채색의 눈빛이었다.

"말 그대로야. 계약이 깨지거나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책임은 나만 지면 돼. 네 지분과 커리어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도록 설계해 둔 장치야."

"왜? 왜 네 멋대로 이런 짓을 해!"

서윤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심장 박동수가 가파르게 치솟으며,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의 센티넬-K 디바이스가 붉은 경고등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미세한 진동이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깟 페널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너 바보야? 지분 15%면 네가 태강에서 대표이사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선이잖아! 그걸 나 때문에 통째로 묶이게 만들어 놓으면, 이사회가 널 가만둘 리 없다는 걸 몰랐어? 왜 나를 지킨답시고 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냐고!"

서윤의 다그침은 가슴속 깊이 묻어둔 울음과도 같았다. 3년 전, 자신을 가문의 폭압적인 음모로부터 지키기 위해 모진 악역을 자처하며 떠났던 그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상처받는 것은 자신 하나로 족하다는 듯, 모든 칼날을 홀로 받아내는 피학적인 구원자.

태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발걸음이 서윤의 코앞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되지 않게 좁혀졌다. 센티넬-K의 심박수 그래프가 위험 수위인 120 bpm을 돌파하며 날카로운 경보음을 뿜어냈지만, 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윤의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한서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 지분이나 자리 따위는 언제든 다시 뺏어오면 그만이야. 하지만 네가 무너지는 건, 두 번 다시 내 눈으로 못 봐. 3년 전에 널 잃었던 걸로 충분해."

"태준아……."

"이 계약은 애초에 널 지키기 위한 방패였어. 방패가 주인을 다치게 한다면, 그건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야."

그의 오만한 듯하면서도 애절한 독점욕이 서윤의 심장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서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더 이상 그의 희생 뒤에 숨어 보호받는 나약한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남지 않겠다고, 그녀는 이미 다짐했었다.

서윤은 데스크 위의 가위꽂이에서 날카로운 전지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태준의 눈앞에서, 가죽 바인더 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비즈니스 파트너 계약서'를 거칠게 뜯어냈다.

사각, 서걱.

금속 날이 종이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서윤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반으로 자르고, 다시 가로세로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하얀 종이 조각들이 마치 한겨울의 눈발처럼 두 사람의 발치로 흩날려 떨어졌다.

"한서윤, 너 지금 무슨 짓을……."

태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계약은 파기야."

서윤이 찢어진 계약서 조각을 밟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핑계 뒤에 숨지 않겠어. 네가 나를 지키기 위해 네 모든 것을 걸었다면, 나 역시 내 모든 것을 걸고 널 지킬 거야. 이제부터는 진짜 내 방식으로 싸우겠어. 그러니까 강태준, 넌 그냥 내 곁에 온전히 서 있기만 해. 내 동반자로서."

그것은 명령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뜨겁고 과감한 고백이었다. 태준은 흩날리는 종이 조각들 사이로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설렘과 함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외심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언제나 품 안의 새처럼 지켜주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그녀가, 이제는 스스로 검을 들고 전장에 서서 자신을 이끌려 하고 있었다.

태준의 입술 끝에 엷은 호선이 그려졌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책임감이 한순간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좋아. 기꺼이 네 지시를 따르지, 내 실장님."

*

그날 밤, 미래전략기획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서윤은 데스크의 모니터 세 대를 동시에 켜고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그녀가 지난 몇 달 동안 피땀 흘려 개발한 친환경 가전 기획안 '에코-스마트 라인'의 특허 및 지분 구조가 화면 가득 나열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기획서가 아니었다. 선일정밀의 핵심 부품 기술과 태강그룹의 글로벌 유통망을 결합한, 양사 모두에게 수조 원대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독보적인 마스터키였다.

"지훈 씨."

서윤이 수화기를 귀에 대며 날카롭게 지시했다.

"지금 즉시 선일정밀 내부의 우호 지분 보유자들 연락망 공유해 주세요. 한 회장님의 독단적인 승계 구도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외이사들과 소액주주 연대 대표들 위주로요."

[예, 한 실장님! 바로 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건 선일정밀의 승계 구도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일입니다.]

김지훈 비서관의 목소리에는 우려와 흥분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상관없어요. 아버지가 나를 정략결혼의 카드로만 썼다면, 나 역시 선일의 지분을 내 자립을 위한 무기로 쓸 뿐이니까요."

서윤은 마우스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친환경 가전 기획안의 실무 지분 가치를 평가한 공인 보고서를 첨부했다. 그리고 선일정밀의 대주주이자 한 회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친가 쪽 방계 친척들과 사외이사들에게 메일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메일의 요지는 명확했다. '한민우 상무의 불법 감청 행위로 인한 선일정밀의 브랜드 가치 훼손 및 형사 고발 리스크', 그리고 '한서윤 실장이 독자 확보한 친환경 특허 지분을 통한 태강그룹과의 다이렉트 컨소시엄 구성 및 주주 가치 극대화'.

선일정밀 소유주들의 승계 지분 구도를 뿌리째 뒤엎는, 서윤만의 독자적인 이사 투입 및 지분 스왑 과정이 어둠 속에서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옆자리에서 태강그룹 내부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해 통화를 마친 태준이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꼿꼿한 등과 모니터 빛에 푸르게 빛나는 옆얼굴은 투사 그 자체였다. 태준은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에 깊은 전율을 느꼈다.

"이사회 시작까지 앞으로 세 시간 남았군."

태준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서윤의 데스크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피곤하지 않아?"

"피곤할 틈이 어디 있어요."

서윤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차예린과 한민우가 내일 아침 이사회장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면, 오히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데요."

"그 전투적인 태도, 아주 마음에 들어."

태준은 서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의 손가락 끝이 뺨에 닿을 때마다 센티넬 디바이스의 수치가 요동쳤지만,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숫자에 얽매이지 않았다. 계약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낸 지금, 그들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8시 45분. 태강그룹 본사 로비는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원로 이사들의 차량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플래시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이사회 회의실 앞 복도. 차예린은 세련된 레드 원피스를 입고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 옆에서 한민우는 태강그룹 감사팀장과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며 연신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어이, 차 본부장. 오늘로 강 대표는 끝장이야. 지분 15%가 묶인 상태에서 이사회가 해임안을 가결하지 않을 리가 없지. 게다가 우리가 준비한 결정적 카드가 있잖아?"

"물론이죠, 오라버니."

차예린이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한서윤이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대주주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어요. 감히 태강의 대표이사를 꼬드겨 사적인 계약으로 경영권을 흔들려 했다니. 도덕적 해이의 극치 아닌가요?"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 전체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일정한 리듬으로 울렸다. 뚜벅, 뚜벅.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인물은 다름 아닌 한서윤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단정한 오피스 룩이 아닌, 핏이 완벽하게 떨어지는 새하얀 스리피스 수트를 입고 있었다. 단추를 굳게 채운 베스트와 어깨선이 날카롭게 살아 있는 재킷, 그리고 먼지 하나 없는 슬랙스 바지.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목선은 우아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을 풍겼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아이패드와 함께, 선일정밀 지분 보유자들의 위임장이 담긴 가죽 폴더가 들려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강태준이 블랙 더블 브레스트 수트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아우라가 서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계약이라는 가면에 숨은 가짜 연인이 아니었다. 서로의 패를 완전히 공유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완벽한 동반자이자 전우였다.

서윤은 차예린과 한민우의 앞을 지나쳐 이사회장 문 앞으로 향했다. 그녀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위풍당당한 기세에 복도에 대기하던 임원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섰다.

"한서윤……?"

차예린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당신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오려는 거지? 여긴 이사회장이야. 미래전략기획실장 따위가 참석할 자리가 아니라고!"

서윤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죽 폴더를 들어 올려 차예린의 눈앞에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차 본부장님, 공부 좀 더 하셔야겠어요."

서윤의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맑게 울려 퍼졌다.

"오늘 새벽 자로, 선일정밀의 대주주인 한민우 상무님의 불법 범죄 리스크를 우려한 이사회와 소액주주 연대가 자신들의 의결권을 저에게 전량 위임했습니다. 더불어, 제가 보유한 '에코-스마트 라인'의 특허 지분 가치를 태강그룹 신규 사업 지분과 스왑하는 안건이 이사회 정식 승인을 거쳤고요."

서윤은 차예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차가운 수트 핏의 광채가 예린의 붉은 원피스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현재 저는 태강그룹 지분 8.5%를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지주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겁니다. 대표이사 해임안 표결에 직접 표를 던질 권리가 있는 주주로서 말이죠."

"뭐, 뭐라고……?"

한민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우리 가문 지분이 왜 네까짓 년한테 넘어가!"

"아버님이 아시면 참 기뻐하시겠네요, 오라버니."

서윤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저지른 멍청한 도청 짓 때문에 가문의 지분권이 나에게 통째로 넘어왔으니 말이에요. 자, 그럼 들어가 볼까요?"

서윤은 이사회장의 무거운 전동문을 거침없이 밀어젖혔다. 회의실 내부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원로 이사들과 회장단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가문에 억눌려 흐느끼던 나약한 한서윤이 아니었다. 완벽한 수트를 입고 태강의 심장부를 장악하러 온 새로운 실권자였다.

태준은 서윤의 뒤에서 그녀의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차예린은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 광기 어린 독기가 서렸다. 예린은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전용 단말기를 꺼내 들며 이사회장 중앙의 대형 전광판 제어 콘솔로 빠르게 걸어갔다.

"해보자는 거지, 한서윤?"

차예린이 속삭였다.

"당신이 아무리 지주 자격을 얻었어도, 이 대표이사가 가짜 연애 계약으로 이사회를 기만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건 무효야!"

차예린의 손가락이 단말기 화면 위에서 멈췄다. 화면에는 한민우가 지하 주차장에서 도청한, 태준과 서윤의 은밀한 대화와 밀착 당시의 음성 파일이 재생 대기 상태로 떠 있었다.

"이 음성이 이사회장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순간, 당신들의 그 가짜 연극도 끝이야."

차예린이 자신 넘치는 동작으로 이사회 전광판에 음성 전송 실행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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