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주주 서약식에서 이를 정식으로 증명하게. 두 사람의 결혼과 지분 결합을 주주 공시로 명문화하라는 말일세."
오 실장의 칼날 같은 선언이 이사회장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가라앉았던 침묵 위로 서윤의 손목에 감긴 센티넬-K 디바이스가 붉은 경고등을 깜빡였다. 삐익, 삐익, 신경을 긁는 미세한 전자음이 오직 두 사람의 고막만을 두드렸다.
서윤은 턱 끝에 힘을 주며 호흡을 골랐다.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심박수가 손끝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터질 듯한 긴장감 속에서 그녀는 슬며시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단 한 자락의 동요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시선은 오 실장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결혼 공시라니요."
태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그의 음성에는 이사회의 압박에 밀리지 않는 단단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오 의장님, 주주들이 원하는 건 후계 구도의 안정성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적인 계약의 강제 집행을 통해서만 증명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태강의 가치는 명문화된 혼인 서약서가 아니라, 우리가 시장에 제시할 실적과 비전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군, 강 대표."
오 실장이 혀를 차며 안경을 고쳐 썼다.
"비전실의 실적은 인정하네. 하지만 자네들의 결속이 가짜라면, 향후 발생할 지분 분쟁과 경영권 리스크는 온전히 주주들의 몫이 돼. 진짜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면 연말 공시를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약 피한다면, 그 자체가 이 연애가 기만극이라는 반증이 될 걸세."
외통수였다. 이사회장 안의 임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입을 주목했다. 서윤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가문의 도구가 되어 팔려 가듯 정략결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어렵게 거머쥔 미래전략기획실장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서윤은 마이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행하겠습니다."
태준의 시선이 순식간에 서윤에게로 쏠렸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균열이 일었지만, 서윤은 오 실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연말 주주 서약식 전까지, 시장과 주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지분 결합 및 공시 계획안을 제출하겠습니다. 저희의 파트너십이 단순한 쇼가 아니라는 것을 법적, 제도적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의장님께서도 그때까지 대표이사 해임안 및 제 지분 회수에 대한 논의를 전면 보류해 주십시오."
오 실장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좋아. 대담한 태강의 며느리답군. 연말까지 지켜보겠네."
의장의 의사봉이 탁, 탁, 탁 세 번 울리며 이사회가 정식으로 폐회되었다. 임원들이 웅성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서윤은 자리에 굳건히 서서 태준을 마주 보았다. 태준은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배후의 시선들을 피해 서윤에게 다가왔다.
"서윤아."
"여기서는 실장님이라고 부르세요, 대표님."
서윤은 차갑게 선을 그으며 서류철을 챙겨 이사회장을 나섰다. 등 뒤로 느껴지는 태준의 시선이 뜨거웠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더러운 덫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 *
미래전략기획실 아래층에 위치한 전용 주차장. 서윤은 비서실 차량인 검은색 세단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곁에는 태강그룹 법무팀장과 사설 보안 업체 직원, 그리고 미리 연락을 취해 둔 경찰 과학수사대 소속 수사관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 한 실장님?"
경찰 수사관이 장비를 챙기며 물었다. 서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해 주세요. 차량 내부 및 하부 프레임 전체를 정밀 스캔해 주십시오."
수사관들이 차량 문을 열고 탐지기를 들이밀었다. 삐이- 하는 고주파 소음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석 아래쪽 깊숙한 곳에서 탐지기가 요란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꺼내 올린 것은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정교한 검은색 단말기였다. 단순한 위치추적기가 아니었다. 고성능 마이크와 실시간 송수신 칩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감청 장치였다.
"이거군요."
서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장치를 노려보았다. 이복오빠 한민우가 비전실을 난입했던 그날, 그리고 자신의 동선을 완벽히 파악해 덫을 놓으려 했던 모든 배후에 이 더러운 물건이 있었다. 9화에서 한민우가 은밀히 설치해 둔 바로 그 감청 장치였다.
"지문 및 기기 고유 번호 분석 결과가 나오는 대로 정식 수사 보고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이미 해당 단말기의 구매 경로와 송신 대상 IP가 한민우 사장의 개인 대포폰 및 차명 계좌로 연결된다는 물증은 확보해 두었습니다."
서윤이 준비해 둔 서류 봉투를 수사관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한민우가 사설 탐정 업체에 송금한 내역과 통화 기록, 그리고 기기 일련번호가 일치한다는 법 과학 연구소의 감정서가 들어 있었다.
"이 정도 물증이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및 위치정보법 위반으로 즉시 체포 영장 발부가 가능합니다. 한민우 사장이 아무리 선일정밀의 승계자라고 해도, 대기업 임원의 차량에 감청 장치를 심은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중범죄입니다."
법무팀장의 설명에 서윤의 입꼬리가 호선으로 휘어졌다. 조용히 숨통을 조여 오던 쥐새끼의 꼬리를 드디어 완벽하게 밟은 순간이었다.
그때, 주차장 기둥 뒤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한민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탄로 났음을 직감한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짐짓 당당한 척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서윤! 네가 감히 나를 뒷조사해? 이게 무슨 짓거리야!"
"내가 할 소리를 오라버니가 하시네요."
서윤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수사관이 들고 있는 감청기를 가리켰다.
"내 차에 이런 추잡한 장치를 달아둔 도둑놈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내 눈앞에 있었네요. 한민우 사장님."
"이, 이건 모함이야! 난 모르는 일이라고! 내 밑에 놈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이다!"
한민우는 비열하게 꼬리를 자르려 발악했다. 하지만 서윤은 이미 그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해 둔 상태였다.
"꼬리 자르기는 그만하시죠. 이미 오라버니의 지시가 담긴 녹취록과 자금 흐름을 경찰에 정식으로 넘겼습니다.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까지 더해졌으니, 선일정밀의 후계 구도에서 오라버니의 이름은 완전히 지워지겠네요."
"뭐라고?"
한민우가 서윤의 덜미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민우 씨,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놔! 이거 놓으라고! 한서윤, 네가 감히 나를!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경찰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한민우는 비명을 질러댔다. 서윤은 그 모습을 미동도 없이 바라보았다. 가문의 권력을 믿고 자신을 평생 괴롭히며 도구로 취급했던 이복오빠의 완벽한 몰락이었다. 속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이 전신을 감쌌지만, 서윤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진짜 해결해야 할 거대한 장벽이 아직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대표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태준은 책상에 기댄 채 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짙은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서윤은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의 책상 위에 툭 던졌다.
태강그룹 파트너 계약서 복사본이었다. 정확히는 '특약 제9조'가 붉은색 펜으로 강조된 페이지였다.
"이게 뭐죠, 대표님?"
서윤의 어조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서글픔은 숨길 수 없었다.
"제3자 감사 침입 시 자동 귀책 독소조항. 계약이 위반되거나 진위가 유출될 경우, 모든 법적, 경제적 책임을 강태준 대표 개인이 전적으로 부담하며 본인의 지분 15%를 즉시 동결 및 양도한다. 왜 이걸 나 몰래 수정해 둔 거예요?"
태준은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직 서윤의 눈동자만을 담았다.
"네가 알면 반대했을 테니까."
"당연히 반대하죠! 왜 당신 혼자 모든 리스크를 독박 쓰려고 한 건데요? 날 지키겠다는 핑계로 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느냐고요!"
서윤의 목소리가 결국 가늘게 떨렸다.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히 비즈니스로만 대하려 했던 방어기제가 그의 무모한 희생 앞에서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게 내가 널 지키는 방식이야, 서윤아."
태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향취가 서윤의 감각을 마비시킬 듯 밀려들었다.
"3년 전에도 난 널 지키지 못했어. 내 가문이 널 찢어놓고 망가뜨리는 걸 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고. 이번만큼은 내 모든 걸 잃더라도 널 완벽하게 독립시키고 싶었어. 그 계약서는 처음부터 널 위한 방패였고, 내게는 기꺼이 짊어질 대가였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서윤이 그의 가슴을 밀쳐내려 손을 뻗었지만, 태준은 도리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움켜쥐었다.
찰나의 접촉.
서윤의 손목에 채워진 센티넬-K 디바이스와 태준의 스마트 워치가 동시에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경고: 상호 동의 없는 신체 접촉 감지. 흥분 지수 65% 돌파.]
액정 화면에 붉은 경고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심박수가 110을 넘어 고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태준의 가슴팍을 움켜쥐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더 이상 숨을 생각 하지 마요. 비즈니스라는 껍데기 뒤에 숨어서 혼자 영웅 주의에 취해 있지 말란 말이에요."
서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연말 주주 서약식 공시, 내가 왜 받아들였는지 알아요? 진짜 연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가문을 상대로 거둔 모든 승소와 내 커리어는 전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난 이제 당신 없는 성공 따위 원하지 않아."
태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호흡이 가빠지며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윤아, 넌 몰라... 내가 널 얼마나..."
"알아. 그러니까 이제 그 가혹한 감정 제한 페널티 따위 부숴버려요. 우리가 진짜가 되면, 그딴 독소조항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해."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엉켰다. 법적으로 얽혀 있던 태강그룹의 승계 구도와 정략결혼의 구속 고리를 철폐하는 서류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이 시점,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의 장벽은 오직 두 사람의 망설임뿐이었다.
[위험: 흥분 지수 78% 초과. 계약 파기 페널티 발동 10초 전.]
집무실 가득 날카로운 전자 경고음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붉은 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며 파멸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이 진심을 고백하는 순간 두 사람은 법적으로 모든 지분과 커리어를 박탈당하고 강제 해고 처분을 받게 된다. 계약서가 규정한 가혹한 '감정 고문 장치'의 종말이 코앞이었다.
태준의 눈에 서린 이성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더는 못 참아."
태준이 거친 손길로 자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디바이스를 뜯어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콰직, 소리와 함께 액정이 깨지며 경고음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떨리는 입술로 낮게 속삭였다. 고통과 열망이 뒤섞인, 짐승 같은 미소였다.
"전부 다 가져가라고 해. 내겐 너 하나면 돼."
태준이 서윤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거칠고도 간절하게 서윤의 입술 위로 겹쳐왔다. 숨이 막힐 듯한 밀도 속에서, 두 사람을 얽매던 모든 계약의 사슬이 마침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