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안 폰 아르비스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여! 이곳으로 모여라!"
아델린의 우렁찬 사자후가 아카데미 중앙 광장의 상공을 찢어발겼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그녀가 태양빛을 반사하는 검을 높이 치켜들자, 광장에 모여 있던 신입생들의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이 들어찼다.
"제국의 모순에 맞서, 아르비스의 이름 아래 새로운 질서를 세울 동지들을 모집한다! 우리의 목표는 자급자족을 통한 경제적 독립, 그리고 기득권 파벌의 해체다!"
"오오오오-!"
수백 명의 학생이 좀비 떼처럼 아르비스 영지 은퇴 계획 연구회 천막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천막 뒤편의 그늘진 기둥에 기대어 선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니, 자급자족은 맞는데…… 경제적 독립도 대충 맞긴 한데…….’
그건 내가 세금을 덜 내고 조용히 은퇴해서 꿀을 빨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예산 계획이었다. 기득권 해체라니? 제국의 모순에 맞서다니? 그 무시무시한 반역의 단어들이 왜 내 소박한 은퇴 계획서에서 도출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르비스의 쥐새끼가 감히 아카데미의 자금줄을 흔들려 하는군. 오늘 그 건방진 싹을 잘라주마."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군중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동부 파벌의 수장, 줄리우스 카이저가 수십 명의 상급생을 거느리고 위압적인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잘 정돈된 금발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오만하게 빛났다. 그의 손에 들린 가죽 장부는 율리우스 가문이 관리하는 유령 유통망의 통제권이었다. 그 장부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줄리우스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나를 제국 반역죄로 고발할 것처럼 서슬 퍼랬다.
"루안 폰 아르비스. 네가 감히 신성한 아카데미의 예산안을 난도질하고, 해롤드를 꺾어 우리 파벌의 명예를 더럽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놓고 세력을 모으겠다는 건가?"
줄리우스의 뒤를 따르는 상급생들이 일제히 마력의 기운을 뿜어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찌릿한 마찰음이 일었다.
일촉즉발. 당장에라도 마법 주문과 검기가 오갈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아델린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검을 고쳐 잡았다.
"줄리우스 카이저! 루안 님의 숭고한 뜻을 방해하겠다면, 내 검이 먼저 네 오만을 벨 것이다!"
"하, 숭고한 뜻? 고작 변방의 거지 같은 영지 놈들이 혁명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냐?"
양측의 기세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학생들은 침을 삼키며 이 세기적인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서 세상의 모든 주목을 받아야 할 주인공인 나는.
‘지금이다.’
소리 소문 없이, 먼지처럼 가볍게 뒤걸음질을 쳤다.
화려한 은빛 갑옷을 입고 어그로를 잔뜩 끌어주는 아델린과,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분노를 쏟아내는 줄리우스의 대치 상태는 아주 훌륭한 가림막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주변의 풍경 속으로 녹아들 듯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광장을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모두가 두 거물의 대립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가성비 극상의 은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그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시끄러운 함성과 마력의 파동이 등 뒤로 점차 멀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콜록, 쿨럭……!"
갑작스레 찾아온 기침과 함께 입술 사이로 비릿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손수건으로 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하얀 천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기계적인 음성이 차갑게 울려 퍼졌다.
[경고: 아덴의 서 활성화에 따른 영혼 연산 부하 발생.] [현재 잔여 수명: 24일 12시간 40분.] [생명력 유지를 위해 고순도 ‘성광석’의 흡수가 시급합니다.]
"알아, 안다고. 이 망할 놈의 책장수야……."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손끝에 닿는 것은 며칠 전 입학식 날, 아카데미 구석의 고물상에서 단돈 3실링을 주고 구매했던 낡은 청동 열쇠였다.
당시 고물상 노인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이 열쇠를 가리키며 '고대 제국의 보물 창고 열쇠'라며 약을 팔았었다. 터무니없는 사기극이었지만, 내 안의 '아덴의 서'가 이 열쇠를 감지하는 순간 기이하게 반응했기에 가성비 좋게 끼워팔기로 뜯어냈던 물건이었다.
[분석 완료: 고대 아덴 문명의 비밀 광맥 차단 장치(장치 ID: AD-09).] [해당 장치와 공명하는 마도 동력실의 좌표를 전송합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이정표가 떠올랐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아카데미 서쪽 외곽으로 향했다.
그곳은 학생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이른바 '버려진 구역'이었다.
오래전 대화재로 폐쇄되었다는 고풍스러운 온실 건물과 무너진 탑들이 이끼와 덩굴에 뒤덮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고요함이 마음에 쏙 들었다. 시끄러운 광장보다 이런 쓸쓸하고 아늑한 폐허가 내 은퇴 성향에는 훨씬 잘 맞았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을 밟으며 온실 내부로 들어섰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먼지 섞인 공기 속에서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사방에 널린 녹슨 마도 기계들의 잔해가 이곳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인가?"
온실 중앙, 이끼가 두껍게 낀 거대한 청동 제단 앞에 섰다.
제단의 중심부에는 주머니 속 청동 열쇠와 정확히 일치하는 형태의 홈이 파여 있었다. 세월의 때가 묻어 검게 변한 홈이었지만, 그 기하학적인 문양은 분명 아덴 문명의 영식 구조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청동 열쇠를 홈에 밀어 넣었다.
스르륵.
마치 기름칠을 새로 한 것처럼, 열쇠는 부드럽게 끝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렸다.
철컥-!
묵직한 기계음이 고요한 온실 안에 메아리쳤다. 제단 밑바닥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발 밑의 석판들이 정교하게 맞물리며 양옆으로 갈라졌고, 어두컴컴한 지하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아덴의 서가 내 머릿속에서 경보에 가까운 알람을 울려댔다.
[시스템 활성화. 고대 차단 장치 해제.] [지하 구역의 마나 밀도 급상승.] [정밀 스캔을 시작합니다…….]
나는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차가운 지하 공기 대신, 기이할 정도로 따뜻하고 농밀한 마나의 흐름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미쳤군."
사방이 거대한 천연 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의 벽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은, 제국에서 가장 귀중한 재화이자 내 수명을 늘려줄 유일한 구원줄.
성광석(星光石)이었다.
그것도 인위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순도 100%에 가까운 천연 고농도 성광석 광맥이 거대한 파이프라인처럼 동굴 벽을 타고 끝없이 뻗어 있었다. 영롱한 은청색 빛이 동굴 내부를 환상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스캔 완료.] [매장량: 측정 불가(최소 제국 표준 규격 50,000톤 이상).] [순도: 98.7%.] [현재 아카데미 설립 초기의 마도 동력실 지하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확인됨.]
"5만 톤……."
머리가 핑 돌았다.
제국 황실에서 1년에 유통하는 성광석의 총량이 수천 톤 수준이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조용한 지하 동굴에, 제국 전체를 사고도 남을 수준의 노다지가 묻혀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카데미 소유의 땅 밑바닥에,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잊힌 채로.
남들은 지상에서 고작 몇십 개의 성광석 지원금을 더 받아내겠다고 동아리를 만들고, 파벌을 형성하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줄리우스 카이저가 그 오만한 콧대를 치켜세우며 돈 자랑을 할 때, 나는 이 어두운 지하에서 황제조차 탐낼 만한 보물창고를 단독으로 열어젖힌 것이다.
"콜록, 쿨럭!"
격한 기쁨 탓인지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망스럽지 않았다. 나는 벽면에 튀어나온 주먹만 한 성광석 결정 하나를 꽉 쥐었다.
[성광석 접촉 확인. 생명력 추출 및 아덴의 서 충전을 시작합니다.]
투명한 마력의 실이 내 손끝을 통해 체내로 흘러들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전신에 따뜻한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잔여 수명: 90일…… 120일…… 200일…….] [충전 효율 극대화. 수명 제한이 일시적으로 대폭 완화됩니다.]
"하하……."
결국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됐다. 이제 수명 걱정 때문에 매번 벌벌 떨며 각혈할 필요도 없다. 이곳에서 조용히 성광석을 조금씩 채굴해 체내에 흡수하고, 남은 것은 은퇴 자금으로 야금야금 세탁해 아르비스 영지로 보내면 된다. 제국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완벽한 비밀 기지이자 자금줄이 확보된 순간이었다.
"과연."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내 웃음수리가 딱 멈췄다. 등 뒤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아르비스의 천재가 동아리 모집 시장이라는 거대한 소동을 일으키고, 아델린을 방패 삼아 사라진 진짜 목적이 여기 있었군."
느릿한 박수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금발을 우아하게 뒤로 넘긴 사내. 그의 손에는 여전히 율리우스 가문의 유령 유통망 장부가 들려 있었다.
줄리우스 카이저였다.
그는 광장의 대치 상황을 내버려 두고, 나를 은밀히 미행해 이 지하 깊은 곳까지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줄리우스는 사방을 가득 채운 영롱한 성광석 광맥을 둘러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동자에 탐욕과 경외감이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카데미 설립 초기의 잃어버린 마도 동력실…… 그리고 그 밑에 잠들어 있던 제국 최대 규모의 천연 성광석 광맥이라니. 이걸 고작 1학년인 네 녀석이 단숨에 찾아내다니."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기분 나쁘게 메아리쳤다.
"처음에는 네 녀석이 그저 아카데미의 세금 문제나 건드리는 잔챙이 혁명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오산이었군. 루안 폰 아르비스, 네 진짜 목적은 제국의 경제적 근간인 성광석 시장을 통째로 뒤흔드는 것이었어."
‘아니야, 제발 그만해…….’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저 내 목숨줄 연장하고 은퇴할 자금을 챙기려 했을 뿐이다. 제국 경제를 뒤흔들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줄리우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는 황립 아카데미의 영토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모든 지하시설과 자원에 대한 우선 처분권은 우리 카이저 가문이 주도하는 학생 의회 기득권층에게 있지."
줄리우스가 장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이 광맥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네 낡아빠진 청동 열쇠 따위는 아무런 법적 효력도 갖지 못해. 오히려 아카데미의 공공재산을 무단으로 횡령하려 한 죄로 네 아르비스 영지는 제국의 이름 아래 철저히 파산하고 파멸하게 될 거다."
그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듯 낮고 서늘하게 선언했다.
"선택해라, 루안. 이 광맥의 지분 90%를 카이저 가문에 넘기고 내 밑으로 들어올 것인가, 아니면 내일 아침 네 고향 영지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공중분해 되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