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목을 조여 오는 스마트 워치의 붉은 액정이 비명 지르듯 점멸했다. 찌르르한 진동이 뼈마디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흔들었다. 한서윤은 가빠지는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었다. 거울 벽 측면에 숨겨진 보안 패널은 지문 인식을 요구하며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태준의 뜨거운 체온이 그녀의 어깨와 가슴팍을 짓누르는 가운데, 서윤은 오직 그를 숨겨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제어 장치를 향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삐빅, 경고음이 고요한 기획실의 정적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네, 둘이서 같이."

어둠을 뚫고 흘러나온 차예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리는 종이는 다름 아닌 태강그룹 법무팀의 공식 서인이 찍힌 계약 파기 통보서였다. 센티넬-K 솔루션의 서버가 해킹당해 실시간 데이터가 그대로 노출된 결과였다.

"이게 뭘 뜻하는지 알지, 한서윤?"

예린이 한 걸음 다가서며 종이를 흔들었다. 종이가 파스스 소리를 내며 흔들릴 때마다 서윤의 가슴은 납덩이를 얹은 듯 무거워졌다.

"대표이사의 지분 전량 회수, 그리고 너의 즉각적인 해고. 감정 제한 페널티는 상호 합의 하에 작성된 엄연한 법적 효력이야. 너희 둘은 끝났어."

태준이 서윤의 어깨너머로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서윤의 쇄골 위로 떨어졌다. 3년 전의 트라우마가, 가문이라는 거대한 괴물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버려지던 날의 기억이 서윤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죄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주저앉아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대외협력팀과 본사 보안실의 발걸음 소리가 저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둔탁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 실장님."

서윤은 태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즈니스 마스크를 쓸 때의 차갑고 정돈된 어조였다.

"이사회 승인도 나지 않은 문서를 들고 남의 집무실 비밀 구역까지 무단 침입한 건 실무적으로 명백한 사유지 침입이자 보안 규정 위반입니다. 지금 당장 비키지 않으면, 내일 아침 기획실장 권한으로 당신의 출입 권한부터 정지시킬 겁니다."

"하! 제법 당당하네? 곧 쫓겨날 주제에."

예린이 조소하며 가로막았지만, 서윤은 망설임 없이 태준을 부축한 채 거울 벽의 슬라이딩 도어를 몸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밀폐된 스위트룸의 묵직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서윤은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잠금장치를 강제로 체결했다. 수동 잠금 레버가 철컥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순간, 벽 너머에서 예린이 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강태준! 한서윤! 문 열어! 감사팀이 이미 엘리베이터를 탔어! 너희 둘 다 여기서 끝장이라고!"

방 안은 어두웠다. 오직 천장의 간접 조명만이 미세하게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서윤은 태준을 가죽 소파 위로 눕혔다. 그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에는 굵은 핏대가 서 있었다. 차예린이 건넨 서류에 묻어 있던 피부 흡수성 약물이 그의 신경계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고 있었다.

"태준 씨…… 정신 차려 봐요. 내 말 들려요?"

서윤이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손목의 디바이스는 여전히 100%의 위험 수치를 가리키며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 장치가 계속해서 심박수를 전송하는 한, 외부의 감사팀 서버에는 두 사람의 감정적 동요가 실시간 그래프로 그려지고 있을 터였다.

"서윤…… 아……."

태준이 간신히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집착에 가까운 열망만큼은 선명했다. 그는 아픈 와중에도 서윤의 손을 꼭 쥐려 했다.

"도망…… 쳐. 지훈이한테 연락해 뒀으니까…… 넌 여기서 빠져나가."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요!"

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늘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녀의 방어기제가 그의 무모한 헌신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계약서 특약 제9조…… 왜 혼자 다 뒤집어쓰게 고쳐 놓은 건데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왜 매번 나만 두고 혼자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건데!"

태준은 젖어 드는 그녀의 눈가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피가 섞인 마른 침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였다.

"내가 말했잖아. 네가 다치는 것보다…… 내가 무너지는 게 훨씬 버티기 쉬우니까."

그의 피학적인 구원자로서의 고백이 서윤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3년 전, 그가 자신을 떠났던 진짜 이유가 비로소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방식을 택해 왔던 것이다.

그때, 방 외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두 굽 소리가 떼를 지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강그룹 보안감사 1팀입니다. 대표이사의 긴급 신변 이상 및 불법적인 개인 정보 유출 정황이 포착되어 현장 검문을 실시하겠습니다. 내부 인원은 즉시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한민우의 사주를 받은 사내 보안 감사팀이 마침내 비밀실 벽 앞까지 진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예의나 절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태준의 몰락만을 바라는 적대 세력들의 탐욕스러운 의도가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반복합니다. 문을 열지 않으실 경우, 사내 보안 규정 제14조에 의거하여 강제 해정을 진행하겠습니다."

서윤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손목의 디바이스가 다시금 요란한 진동을 울렸다. 감사팀의 등 뒤에는 태강 내부의 보수 원로들의 지분을 위임받은 대리인들과 적대 세력들이 압수수색 서류를 지참한 채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만약 이 문이 열리고 태준의 상태가 노출된다면, 약물 투여로 인한 건강 이상설과 함께 계약 위반 스캔들이 터져 나가며 두 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위기였다.

서윤은 소파 옆 구급함으로 손을 뻗었다. 태준의 개인 주치의가 비상용으로 구비해 둔 신경 안정 및 해독제 앰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사기를 들어 앰플의 액체를 빨아올렸다.

"태준 씨, 조금만 참아요. 이거 맞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는 태준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정맥을 찾아 주사늘을 찔러 넣었다. 차가운 약물이 그의 혈관을 타고 들어가자, 태준이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서윤아……."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서윤은 눈물을 떨구었다.

바깥에서는 강제 해정을 위해 장비를 작동하는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이잉 하는 고주파 소음이 철문을 타고 안쪽까지 진동으로 전해졌다. 철문 너머로 밀려오는 거대한 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문 앞을 가로막아 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이 사람을 빼앗기지 않아. 이번만큼은 내가 지킬 거야.'

그녀의 눈빛에 서늘한 투지가 서렸다. 언제나 가문의 정략결혼 카드로 끌려다니며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었던 방어막이, 태준을 지키겠다는 강렬한 의지 아래에서 완전히 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문 외부에서 서윤의 예상보다 훨씬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비키세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비서실장 김지훈입니다. 현재 대표이사님께서는 이사회 의결에 따른 긴급 대외비 안건을 검토 중이십니다. 공식적인 정기 감사가 아닌 정체불명의 임시 검문단이 대표이사직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는 명백한 사내 규정 위반입니다!"

김지훈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깍듯하던 그의 음성에 전에 없던 서슬 퍼런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김 실장, 우리는 이사회 원로 위원회의 정식 위임장을 받아 왔소! 비켜서란 말이오!"

감사팀장의 앙칼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원로 위원회의 위임장이라 하셨습니까?"

지훈의 비웃음 섞인 음성이 벽을 넘어 흘러왔다.

"그 위임장, 날짜가 오늘 오후 6시부로 효력이 정지된 구 버전이더군요. 여기 법무팀과 인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발급한 '감사 절차 일시 정지 및 긴급 소명 요구서'가 있습니다. 한민우 상무 측의 일방적인 지시로 움직인 정황이 확인될 경우, 감사팀 전원에 대한 직무 정지 처분이 내려질 것임을 경고합니다. 서류 확인하시겠습니까?"

합법적인 인사 서류와 절차를 내세워 감사팀의 기세를 단숨에 제압하는 지훈의 반격이었다. 바깥의 소란이 일순간 멈칫하며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지훈이 사전에 준비해 둔 법적 방어막이 제대로 작동한 순간이었다. 덕분에 일촉즉발의 강제 해정 위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갔고, 비밀실 내부의 두 사람에게는 숨을 고를 수 있는 아주 짧은 퇴로가 확보되었다.

소파 위에서 태준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약효가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서윤은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차가운 가면 뒤에 숨겨두었던, 3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지우지 못했던 진심이 둑이 터지듯 밀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이 태준의 뜨거운 이마 위에 가만히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었다. 상처받을까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는, 가장 깊고도 진실한 기도였다.

"나 도망 안 가요. 그러니까 당신도 버텨요."

서윤의 속삭임이 그의 이마에 닿는 순간, 신기하게도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스마트 워치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수치는 여전히 높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안도감은 찰나에 불과했다.

철컥.

비밀실 문밖에서, 지훈의 엄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다시금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지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민우 상무님, 여기는 출입 통제 구역입니다!"

"통제 구역? 내 동생이 여기 갇혀 있는데 오빠가 못 들어올 이유가 있나?"

한민우의 비열한 목소리가 문 바로 너머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자의 오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지이익, 치이익.

그 뒤를 이어, 아주 불쾌한 소음이 스위트룸의 스피커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윤의 차량에 설치되어 있던 감청 장치에서 흘러나온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강 대표, 이 계약은 철저히 비즈니스일 뿐이에요. 서로의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알아. 선을 넘지 않는 것, 그게 우리 계약의 제1조건이니까.]

과거 두 사람이 차 안에서 나누었던 비밀스러운 대화가, 한민우가 든 검은색 단말기를 통해 아주 큰 소리로 재생되고 있었다. 문밖의 감사팀원들과 차예린, 그리고 수많은 직원의 귀에 그들의 '가짜 연애 계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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