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매우 긴박한 첩보입니다. 황실의 감시 세력이자 엘리드 남작의 직속 암살조가 이미 우리 아르비스 영지의 남쪽 경계선을 넘어 잠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경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집무실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쏟아졌다.
루안은 책상 위에 놓인 수석 입학 허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조용히 영지 구석에 박혀 은퇴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첫 단추를 꿰기도 전에 피비린내 나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기분이었다.
그때, 천장 구석의 어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두꺼운 벨벳 커튼이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루안의 눈동자가 포착했다.
그곳에 있었다. 엘리드 남작이 보낸 눈이.
루안은 경비대장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물러가라는 신호였다. 대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도련님의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루안은 서두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차갑게 식은 찻잔을 들어 품위 있게 입술을 적셨다. 그가 마법을 캐스팅하거나 소리쳐 호위병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마법을 부리기 위해 ‘아덴의 서’를 작동시키는 순간 수명이 초 단위로 깎여 나갈 것이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목청이 아프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어둠이 일렁이는 커튼 뒤를 응시할 뿐이었다.
눈꺼풀을 반쯤 내린 그의 눈동자는 깊고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밤새 기획안을 작성하느라 피로가 극도에 달해 생긴 다크서클이, 타인의 시선에는 모든 음모를 꿰뚫어 보는 절대자의 서늘한 혜안으로 비쳤다.
커튼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던 살수, 제이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미 들켰다.'
제이드는 이빨을 악물었다. 상대는 마법 한 자락조차 펼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들고 이쪽을 지시하는 그 고요한 눈빛만으로, 자신의 모든 도주로가 차단당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포식자의 아가리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루안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천둥처럼 울렸다.
"돌아가라."
나직하고 쉰 목소리였다. 성대를 크게 울리지 않는, 지극히 가성비를 따진 발성이었다.
"그리고 네 주인에게 전해라. 아르비스의 재정은 제국의 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일 뿐이라고."
그 말은 제이드의 뇌리에서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다. 제국의 조세 제도를 뒤흔들 거대한 경제적 쿠데타를 이미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으니, 어설픈 무력 따위로 자신을 저지하려 들지 말라는 오만한 경고로 들린 것이다.
제이드는 압도적인 기백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창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도망치듯 몸을 던졌다.
창문이 덜컹거리며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루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귀찮아 죽겠네. 말귀를 알아먹었으려나. 그냥 세금 좀 아껴서 은퇴 자금 모으겠다는 소리인데."
그는 붉게 물든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쳤다. 수명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의 육신은 벌써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카데미에 들어가 성광석을 쥐어짜 내야만 했다.
***
사흘 뒤.
제국 수도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베리타스 황립 아카데미의 정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천재들과 명문가의 자제들이 화려한 마차에서 내려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그 화려한 무리 사이에서, 루안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화려한 귀족복 대신 수수한 회색 코트를 걸친 차림새였다.
"이 주변에 쓸 만한 고물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루안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아카데미 입학식 전에 조금이라도 쓸 만한 마법 도구나 마나 결정체를 싸게 확보하는 것.
그의 발걸음이 아카데미 대기 구역 한편에 자리 잡은 허름한 노점상 앞에 멈춰 섰다. 노점상 위에는 정체불명의 고대 유물 파편들과 녹슨 청동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가만히 매대를 살펴보던 루안의 머릿속에서, 차가운 기계음이 울렸다.
[ 아덴의 서가 고대 유적의 잔해를 감지합니다. ] [ 대상: 낡은 청동 열쇠 (잔해 코드: '아덴-광맥-04') ] [ 분석 결과: 고대 아덴 문명의 비밀 성광석 광맥 차단 장치. ] [ 현재 상태: 마력 고갈로 인해 일반 청동 고물로 위장됨. ]
루안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성광석 광맥 차단 장치라고? 이게 왜 이런 굴러다니는 똥값 고물 사이에 처박혀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루안은 심장이 뛰는 것을 억누르며,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낡은 열쇠를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이거, 얼마지?"
체격이 왜소한 노점상은 루안의 수수한 차림새를 훑어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을 까딱였다.
"그거? 그냥 유적지 구석에서 주워온 고물이야. 장식용으로도 못 쓰는 쓰레기니까, 1실버만 내고 가져가든가."
1실버. 은퇴 자금을 1코퍼라도 아껴야 하는 루안에게는 그마저도 과분한 지출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구리 동전 한 닢을 꺼내 제단 위에 툭 올려놓았다.
"1코퍼."
"뭐? 이봐, 장난해? 아무리 고물이라도 그렇지, 1코퍼가 누구 애 이름인 줄 알아?"
노점상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루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피로에 찌들어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 그리고 시한부 특유의 창백한 안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을 초월한 자 특유의 기묘한 압박감이 노점상의 숨통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저 눈빛은 필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암살자나, 혹은 제국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고결한 귀족의 그것이었다. 단돈 1코퍼를 던지면서도 마치 대륙의 영토를 하사하는 듯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가, 가져가쇼."
노점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동전을 움켜쥐었다.
루안은 만족스럽게 청동 열쇠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단돈 1코퍼로 수억 골드의 가치가 있는 성광석 광맥의 열쇠를 손에 넣은 순간이었다. 가성비의 극치였다.
***
아카데미 연병장.
수천 명의 신입생들이 도열한 가운데, 하늘 위로 거대한 금빛 장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절대 방어 결계, '이지스 오브 베리타스'였다.
루안은 줄 끝자락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결계의 마나 흐름을 분석할 수 있다면, 나중에 세관의 감시를 피해 성광석을 밀수할 루트를 개척할 수 있을 텐데.'
순수한 탈세와 절약을 위한 목적이었다.
루안은 머릿속의 연산 장치를 가동했다.
'아덴의 서, 기동.'
우웅-!
그의 뇌리가 순식간에 차가운 파란빛으로 물들며,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결계의 수식들이 수만 개의 숫자로 쪼개져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실시간 시뮬레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 결계 영식 분석 중…… 구동률 12%…… 34%…… ] [ 경고: 과도한 연산으로 인해 생명력이 실시간으로 소모됩니다! ] [ 잔여 수명: 28일 14시간…… 12시간…… ]
"윽."
가슴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지나치게 방대한 고대 결계의 수식을 강제로 연산하려다 보니,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육체가 비명을 지른 것이다.
콰아아앙-!
그 순간, 루안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연산의 파동이 현실의 대결계와 공명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금빛 장벽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일순간 빛을 잃고 아래로 툭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쿨럭!"
마나의 거대한 반동이 역류했다.
루안은 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으나, 틈새를 뚫고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얀 실크 손수건이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을 영혼의 충격이었으나, 루안은 쓰러질 수 없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자신을 감시하는 제국의 하이에나들에게 빌미를 줄 뿐이었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르비스 영지 조사가 시작될 거고, 내 은퇴 계획은 물거품이 돼.'
루안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리고 극도로 단련된 의지력으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천천히 손수건을 입가에서 떼어냈다.
그의 눈가에 맺힌 핏발과 창백하게 질린 뺨, 그리고 입술 끝에 묻은 붉은 피가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터무니없는 위압감을 자아냈다.
주변에 서 있던 신입생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로 쏠렸다.
"방금…… 결계가 흔들린 건가?"
"저 자를 봐! 피를 토하고 있어!"
수군거림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마법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귀족 자제들과 단상 위의 교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마법사들이 마나 폭주를 억누를 때 사용하는 '각혈의 예법'.
아카데미 전체를 덮고 있는 전설적인 결계의 반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단 한마디의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기품 있게 피를 훔쳐내는 그 모습은 가히 절대자의 풍격이었다.
"아르비스의 시한부 천재……."
누군가 경외심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수명을 깎아가며 결계의 약점을 파악한 건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런 무모한 짓을……."
"제국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결계를 흔들어 아카데미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할 수 있음을 증명한 거야!"
소문은 빛보다 빠르게 왜소한 오해를 키우며 번져나갔다. 단지 탈세 경로를 찾으려다 체력 부족으로 피를 토한 루안은, 어느새 제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고결하고도 위험한 혁명가로 격상되어 있었다.
루안은 피 묻은 손수건을 품에 넣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다들 날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그냥 기관지가 좀 안 좋은 것뿐인데.'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웅성거리던 수백 명의 수재들이 흠칫 놀라며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기침 한 번에 연병장 전체의 기세가 순식간에 제압당한 것이다. 단상 위의 교수들조차 마른침을 삼키며 루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긴장된 눈으로 주시했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루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정도 기세라면 아무도 자신에게 귀찮은 싸움을 걸어오지 못할 터였다. 이제 조용히 기숙사로 들어가 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은퇴를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비켜라."
연병장의 침묵을 깨며, 오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제복을 입은 한 청년이 무리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그의 가슴에는 동부 파벌을 상징하는 은빛 독수리 배지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카데미 동부 파벌을 이끄는 실력자이자, 줄리우스 카이저의 오른팔인 해롤드였다.
해롤드는 루안의 창백한 얼굴을 비웃듯 바라보며,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가죽 양장본 서류를 꺼내 들었다.
"루안 폰 아르비스. 결계를 조금 흔들었다고 해서 네가 제국의 주인이 된 줄 아는 모양이군."
그는 서류를 루안의 코앞에 가볍게 들이밀었다.
"율리우스 님께서 네게 내리시는 은혜다. 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카이저 가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와라. 아르비스 영지의 모든 재정권과 성광석 유통권을 우리 가문에 양도한다면, 네 그 하찮은 목숨을 아카데미 수료 때까지는 보장해 주지."
해롤드의 눈빛에는 잔인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네가 그 잘난 혁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르비스 영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루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은퇴를 향한 조용한 발걸음 앞에, 거대한 거머리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아 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