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선택해라, 루안. 이 광맥의 지분 90%를 카이저 가문에 넘기고 내 밑으로 들어올 것인가, 아니면 내일 아침 네 고향 영지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공중분해 되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줄리우스 카이저의 목소리가 축축한 지하 동굴의 벽을 타고 비열하게 흘러내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유령 유통망 장부는 마치 내 목을 죄어오는 밧줄처럼 보였다. 아카데미의 기득권을 쥐고 흔드는 카이저 가문의 후계자다운, 아주 오만하고도 확실한 협박이었다.

‘아니, 이 미친놈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기가 막혀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고작 1학년짜리 신입생이고, 내 고향 아르비스 영지가 제국 변방의 찢어지게 가난한 땅이라서 만만해 보이는 모양인데,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90%? 강도도 이것보다는 양심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 고생을 해가며 성광석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오직 깎여 나가는 수명을 채우고,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하게 은퇴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노후 자금의 대부분을 날강도처럼 뜯어가겠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망막 너머로 붉은색 반투명 창이 떠오르며 숨 가쁜 연산을 시작했다.

[시스템: '아덴의 서'가 기동합니다.] [연산 대상: 제국 세법 및 황립 아카데미 자치 규약.] [소모 수명: 12시간 (현재 잔여 수명: 15일 4시간)]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붉은 액체가 울컥 솟구치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삼켜냈다. 이깟 녀석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여봤자 약점만 잡힐 뿐이다. 나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입가를 훔치며, 오히려 차갑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리우스 카이저. 네 그 얄팍한 머리통에서 나온 계산서가 참으로 가관이군."

"뭐라구?"

줄리우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승리감에 젖어 있던 눈동자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아덴의 서가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제국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조세 법률 패킷들을 머릿속으로 조율했다. 제국 재무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방치해 둔, 오직 황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초법적 예외 조항들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카데미 설립 초기의 자원 우선 처분권이라. 그래, 카이저 가문이 학생 의회를 장악하고 있으니 법적으로 그렇게 우길 수도 있겠지."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내 푸른 눈동자가 아덴의 서의 마력 반응으로 인해 기이하게 빛났다.

"하지만 너는 가장 중요한 전제를 빼놓았어. 제국 헌법 제3조 14항, '황실 직할 영토 및 그에 준하는 특수 교육 기관 내의 고대 유적 발굴 자원은 황제 직속 특별 개발령의 통제를 받는다'는 구절을 잊은 모양이군."

줄리우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가셔가기 시작했다.

"그, 그 보잘것없는 조항이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지하 동굴은 엄연히 아카데미의 영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대화의 가성비를 따지자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핵심만 찔러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면 그만이다.

"황실 직할 개발 특별 조항이 발동되는 순간, 아카데미 학생 의회의 처분권은 완전히 정지된다. 그리고 이 구역은 제국 재무부가 아닌, 황제 폐하의 직속 대리인만이 관리할 수 있는 '비공개 직할령'으로 승격되지. 카이저 가문이 아무리 대단한들, 황실의 권위를 정면으로 들이받을 배짱이 있나?"

줄리우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내가 던진 정보가 무서운 속도로 재조립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내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카데미의 세금 문제를 건드리고, 변경의 아르비스 영지를 자급자족 체제로 돌리려 한 모든 행동이 실은 황실의 묵인 아래 진행되는 '극비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너…… 설마 처음부터 황실의 밀명을 받고 움직인 것인가? 아카데미의 재정을 감사하고, 우리 기득권 가문들의 성광석 독점권을 빼앗기 위해……!"

줄리우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오만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마주한 자의 공포가 그의 얼굴을 지배했다.

‘아니, 황실 밀명은 또 무슨 개소리야…….’

황제 얼굴은 구경도 못한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굳이 이 유용한 착각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해명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이자 체력 낭비다. 나는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 침묵이 줄리우스에게는 가장 확실한 긍정으로 다가갔으리라.

"그럴 리가…… 아르비스 같은 변방의 몰락 귀족이 어떻게 황실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줄리우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물건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입학식 날 아카데미 구석의 먼지 쌓인 고물상에서 단돈 3실버를 주고 구매했던, 다 찌그러지고 녹슨 청동 열쇠였다.

당시에는 그저 가성비 좋은 골동품 장식품인 줄 알고 샀던 물건이다. 하지만 이 지하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내 안의 아덴의 서가 미친 듯이 공명하며 이 열쇠의 진짜 정체를 알려주었다.

이 낡은 청동 열쇠는 고대 아덴 문명이 자신들의 비밀 광맥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제작한 '마스터 제어 장치'였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내가 열쇠를 들어 올리자, 줄리우스의 시선이 그 녹슨 금속 조각에 닿았다. 그는 처음에는 콧방귀를 뀌려 했으나, 이내 열쇠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고대 마법 영식이 푸른빛을 발하며 고동치기 시작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그것은…… 고대 문명의 유물인가?"

나는 대답 대신, 지하 동굴 중앙에 솟아 있는 거대한 석판의 홈으로 걸어갔다. 석판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정중앙에 정확히 이 청동 열쇠가 들어갈 만한 틈새가 존재했다.

철컥.

열쇠가 홈에 완벽하게 맞물려 들어갔다. 그 순간, 동굴 전체가 거대한 거인의 심장처럼 크게 요동쳤다.

쿵! 쿵!

"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줄리우스가 비틀거리며 동굴 벽을 짚었다.

석판을 중심으로 푸른색의 마력 파동이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사방의 암벽에 박혀 있던 성광석 광맥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더니, 이내 거대한 마력 장벽이 광맥 전면을 감싸 안으며 외부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하기 시작했다. 아덴의 서가 연산한 고대 차단 마법이 활성화된 것이다.

이제 이 청동 열쇠를 가진 나 외에는, 제국의 그 어떤 대마법사가 와도 이 광맥에서 성광석 한 조각조차 캐낼 수 없게 되었다. 소유권의 완벽한 물리적 독점이었다.

"이걸로 법적인 절차니, 가문의 권한이니 하는 귀찮은 소음은 전부 정리된 것 같군."

나는 석판에서 열쇠를 돌려 뽑아내며 줄리우스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돌아가라, 줄리우스. 그리고 네 가문에 전해라. 아르비스의 예산안에 손을 대는 순간, 카이저 가문이 아카데미에서 누려온 모든 재정적 특권이 황실의 이름 아래 공중분해 될 것이라고."

줄리우스는 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나를 응시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끝을 적셨다. 그는 내 뒤에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 '황실의 거대한 그림자'와, 방금 눈앞에서 펼쳐진 고대 마법의 기적에 완벽하게 압도당한 상태였다.

"루안 폰 아르비스…… 네놈의 무서움을 내가 너무 얕보았군."

그는 패배를 인정하듯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더니, 이내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의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멀어져 갈 때까지, 나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후우."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석판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입안에서 맴돌던 비릿한 피 맛이 그제야 혀끝을 자극했다.

"살았네, 진짜."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뼈마디가 아려왔다. 하지만 고통 뒤에는 언제나 달콤한 보상이 따르는 법이다.

나는 차단 장치가 작동하기 직전, 석판 주변에서 굴러떨어진 고순도 성광석 원석 10개를 바닥에서 주워 올렸다. 손바닥에 닿는 묵직하고 영롱한 결정체들. 제국 표준 통화로 환산하면 내 고향 영지의 3년 치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가치였다.

[시스템: 고순도 성광석 10개를 감지했습니다. 생명력 흡수를 시작합니다.] [수명 충전 완료: 잔여 수명 15일 -> 185일]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온몸에 활기찬 마나가 차올랐다. 수명이 단숨에 반년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숨 가쁘게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은퇴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다.

"이거면 아르비스 영지에 자급자족용 온실을 짓고, 평생 먹고살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겠어."

나는 성광석들을 품에 소중히 챙겨 넣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무슨 제국을 뒤엎을 혁명을 준비하는 줄 알지만, 내 목표는 언제나 소박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가성비 좋은 은퇴 생활을 즐기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동굴을 빠져나오니 어느덧 붉은 노을이 아카데미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배꼽시계가 사정없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곧장 아카데미 서부 구역의 한적한 뒷골목으로 향했다. 귀족 자제들이 드나드는 화려한 레스토랑 대신, 내가 선택한 곳은 가난한 하급 장학생들이 자주 찾는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이모, 여기 감자 수프 한 대접이랑 딱딱한 호밀빵 두 조각 주세요. 아, 따뜻한 우유도 한 잔만요."

"어머, 도련님. 귀하게 생기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엘 다 오시고. 빵은 서비스로 한 조각 더 줄게!"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건넨 가성비 최고의 저녁 식사를 마주하자,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단돈 5코퍼로 해결하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겉으로는 고고한 천재 마법사로 불리지만, 역시 내 본질은 이 소박하고 아늑한 일상에 있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줄리우스의 기세를 꺾어놓았으니 당분간 학생 의회 녀석들이 나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성광석 수급처까지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학기 동안 최대한 아웃사이더처럼 조용히 지내다가 졸업과 동시에 영지로 튀기만 하면 된다.

완벽한 은퇴 시나리오였다.

식사를 마치고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밤공기는 선선했고, 아카데미의 가로등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길을 비추었다. 내 개인 기숙사 방은 아카데미 구석진 곳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들과 푹신한 침대가 있는 나만의 안식처.

계단을 올라 내 방 문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롭고 고요한 나의 방.

스륵.

문을 닫고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내 척추를 타고 소름 끼치는 한기가 단숨에 치밀어 올랐다.

방 안의 공기가 이상했다. 미세하게 풍겨오는, 쇠 비린내와도 같은 이질적인 냄새. 그리고 커튼 뒤편,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둠의 실루엣.

‘살의(殺意).’

내 뇌가 위험 신호를 인지하기도 전에,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파앗!

어두운 방 안, 커튼 뒤편에서 검은 형체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예리한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제국의 은밀한 암살 부대, 특히 엘리드 남작의 사냥개들이 즐겨 쓰는 특제 암살용 무기였다.

비수가 내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궤적으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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