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경제를 뒤흔들 천재가 아카데미에 숨어 있었다니!"
제국 재무부에서 파견된 수석 감사관, 바르샤 백작의 벼락같은 외침이 대회의장 높은 천장을 때렸다.
그 서슬 퍼런 음성이 귓전을 때리는 순간,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담긴 머그잔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내 작고 소중한 은퇴 계획이 담긴, 이른바 '아르비스 영지 자급자족 설계안'의 사본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나는 그저 내 척박한 고향 땅으로 내려가 평화롭게 감자나 심고, 가끔 마당에 누워 낮잠이나 자며 남은 수명을 조용히 누릴 생각이었다. 고대 연산 장치 '아덴의 서'를 돌릴 때마다 내 수명이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스르륵 깎여 나가니,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아끼고 성광석을 긁어모아 연명해야 하는 시한부의 몸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은퇴 후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짠 초가성비 예산안이, 왜 제국의 재정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무시무시한 경제 혁명서로 둔갑해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회의장 단상 위, 수백 명의 고위 의원들과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방청석 한구석에 앉아 있는 아델린의 눈빛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제국의 거대한 모순에 홀로 맞서는 고결한 혁명가를 바라보듯,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감격에 찬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르비스 영식."
바르샤 백작이 돋보기를 고쳐 쓰며 서류를 날카롭게 펄럭였다.
"이 설계안의 4조 2항을 보라. 아카데미 내부의 마도 약초 소모량을 전년 대비 80% 감축하고, 대신 남부 변경지의 야생 군락지에서 직접 채취하여 연금술 학회에 직납하겠다고 되어 있군. 게다가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간 마진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특수 면세 조항까지 삽입해 두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본인의 입으로 설명해 보겠나?"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냥 아카데미 매점에서 파는 약초가 터무니없이 비싸서, 고향 집 뒷산에 널려 있는 개똥쑥 같은 약초를 직접 뜯어다 쓰면 한 달 용돈을 정확히 40메르겔이나 아낄 수 있다는 뜻인데. 그걸 솔직하게 말하면 이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이 나를 무슨 구두쇠 보듯 할 게 뻔했다. 의사소통의 가성비가 극도로 떨어지는 대화는 사절이다.
나는 최대한 귀찮음을 숨기며,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적인 자원 순환을 꾀했을 뿐입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을 꾀했다……!"
내 짤막한 대답에 바르샤 백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는 서류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주위의 의원들을 돌아보았다.
"듣지 않았나! 이 청년은 제국 상단 연합이 독점하고 있는 약초 유통망의 폭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황실 마법탑과 결탁하여 중간에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던 대귀족들의 썩은 빨대를 단숨에 뽑아 버리겠다는 소리야!"
"그, 그뿐만이 아닙니다!"
옆에 있던 아카데미 마도 재정 위원장이 침을 튀기며 거들었다.
"여기 12조를 보십시오! 마법 방어막 유지 보수 비용을 고대 영식 영구 전개법으로 대체하겠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건 황실 마법탑이 매년 받아 챙기던 수백억 골드 규모의 '마도 특허료'를 원천 무효화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제국의 기득권 금융이 어떻게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는지, 그 구조적 허점을 완벽하게 난도질해 놓았습니다!"
청문회장 내부가 벌집을 쑤신 것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방어막 유지 보수 비용은 그냥 마법진 그릴 때 분필을 너무 낭비하길래, 아덴의 서를 아주 잠깐 돌려서 '여기에 선 하나만 덜 그어도 방어막이 안 터진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해 둔 것뿐인데. 그렇게 하면 분필 값과 마나 소모량이 줄어드니까 내 지갑 사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을 뿐인데.
그때,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덴의 서'가 내 무의식적인 연산에 반응하여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가 울컥 솟구쳤다.
"윽……."
나는 입가를 급히 손수건으로 가렸다. 하얀 천 위로 붉은 선혈이 툭, 투둑 떨어지며 빠르게 번져 나갔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의원들의 눈빛이 경악과 깊은 경외심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제국의 거대한 기득권 세력과 마법탑의 압박 속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마력 폭주로 인한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고결한 천재 마법사로 보였을 터였다. 피를 토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상 위에 꼿꼿이 서 있는 내 모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루안 님……!"
방청석의 아델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 사람은 알고 있는 거야. 이 개혁안을 내놓는 순간 자신이 마법탑과 제국 상단의 공공의 적이 될 것임을. 그런데도 자신의 수명을 깎아 가며 제국의 미래를 위해 독배를 마시고 있어……!'
내가 단지 숨이 가빠서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바르샤 백작이 엄숙한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급진적이고 초법적인 발상이긴 하나…… 이 설계안이 실현된다면 제국의 재정 자립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기득권의 착취적 금융을 부수고 진정한 마도 혁신을 이룩하려는 이 고결한 의지를, 우리 의회가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탁! 탁! 탁!
백작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아르비스 영식의 예산 설계안을 아카데미 공식 시범 사업으로 채택한다! 기득권 세력의 방해가 있을지언정, 우리 재무 위원회는 이 위대한 도전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순간 대회의장을 가득 채운 의원들과 교수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니, 나는 그냥 은퇴 자금을 아끼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일이 이렇게 커지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
청문회가 간신히 끝나고, 나는 터덜터덜 걸어 나와 대회의장 로비의 한적한 구석에 몸을 기댔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던 내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각이 닿았다. 꺼내 보니 지난번 아카데미 구석의 고물상에서 단돈 3실버를 주고 구매했던, 녹슬고 낡은 청동 열쇠였다.
"이게 정말 쓸모가 있으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마음속으로 '아덴의 서'를 활성화했다. 머릿속에서 푸른빛의 기하학적 수식들이 어지럽게 회전하며 낡은 청동 열쇠의 구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연산 강도 1단계 가동.] [대상: 고대 청동 열쇠의 마력 파장 추적.] [분석 완료: 해당 물체는 단순한 고물이 아닌, 고대 아덴 문명이 구축한 '비밀 성광석 광맥'의 제어 장치로 판명됨.] [경고: 현재 이 열쇠를 사용할 경우, 아카데미 지하 깊은 곳에 봉인된 마스터 락(Master Lock)을 해제하고 광맥의 흐름을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두근, 하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진짜였잖아?"
그저 가성비 좋은 골동품인 줄 알고 샀던 열쇠가, 내 수명을 무한정 늘려줄 수 있는 고순도 성광석 광맥의 '마스터키'였다니. 이 열쇠만 있으면 남들의 눈을 피해 지하 동굴에서 성광석을 마음껏 추출해 체내에 흡수할 수 있다. 수명 부족으로 골골대던 시한부 인생에 그야말로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순간이었다.
그때, 로비의 기둥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살그머니 다가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그는 주위를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살피더니, 내 곁을 지나치며 내 코트 주머니 속에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를 슥 밀어 넣었다.
"아르비스 님, 약속하신 물건입니다."
낮고 은밀한 목소리. 아카데미 암시장에서 활동하는 정보 브로커였다. 지난번 내 은퇴 자금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카데미 내부의 비공식적인 자금 흐름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던 결과물이었다.
사내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머니를 슬쩍 열어보니, 그 안에는 촘촘하게 암호화된 두꺼운 장부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대충 훑어보려 했지만, 온통 기괴한 숫자와 가짜 이름들로 가득해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일단 장부를 품속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아덴의 서로 해독해 볼 생각이었다. (이 장부가 율리우스가 가문의 이름으로 관리하는 거대한 유령 유통망의 통제권이자, 그의 경제적 목줄을 완전히 끊어버릴 치명적인 무기라는 사실을 이때의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루안 폰 아르비스!"
갑자기 로비의 대리석 바닥을 거칠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율리우스 카이저가 무서운 기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그의 파벌에 속한 추종자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늘어서 있었다.
"너…… 아주 제정신이 아니더군."
율리우스가 내 앞까지 다가와 이빨을 부득 갈았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힘줄이 돋아나 있었고, 눈동자는 분노와 알 수 없는 공포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쇼를 벌여? 기득권의 착취를 부수겠다고? 마도 특허료를 무효화하겠다고? 웃기지 마라! 네놈이 노리는 진짜 목적이 뭔지 모를 줄 알고!"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목적이요?"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군!"
율리우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내 귓가에 대고 낮게 르릉거렸다.
"네놈의 그 잘난 '자급자족 설계안'이 통과되면, 우리 카이저 가문이 독점하고 있던 아카데미 마도 시약 유통망의 숨통이 끊어진다. 겉으로는 고결한 척, 제국의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우리 가문의 자금줄을 완벽하게 고사시키려는 수작이잖아!"
"……."
"아르비스 영지가 제국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경제 구역을 구축하려는 반역의 첫 단계가 바로 아카데미의 재정 장악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이쯤 되면 이 녀석의 상상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나는 그저 내 연금으로 살 영지에 세금을 덜 내고 싶었을 뿐이고, 시약 값을 아껴서 성광석 살 돈을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대가리를 굴려야 이게 제국을 전복하려는 경제 쿠데타로 해석되는 걸까.
해명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이 녀석에게 내 시한부 신망이나 은퇴 계획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무심한 태도가 율리우스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더니,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어디서 건방지게 등을 돌려! 네놈이 아무리 대단한 머리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마법사는 실력으로 증명하는 법이다. 네놈의 그 사악한 음모를 이 자리에서 완전히 박살 내 주지."
율리우스가 품 안에서 붉은색 마법 인장이 찍힌 도전장을 꺼내 내 가슴팍에 툭 던졌다.
"다가오는 '아카데미 수석 장학생 선발전'. 그 공개 연무장에서 나와 일대일 마도 실전 결투를 신청한다. 네놈의 가짜 천재성이 대중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짓밟힐 때, 네가 기획한 그 건방진 예산안도 쓰레기통으로 처박히게 될 것이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숨을 들이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도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결투라니, 정말이지 내 은퇴 계획에 단 1실버의 도움도 안 되는 비생산적인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 도전을 거절한다면 율리우스와 그의 가문은 사사건건 내 가성비 예산안을 물고 늘어지며 귀찮게 굴 터였다.
내 안락하고 평화로운 은퇴를 위해서라도, 이 귀찮은 파리새끼는 확실하게 털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좋습니다."
나는 도전장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도전에 응하죠."
***
사흘 뒤.
아카데미 중앙 연무장은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카데미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시한부 천재 루안 폰 아르비스와, 기득권 세력의 자존심이자 숫자의 지배자 율리우스 카이저의 마도 결투. 제국의 재정 구도를 뒤흔들 두 천재의 격돌이라는 소문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과 제국 재무부 관료들까지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루안 님! 꼭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무리해서 마력을 쓰시면 또 피를……!"
대기실 입구에서 아델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습니다, 아델린. 오랜 시간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나는 대충 대답하며 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넓게 펼쳐진 대리석 무대 위에 서자, 차가운 아침 바람이 뺨을 스쳤다.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함성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귀찮다. 빨리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 따뜻한 홍차나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맞은편.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율리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장을 본 관중석에서 크나큰 동요가 일어났다. 평소의 가벼운 마법 지팡이 대신, 그의 양손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기괴한 마력 파장을 뿜어내는 장치가 들려 있었다.
온갖 고대 룬 문자가 촘촘하게 새겨진 거대한 청동빛 실린더. 그 중심부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최상급 성광석 수십 개가 기기묘묘한 배열로 박혀 빛나고 있었다.
"저, 저건……!"
관중석에 앉아 있던 카산드라 교수가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카이저 가문의 비기, 고대 마도 증폭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잖아! 시전자의 마력을 수십 배로 증폭시켜 규격 외의 파괴력을 내는 전설적인 아티팩트가 왜 저기에!"
율리우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루안 폰 아르비스! 네놈의 그 고고한 척하는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봐 주마!"
엄청난 마력의 폭풍이 율리우스의 신형 마도 장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연무장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대리석 바닥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 속에서, 내 머릿속의 '아덴의 서'가 사정없이 경고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