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독기를 머금은 비수가 어둠을 가르는 궤적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커튼 뒤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뺨을 스치기도 전에, 내 머릿속의 연산 장치 ‘아덴의 서’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경고: 고밀도 신경독 감지. 회피 경로 계산 중...] [경고: 연산 시 구동 수명 12시간 소모.]
‘하루 수명도 아까워 죽겠는데 무슨 12시간이야!’
나는 억울함에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피하려는 생각보다 수명이 깎인다는 사실에 치밀어 오른 깊은 빡침이 전신을 지배한 탓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이었지만, 내 몸은 단 1인치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찰나의 침묵을 깨트린 것은 등 뒤의 그림자였다.
콰아아앙!
방 안의 모든 가구들이 들썩일 정도의 묵직한 파열음이 일었다. 내 목덜미를 꿰뚫으려던 비수가 단 3센티미터를 남겨두고 허공에 멈췄다. 은백색의 마력이 깃든 단단한 손아귀가 암살자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움켜쥐고 있었다.
"루안 님의 처소에 감히 발을 들이는 더러운 사냥개 녀석."
차가우면서도 맑은 목소리. 내 전속 호위이자 과대망상의 선두 주자인 아델린 폰 엘베스였다. 그녀는 언제 방에 들어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창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모를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에 암살자의 목덜미를 가볍게 낚아채 바닥에 메쳐버렸다.
쿠웅! 하는 굉음과 함께 암살자의 신형이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척 가장해야 했다. 약점을 잡히면 은퇴 자금이고 뭐고 제국의 하이에나들에게 뼈까지 발려 먹힐 테니까.
나는 침대 옆 탁상에 놓인 마도 온수기를 켰다. 달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찻잔에 뜨거운 물이 담겼다. 은은한 캐모마일 향이 피비린내 나는 방 안에 퍼져 나갔다.
"차라도 한잔하겠나?"
나는 바닥에 짓눌려 신음하는 암살자를 내려다보며 건조하게 물었다. 내 목소리는 물 한 모금 머금은 것처럼 차분했다. 실제로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앉을 의자를 찾는 중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이것이 사선을 넘나드는 절대자의 여유로 보였을 터였다.
"끄, 윽……!"
암살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을 앞에 두고도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찻잔을 데우는 괴물이었다. 심지어 아델린이 그의 단검을 빼앗아 부러뜨리는 순간에도 내 손끝은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루안 님, 이 자의 품에서 엘리드 남작의 인장이 찍힌 지령서를 확보했습니다. 역시 남작의 사냥개였습니다."
아델린이 무릎을 꿇으며 피 묻은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나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엘리드 남작이라니. 제국 재무부의 실세이자 영지 세금 면제를 노리는 내 계획을 '지정학적 반역'으로 오해하고 있는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가가 결국 암살자까지 보낸 것이다.
‘조용히 은퇴해서 텃밭이나 가꾸겠다는데, 왜 다들 나를 가만히 안 두는 거야?’
속은 타들어 갔지만 겉으로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남작이 성격이 급하군. 겨우 이 정도 수작으로 아르비스의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그 한마디에 바닥에 처박힌 암살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르비스……! 네놈, 설마 이미 제국 은행의…… 국고 유통망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거냐? 우리 남작 동맹의 자금줄을 끊으려는 그 계획이 진짜였단 말인가!"
암살자는 광기에 젖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속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아는 제국 은행의 국고 유통망이라고는 아카데미 매점에서 성광석 할인 혜택을 주는 카드 마법 식별자가 전부였다. 대체 이 녀석들은 나를 무슨 세계적인 금융 테러리스트로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해명하는 것은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 해명하려 들면 들수록 이 과대망상증 환자들은 '역시 고도의 연막작전이군!'이라며 더 정교한 오해를 쌓아 올릴 테니까.
"알면 조용히 꺼져라. 네 주인에게 전해. 내 인내심도 그리 길지 않다고."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루안 님의 자비에 감사해라, 벌레 같은 놈."
아델린이 암살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창문 밖으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원의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이 무시무시한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방어막과 막대한 성광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 * *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나는 책상 위에 낡은 청동 열쇠 하나를 올려놓았다.
지난번 아카데미 구석의 고물상에서 단돈 20코퍼를 주고 구매한, 먼지 쌓인 고물이었다. 당시에는 그냥 영지 창고 열쇠로 쓰려고 대충 산 물건이었는데, 내 머릿속의 '아덴의 서'가 밤새도록 이 열쇠의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마법 기호를 분석해 냈다.
[분석 완료: 고대 아덴 문명의 비밀 광맥 차단 장치.] [기능: 아카데미 서쪽 폐허 지하 동굴에 매장된 성광석 광맥의 마력 흐름을 제어 및 봉인할 수 있음.] [가치 판정: 측정 불가 (제국 표준 통화 기준 수천만 골드 상당의 자원 독점 가능).]
"……미친."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물상 영감탱이가 그냥 굴러다니는 고철인 줄 알고 팔아치운 게, 사실은 아카데미 지하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성광석 광맥의 마스터키였다니.
이 열쇠만 있으면 아카데미 지하의 숨겨진 광맥에서 성광석을 원하는 만큼 안전하게 빨아먹을 수 있다. 즉, 수명 단축 걱정 없이 '아덴의 서'를 마음껏 돌리며 은퇴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광맥이 위치한 구역이 아카데미의 '학생 자치 예산 연성 위원회'가 관리하는 특별 통제 구역이라는 점이었다.
"거길 합법적으로 드나들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직접 그 위원회에 기어 들어가는 것.
마침 이번 학기 예산 연성 위원회에 공석이 하나 생겼다는 공고를 보았다. 율리우스가 이끄는 동부 파벌 녀석들이 아카데미의 마도 예산을 독점하기 위해 자기네 사람을 꽂아 넣으려고 안달이 나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내가 들어가야겠어. 가서 예산도 좀 깎고, 내 영지 설계안도 합법적으로 밀어 넣고, 성광석도 챙겨야지."
나는 곧장 깃펜을 들어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작성한 것은 '소박한 영지식 가성비 지출 설계안'이었다. 내 고향 아르비스 영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쓰던 극도의 짠돌이식 예산 편성법을 아카데미의 방만한 동아리 및 학생 자치 자금에 그대로 이식한 기획서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 마도학과의 불필요한 고급 시약 소모를 줄이고, 대신 인근 계곡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직접 채집하여 가공할 것 (예산 80% 절감). - 학생 의회의 불필요한 연회 비용을 전면 삭감하고, 감자 수프와 호밀빵으로 대체할 것 (정서적 안정 및 가성비 극대화). - 자치 구역 내의 마법 방어막 유지 비용을 고대 영식을 활용해 10분의 1로 재조정할 것.
내 관점에서는 그저 한 푼이라도 아껴서 내 은퇴 자금으로 돌리기 위한 지극히 상식적이고 소박한 절약 기획안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 아주 친환경적이고 가성비 넘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지원서를 품에 넣었다.
* * *
오후, 아카데미 중앙 본관의 원형 회의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회의실 테이블 상석에는 학생 의회장인 율리우스 카이저가 오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동부 파벌의 핵심 간부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루안 폰 아르비스가 예산 위원회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율리우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 건방진 아웃사이더 녀석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마법 실력 조금 믿고 까불더니, 이제는 아카데미의 재정권까지 손을 대시겠다?"
"율리우스 님, 그의 지원서와 함께 동봉된 예산 설계안입니다. 가관도 아닙니다. 무슨 시장바닥의 장부도 아니고, 지출을 전부 깎아버리겠다는 내용뿐입니다."
하급 의원이 콧방귀를 뀌며 서류를 건넸다.
율리우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붉은 인장이 찍힌 서류를 펼쳤다. 하지만 서류의 첫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그의 입가에 머물던 비웃음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게 뭐지?"
율리우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아버지는 제국 재무부의 고위 관료였고, 율리우스 본인 역시 숫자의 흐름을 읽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루안이 제출한 '소박한 가성비 설계안'의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의미(로 착각한 무시무시한 독소 조항)를 단번에 간파해 냈다.
"마도학과의 시약 소모를 줄이고 자급자족을 하겠다고……? 이건 제국 상단이 독점하고 있는 약초 유통망의 마진을 완전히 무력화하겠다는 선언이잖아!"
"예, 예? 그게 무슨……."
"이 바보 같은 녀석들아! 아직도 모르겠어? 마법 방어막 유지 비용을 고대 영식으로 개편한다는 건, 황실 마법탑이 받아 챙기던 유지 보수 특허료를 단숨에 공중분해 시키겠다는 뜻이다! 제국 세무의 근간을 뒤흔드는 초법적인 발상이라고!"
회의실 안의 모든 의원들이 숨을 들이켰다.
율리우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루안이 제출한 이 소박해 보이는 서류는, 기실 제국의 모순적인 조세 제도와 귀족 가문들의 불법 리베이트 구조를 정확하게 조준하여 도려내려는 정밀한 '경제적 단두대'였다.
"이 자식…… 단순히 아카데미의 예산을 아끼려는 게 아니야.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제국 전체의 재정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경제 질서를 세우려는 혁명 시나리오다!"
"그, 그렇게 깊은 뜻이……!"
"이걸 그대로 실행했다가는 우리 카이저 가문이 관리하는 유령 유통망까지 전부 노출돼! 아르비스……! 네놈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냐!"
율리우스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시각, 기숙사 방에서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이번 달 생활비는 얼마나 아낄 수 있으려나" 하고 가계부를 끄적이던 나는, 내 설계안이 제국 은행을 위협할 국가급 반역 문서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평온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학생 의회의 긴급 호출을 받은 아카데미 고위 의장단과 제국 재무부 파견관들이 일제히 회의실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루안이 제출한 '가성비 설계안' 복사본이 들려 있었다.
"이 설계안을 작성한 자를 당장 불러와라! 제국의 경제를 뒤흔들 천재가 아카데미에 숨어 있었다니!"
제국 재무부 파견관의 격앙된 외침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