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비켜라."

연병장의 침묵을 깨며 오만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제복을 입은 청년이 무리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가슴팍에 매달린 은빛 독수리 배지가 정오의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동부 파벌의 거두이자, 재정의 지배자인 줄리우스 카이저의 오른팔, 해롤드였다.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 면전에 붉은 인장이 찍힌 가죽 양장본 서류를 들이밀었다.

"루안 폰 아르비스. 결계를 조금 흔들었다고 해서 네가 제국의 주인이 된 줄 아는 모양이군."

해롤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웃음과 확신이 뒤섞인 기분 나쁜 미소였다.

"율리우스 님께서 네게 내리시는 은혜다. 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카이저 가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와라. 아르비스 영지의 모든 재정권과 성광석 유통권을 우리 가문에 양도한다면, 네 그 하찮은 목숨을 아카데미 수료 때까지는 보장해 주지."

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뭐라고? 아르비스 영지의 재정권과 성광석 유통권을 양도하라고?

이 미친놈들이 지금 누구 노후 자금에 손을 대려고 하는 건가. 내가 그 변방 황무지를 어떻게 개간해서 은퇴 후 욜로 라이프를 즐길 계획을 세워 놨는데, 감히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해?

게다가 성광석 유통권이라니. 내 수명을 늘려줄 유일한 생명줄을 통째로 바치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거절한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귀찮음을 가득 담아 내뱉었다. 말 한마디 섞는 것도 수명 낭비였다.

그러나 해롤드는 내 짧은 대답을 오만함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어리석군. 변경의 부스러기 귀족 놈이 힘을 조금 가졌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그 오만함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마."

서류를 거칠게 거두어들인 해롤드가 허리춤의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스릉!

푸른빛 마력이 서린 검날이 초승달 같은 궤적을 그리며 뽑혀 나왔다. 연병장 바닥에 스며들어 있던 마나가 그의 검 끝으로 급격히 응집되기 시작했다. 동부 파벌의 엘리트다운 정교하고 빠른 마력 집속이었다.

주변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 귀찮게 진짜.'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싸우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 체력도 없고, 수명도 없다. 하지만 저 검날이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게 가라앉으며 뇌리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잠들어 있던 장치를 깨웠다.

'아덴의 서, 기동.'

[연산 장치 '아덴의 서'가 활성화됩니다.] [대상의 마력 궤적 및 물리 법칙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경고: 기동 시간 동안 시뮬레이션의 대가로 사용자의 수명이 실시간으로 소모됩니다.]

머릿속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징하게 울렸다. 눈앞의 풍경이 순간적으로 정지하듯 느려지며, 사방이 청백색의 기하학적 수식과 마나의 흐름선으로 가득 찼다.

[남은 수명: 11일 4시간 12분 08초...] [남은 수명: 11일 4시간 12분 07초...]

망할, 숫자가 깎여 나갈 때마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엄습했다. 1초가 아까웠다. 가성비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해롤드가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내 어깨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격을 날려왔다. 마법 결계를 두른 검날은 공기를 찢는 파찰음을 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방어막을 전개하거나 뒤로 회피했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체력도 마나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방어 마법은 연산 처리 장치에 과부하를 주고 수명을 더 갉아먹는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해롤드의 마력 영식 분석 완료.] [검격의 진행 방향: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34도 경사.] [검날 표면의 마력 결계 주파수: 420Hz.] [간섭 가능한 최소 마나 소모 포인트 탐색 완료.]

아덴의 서가 제시한 해결책은 너무나 소박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검날이 내 어깨에 닿기 직전,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가볍게 뻗었다. 그리고 해롤드의 검 측면, 마력이 가장 불안정하게 웅성거리는 교차점을 손톱 끝으로 툭 건드렸다.

단 0.1초의 연산이 만들어 낸 기적적인 타이밍이었다.

챙-!

맑고 가느다란 파편 음이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해롤드의 검격이 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궤적을 잃고 허공으로 미끄러졌다. 그의 검에 둘러싸여 있던 푸른 마법 결계가 비누방울처럼 허무하게 터져 나갔다.

"뭐, 뭐라고?!"

해롤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필살의 일격이, 겨우 손가락 하나에 허무하게 튕겨 나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력의 흐름이 강제로 뒤틀린 반동으로 그의 상체가 크게 앞으로 쏠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명을 아끼기 위한 두 번째 가성비 공정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되었다.

[대상 발밑의 대리석 마찰 계수 분석 중...] [마찰 계수를 0.78에서 0.01로 일시 개변.] [필요 연산 속도: 0.05초. 수명 소모 극소화.]

나는 해롤드의 디딤발이 닿아 있는 대리석 바닥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딱 튕겼다.

딱!

맑은 마찰음과 함께, 미세한 마력 파동이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어, 어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해롤드의 한쪽 발이 빙판 위를 달리는 것처럼 미끄러졌다. 마찰력이 완전히 사라진 바닥에서 인간의 신체는 균형을 잡을 수 없다.

그는 허공에서 양팔을 요란하게 휘저으며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미끄러졌고, 이내 머리부터 대리석 바닥으로 처박혔다.

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해롤드의 몸이 바닥을 두어 바퀴 굴렀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뒤집혀 있었고, 입에서는 가느다란 침이 흘러나왔다. 완벽한 혼절이었다.

"……."

연병장 주변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학생이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들이켰다. 정적 속에서 오직 해롤드가 떨어뜨린 검만이 바닥을 뒹굴며 챙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화려한 영창도, 거대한 마법진도 없었다.

단지 손가락을 튕기는 가벼운 몸짓 한 번에, 동부 파벌의 정예 마법사가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이 현상이 마법의 경지를 넘어선, 흡사 세계의 법칙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신의 권능처럼 보였으리라.

"방금... 뭘 한 거지?" "영창도 없이 물리 법칙 자체를 개변한 건가? 말도 안 돼..." "카이저 가문의 검사조차 그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무력화되다니!"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정작 내 속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억지로 아덴의 서를 기동한 대가로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액체가 역류하는 느낌에 나는 급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쿨럭! 쿨럭!"

손수건을 떼어내자, 흰 천 위에 붉은 선혈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침을 할 때마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피 묻은 손수건을 거칠게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아, 진짜 수명 아까워 죽겠네. 얼른 기숙사로 가야지.'

귀찮은 일에 휘말려 수명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나를 바라보던 주변의 시선들이 한층 더 공포와 경외로 물들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눈빛 하나 흐려지지 않아."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가며 고대 마법을 부린 거야. 제국의 거대 세력인 카이저 가문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의 육체를 제물로 바치고 있어!" "저 고결한 풍모를 봐. 아르비스 공자는 진짜 혁명가다..."

어처구니없는 착각들이 내 등 뒤에서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들을 일일이 붙잡고 '난 그냥 기관지가 약하고 수명이 얼마 안 남은 불쌍한 은퇴 희망자일 뿐이야'라고 설명하는 것은 가성비가 너무 떨어졌다.

그때, 군중 사이를 헤치고 한 소녀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발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낡은 기사 단복을 입은 소녀. 올곧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서려 있었다.

아델린 폰 엘베스였다.

제국의 몰락 귀족 가문 출신으로,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하고 정의로운 성격의 소유자. 그녀는 바닥에 기절해 있는 해롤드와 내 손에 묻은 핏자국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내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사들이 군주에게 군례를 올릴 때나 쓰는 극도의 경의 표시였다.

"루안 폰 아르비스 공자."

아델린의 목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당신의 고결한 투쟁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거대한 카이저 가문의 압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육신을 불살라 제국의 모순을 깨뜨리려는 그 숭고한 뜻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 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엘베스 가문은 비록 몰락했으나, 정의를 알아보는 눈은 잃지 않았습니다. 공자께서 제국의 뒤틀린 재정과 권력을 바로잡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제 검과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당신의 고독한 행보에 든든한 방패가 되어 드리지요."

아델린의 눈동자는 거의 광신에 가까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이 황당한 상황에 이마를 짚고 싶었다. 방패는 무슨 방패. 난 그냥 조용히 성광석이나 모아서 북쪽 변방으로 도망치고 싶은 은퇴 희망자라고!

"…오해가 있군. 난 그런 거창한 일에는 관심 없다."

내가 차갑게 선을 긋자, 아델린은 오히려 가슴 아프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역시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제국의 미래만을 걱정하시기에 스스로를 낮추시는 것임을 압니다. 협력자들의 안전을 우려해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그 깊은 배려...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진짜로 관심이 없어서..."

"걱정 마십시오, 공자! 제 작은 힘이나마 공자의 대업에 보탬이 되도록, 아카데미의 부조리한 세력들을 함께 척결해 나가겠습니다!"

아델린은 이미 내 말을 자신만의 필터로 완벽하게 여과하여 듣고 있었다. 소통의 가성비가 마이너스 통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 이상 대꾸했다가는 더 큰 오해를 낳을 것이 뻔했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아델린은 내 체념 섞인 대답을 무언의 승낙으로 받아들였는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보필하겠습니다!"

귀찮은 녀석이 하나 꼬여버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를 쫓아내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기에, 나는 일단 상황을 방치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 연병장 단상 위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은 거기까지."

붉은색 마법사 로브를 걸친 중년의 마법사, 입학식 임시 감독관인 카산드라 교수의 조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정교한 은제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해롤드가 먼저 사적인 결투를 제안하고 무기를 뽑아 들었으니, 루안 폰 아르비스의 대응은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또한, 신입생의 신분으로 결계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이를 제어한 공로를 치하하여, 아카데미 평의회는 루안 군에게 특별 포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조교가 은제 상자를 열어 내게 내밀었다.

상자 안바닥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광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투명한 결정체 내부에서 은은한 백색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고순도 성광석이었다.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성광석이다! 게다가 저 정도 순도라면...!'

나는 본능적으로 상자 속의 성광석을 낚아채듯 받아들였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수명이 사흘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처지에서, 이 성광석은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감사히 받지."

나는 성광석을 쥐자마자 속으로 아덴의 서를 기동해 마나를 체내로 흡수했다.

화르륵!

차가우면서도 따스한 마나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와 온몸의 혈관을 채웠다. 깎여 나가던 수명 수치가 기적처럼 멈추고, 급격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광석 정제 완료. 생명력이 충전됩니다.] [남은 수명: 11일 4시간... -> 14일 4시간 12분 08초]

늘어났다! 무려 사흘이나 수명이 늘어났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좋아, 아카데미에 들어온 보람이 있군. 이런 식으로 성광석만 제때 수급할 수 있다면 은퇴 계획은 식은 죽 먹기다.'

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모습을 본 아델린은 다시 한번 감격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과연... 포상으로 받은 귀한 성광석조차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마법 반동으로 다친 육체를 치유하는 데 즉시 사용하시는군요. 오직 대업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관리하시는 철저함,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

나는 그냥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이제 비켜라. 나는 침대로 가고 싶다.

성광석 수급처도 확인했겠다, 이제 귀찮은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갑자기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지진이라 하기에는 마나의 파동이 지나치게 거칠고 사나웠다. 연병장 중앙, 방금 전까지 해롤드가 쓰러져 있던 자리 부근의 마법 연성진이 붉게 물들며 기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연성진이... 폭주하고 있어!"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다시 한번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해롤드가 난동을 부리며 뿜어댔던 마력과, 내가 마찰 계수를 조절하기 위해 흘려보냈던 미세한 간섭 마나가 연병장 지하의 고대 마도 장치와 공명해 버린 모양이었다.

치이이익-!

붉게 달아오른 연성진의 틈새로,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유독성 푸른 마나 가스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스가 닿은 바닥의 대리석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부식되며 녹아내렸다.

"대피해라! 고대 연성진의 제어 장치가 완전히 손상되었다!"

조교의 다급한 고함이 울려 퍼졌으나, 이미 뿜어져 나온 독가스는 무서운 속도로 연병장 전체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 유독 가스의 진행 방향의 가장 전면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내 모습이 있었다.

'아, 내 평화로운 은퇴 라이프가 또...!'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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