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 대표, 이 계약은 철저히 비즈니스일 뿐이에요. 서로의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알아. 선을 넘지 않는 것, 그게 우리 계약의 제1조건이니까."

밀폐된 스위트룸의 미세한 공기 흐름마저 일순간 굳어버렸다.

서윤의 귀청을 찢고 들어온 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태준의 낮고 건조한 음성. 지독히도 익숙한 차 안의 소음과 함께 흘러나온 그 대화는 명백히 두 사람이 비밀리에 체결한 비즈니스 연애 계약의 결정적 증거였다.

한민우가 쥔 검은색 단말기에서 재생되는 음성은 가공할 만한 성량으로 스위트룸의 거울 벽면을 때렸다.

"다들 똑똑히 들었지? 이게 바로 고고한 척하던 우리 한 실장님이 대기업 대표를 꼬여내 짜고 친 연극의 실체야! 계약 연애로 양가를 기만하고 주주들을 농락한 사기극이라고!"

한민우의 승리에 찬 고함과 함께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감사팀원들의 다급한 수군거림,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흘러나오는 차예린의 정제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서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하얗게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디바이스 '센티넬-K'가 기분 나쁜 미동을 시작했다. 액정 위로 붉은 수치가 빠르게 치솟았다. 심박수 115, 118, 122 bpm.

기준치인 120을 넘어서는 순간, 감정 제한 페널티가 발동되어 계약상의 모든 권리와 지분이 즉시 박탈된다. 경고음이 귓가에서 윙윙대는 착각이 들었다.

철컥, 철커덕!

문고리가 거칠게 덜컹거렸다.

"한민우 상무님! 이 안은 대표이사의 극비 개인 집무 공간입니다! 권한 없는 외부인의 강제 진입은 엄연한 불법 행위입니다!"

바깥에서 김지훈 비서관이 목청을 높여 막아서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민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말기의 볼륨을 더 높이며 문을 두드렸다.

"불법? 기밀 유출과 경영진 기만 혐의가 포착된 마당에 무슨 불법 타령이야! 비서실에서 계속 방해하면 공범으로 묶어 사법 처리할 줄 알아! 감사팀, 당장 압수수색 권한으로 강제 해정해!"

시스템 경보음이 붉은빛을 뿜으며 거울 벽면을 빨갛게 물들였다. 외부에서 인가되지 않은 특수 해킹 장비가 감시망 도어락에 연결된 것이 분명했다. 해정률 15%, 30%를 알리는 디지털 숫자가 벽면 디스플레이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소파 위에서 신음하던 태준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차예린이 흘린 약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그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뺨과 달리, 서윤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만큼은 얼음송곳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준 씨, 움직이지 마요. 아직 몸이……."

서윤이 다급히 그의 어깨를 짚으려 하자, 태준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가 서윤의 차가운 피부를 적셨다.

"시간이 없어."

태준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려 나온 것은 짙은 네이비색 메탈 재질의 아주 작은 USB 형태의 카드였다. 태강그룹 내에서도 오직 단 한 사람, 대표이사의 직속 권한으로만 기획실 메인 서버를 통제할 수 있는 '최종 비전 마스터키'였다.

"저들이 시스템을 강제로 열기 전에, 메인 서버 자체의 제어권을 이 방으로 끌고 와야 해."

그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메인 제어 콘솔 앞으로 다가갔다. 콘솔의 슬롯에 마스터키를 밀어 넣자, 거울 벽면 가득 푸른색 시스템 복원 창이 떠올랐다.

[최종 승인자: 강태준 대표이사. 시스템 복원 및 잠금 제어 모드 진입.]

태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신속하게 날아다녔다. 자판을 두드리는 맑은 타격음이 방 안의 정적을 깼다. 문밖에서 붉은빛으로 깜빡이던 강제 해정 진행률이 75%에서 일순간 정지하더니, '액세스 거부(Access Denied)'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 0%로 초기화되었다.

"뭐, 뭐야? 왜 해정이 안 돼? 야! 장비 똑바로 안 돌려?!"

문밖에서 한민우의 당황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으나, 제어 화면에 나타난 또 다른 텍스트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고: 제3자 외부 감사 침입 시도 감지. 계약 특약 제9조 자동 발동.]

"……특약 제9조?"

서윤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4화에서 계약을 체결할 당시, 계약서 구석에 아주 작게 적혀 있던 조항이었다. 당시는 사내 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선언문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제어 화면상의 계약서 전문은 그녀가 알고 있던 내용과 완전히 달랐다.

화면 가득 펼쳐진 붉은 글씨의 특약 전문이 서윤의 두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특약 제9조 (제3자 감사 침입 시 자동 귀책 및 소유권 이전): 외부 세력이나 사내 감사팀에 의해 계약 연애의 진위 여부가 공격받거나 시스템 해킹 시도가 발생할 경우, 계약상의 모든 법적·경제적 책임 및 유출 리스크는 을(한서윤)이 아닌 갑(강태준)이 독단적으로 부담한다. 이 경우 갑이 소유한 태강그룹 지분 중 15%를 즉시 이사회에 위탁하며, 을의 미래전략기획실장 자격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민형사상 방패막이는 갑의 개인 자산으로 충당한다.]

서윤의 숨이 멎었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예요, 태준 씨?"

그녀는 콘솔 화면을 가리키는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리스크를…… 왜 당신이 다 뒤집어쓰게 되어 있는 건데? 분명히 계약 위반이나 진위 유출 시에는 양방의 균등한 책임하에 지분을 분할 몰수당한다고 했잖아요! 왜 계약서가 이렇게 고쳐져 있어?"

태준은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완벽하게 빚어진 옆얼굴은 차갑다 못해 서글플 정도로 고요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버티지 못하니까."

"뭐라고요?"

"한민우와 선일정밀이 널 어떻게 흔들지 내가 모를 것 같았어?"

태준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독점욕과, 그보다 더 거대한 희생의 의지가 넘실거렸다.

"처음부터 이 계약은 널 지키기 위한 방패였어. 네가 가문의 정략결혼 도구에서 벗어나 온전히 네 커리어를 쌓고 자립할 때까지, 내가 모든 칼날을 맞아주는 구조여야만 작동하는 방패."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당신은 모든 걸 잃게 돼요! 이사회에서 지분을 몰수당하고 대표이사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상관없어."

태준의 목소리에는 티끌만 한 망설임도 없었다.

"네가 무사할 수 있다면, 내 지분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3년 전에도 난 널 지키지 못했어. 내 무력함 때문에 네가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아. 두 번은 그렇게 안 둬."

그는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윤이 가문의 폭압으로부터 온전히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파멸 따위는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피학적 구원자의 면모.

서윤의 가슴 구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3년 동안 원망하고 미워하려 애썼던 첫사랑의 실체가, 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피를 흘리고 있던 보디가드였다는 사실이 그녀의 영혼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서윤은 콘솔 화면 옆의 시스템 접속 로그를 아래로 쓸어내렸다.

감사팀의 강제 해정 명령을 승인한 상위 IP와 결재 라인의 이름들이 줄줄이 스크롤되어 내려갔다. 태강그룹 원로 이사회의 이름들 사이에, 아주 낯익고도 지독한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최종 승인 협조처: 선일정밀 한선일 회장.]

"아버지……."

서윤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 모든 연극을 깨부수고 자신을 다시 가문의 정략결혼 시장으로 끌고 가려던 거대한 배후는, 다름 아닌 그녀의 친아버지인 한 회장이었다. 태강그룹 내부의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원로 세력과 결탁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삼아 선일정밀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한민우가 저 단말기를 들고 설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어. 아버지가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

서윤의 눈빛이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갔다.

그동안 그녀를 지배했던 것은 '진심을 들키면 버려질 것'이라는 방어기제와 트라우마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철저히 비즈니스라는 차가운 껍데기 속으로 도피해 있었고, 태준이 내미는 손길조차 페널티라는 핑계로 밀어내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 태준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수호하고 있었다.

그의 헌신을 마주한 순간, 서윤의 마음속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던 빗장이 큰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평생을 가두었던 두려움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그 자리에 뜨거운 분노와 명확한 의지가 들어찼다.

'더 이상 당신 뒤에 숨어 있지 않아.'

서윤은 콘솔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태준의 떨리는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삐비비빅!

두 사람의 신체가 완전히 밀착되자, 센티넬-K 디바이스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토해냈다. 화면에 표시된 흥분 지수가 78%를 돌파하며 붉은 경고창이 깜빡였다. 계약 파기, 지분 몰수, 강제 해고라는 무시무시한 문구들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서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준의 손가락을 꽉 쥔 채,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태준 씨, 이제 이 비즈니스 계약은 수정해요."

"서윤아, 손 떼. 디바이스가……."

"상관없어요. 이따위 기계가 감히 우리를 위협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서윤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단단한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당신이 날 지키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면, 나 역시 내 방식대로 당신을 지키겠어요. 한 회장과 태강 이사회가 짠 판을 내 손으로 직접 깨부수겠다고요."

그녀는 콘솔의 수동 제어 모드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최종 비전 마스터키의 권한을 이용해 외부 감사팀의 접근 시도를 완벽히 차단하는 방화벽을 구축함과 동시에, 한민우가 들고 있던 불법 감청 단말기의 수신 주파수를 역추적해 기획실 메인 서버에 역으로 박제해 버렸다.

"불법 도청 자료를 공적인 감사 증거로 채택하려 한 순간, 한민우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철창행이에요. 지훈 씨가 대기시킨 변호인단이 날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먹잇감을 던져준 거죠."

서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차갑고도 매혹적인, 완벽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준비 끝났어요. 문 열어요, 태준 씨."

태준은 서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깃든 흔들림 없는 확신을 본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네 뜻대로 해."

태준이 콘솔의 엔터 키를 눌렀다.

스위트룸을 굳게 닫고 있던 거울 벽면이 부드러운 구동음과 함께 좌우로 갈라졌다.

스위트룸 내부의 환한 조명이 바깥의 어두운 기획실 복도로 쏟아져 나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한민우와 감사팀원들, 그리고 차예린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꽂혔다.

한민우는 승리를 확신하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흔들어 보였다.

"드디어 기어 나오시는군, 가짜 부부 동반자 여러분? 이 도청 파일이 온 세상에 퍼지면 태강그룹 주가가 어떻게 곤두박질칠지 기대되지 않아?"

서윤은 천천히 걸어 나가 한민우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큰 키와 꼿꼿한 자세가 한민우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세를 만들었다.

"상무님, 그 불법 도청 장치 말인데 말이죠."

서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제 개인 차량에 은밀히 설치해 두신 정교한 마이크와 위치추적 장치, 방금 저희 보안팀을 통해 실시간으로 감지되어 기획실 메인 서버에 역추적 로그가 영구 박제되었습니다. 통신비밀보호법 제16조 위반. 벌금형도 없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는 중범죄죠."

"뭐, 뭐라고?"

한민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은 단말기를 다급히 뒤로 감추려 했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거기다 아버님인 한 회장님의 결재 라인까지 엮여 있으니, 선일정밀의 주가 역시 무사하지 못하겠네요. 오라버니가 저지른 멍청한 짓 때문에 가문 전체가 형사 고발 대상이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서윤의 통쾌한 다그침에 한민우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주변에 서 있던 감사팀원들 역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완벽한 주도권의 전환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편 어둠 속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차예린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한서윤 실장님, 대단하시네요. 형사 고발이라니, 무서워서 살겠나."

차예린이 천천히 걸어 나와 서윤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잔인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어쩌죠? 그 고발장 접수되기도 전에, 모든 판판이 다 뒤집어질 텐데."

차예린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들어 서윤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방금 발송된 태강그룹 이사회 비상 연락망의 문자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방금 태강그룹 원로 이사회의 임시 소집이 의결되었어요. 안건은 '강태준 대표이사의 도덕적 해이 및 경영권 승계 부적합에 따른 대표이사 해임안 상정'."

차예린의 붉은 입술이 뱀처럼 휘어졌다.

"내일 아침 9시 이사회예요. 강 대표가 가진 모든 지분이 묶인 제9조 특약이 발동된 지금, 과연 대표이사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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