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울컥, 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 것은 짙은 선혈이었다. 붉은 액체가 하얀 서류 봉투 위로 뚝뚝 떨어지며 기괴한 꽃을 피웠다. 폐부가 찢어질 듯한 통증이 뒤따랐지만, 루안은 그저 담담하게 책상 서랍을 열었다. 실크로 짜인 고급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툭툭 닦아내는 손길에는 티끌만 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도련님!"

집무실 구석에서 차를 내려놓던 비서 베아트리스가 들고 있던 은제 쟁반을 떨어뜨릴 뻔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독한 경악과 가슴 아픈 동정으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루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가성비 위주의 계산뿐이었다.

'아, 아까운 실크 손수건. 이거 세탁하려면 세제 값이 더 들 텐데. 차라리 그냥 면 손수건을 쓸 걸 그랬나.'

루안은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입안을 혀끝으로 쓸어내리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몸뚱이가 삐걱거리는 비명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우아하고 고결한 자태를 유지했다.

마법사들이 마나 폭주를 겪을 때 몸 안의 기공을 억누르며 피를 토하는, 이른바 '각혈의 예법'이었다.

실제로는 그저 선천적인 시한부 질환과 고대 유산의 무지막지한 반동 때문에 기침하듯 피를 쏟은 것뿐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이보다 더 숭고할 수 없는 절대자의 풍모였다.

"또…… 마력의 반동을 육체로 억누르고 계셨던 건가요?"

베아트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그토록 거대한 마법 영식을 홀로 감당하시면서, 어찌 이리 매번 스스로를 갉아먹는 길을 택하시는지요. 제국 재무부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마나의 흐름을 강제로 비틀어 누르신 게 분명합니다. 아르비스 영지를 지키기 위해 이토록 고독한 사투를 벌이고 계셨다니……!"

"……."

루안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아닌데. 그냥 원래 몸이 쓰레기라 기침하다가 피 터진 건데.'

말해봐야 입만 아팠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가성비가 지독하게 떨어지는 행위였다. 게다가 이 영지의 인간들은 한번 눈이 돌아가면 필터링을 거쳐 제멋대로 해석하는 고질병이 있었다. 해명하려 들수록 오해의 늪은 깊어질 뿐이었기에, 루안은 침묵이라는 가장 효율적인 방어기제를 선택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흐트러진 서류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예산안의 숫자가 맞지 않는군."

"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영지의 수석 회계관들이 사흘 밤낮을 새워 검수한 최종본입니다만……."

"눈에 보이는 숫자가 전부가 아니지."

루안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그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마력의 격자무늬가 벼락처럼 펼쳐졌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기계적인 연산음이 울려 퍼졌다.

[ 고대 연산 장치 '아덴의 서(Book of Aden)' 기동합니다. ] [ 대상 시스템: 아르비스 영지 세무 예산안 분석 및 마법적 위조 탐색. ] [ 연산 부하율: 12%. 실시간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에는 복잡한 수식과 기하학적인 마법 공식들이 쉴 새 없이 나열되고 있었다.

아덴의 서.

고대 초고도 마법 문명이 남긴 유일무이한 연산 장치이자, 루안이 가진 인류 최강의 재능을 보조하는 사기적인 골든핑거였다. 이 장치는 세상의 모든 마나 흐름을 추적하고 연산하여 완벽한 마법 영식을 실시간으로 설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단순히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정보와 수치를 마법적 기호로 환산하여 최적의 경로를 도출해내는 것 또한 가능했다.

스르륵, 서류 위의 숫자들이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제국 재무부의 말단 세무관들이 아르비스 영지의 멍청한 회계관들을 속이기 위해 교묘하게 숨겨둔 이중 장부의 흔적, 그리고 세금을 추가로 갈취하기 위해 마법적으로 왜곡해 둔 조세 유출 경로가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기, 그리고 여기. 세부 항목의 고대 마나 각인이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어. 단순한 계산 실수가 아니라, 제국 중앙에서 파견된 세무관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마법적 장치다."

루안이 펜 끝으로 서류의 특정 지점을 조용히 짚었다.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럴 수가……! 제국 재무부가 감히 아르비스 영지의 재정을 손대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짧은 순간에 그 복잡한 다중 마법 결계를 분석해내신 건가요?"

"단순한 연산일 뿐이다."

루안이 덤덤하게 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역시 아덴의 서는 사기야. 이대로 세금 세는 구멍만 완벽하게 막아두면, 굳이 일하지 않아도 평생 놀고먹을 은퇴 자금이 굳는다. 제국의 멍청이들에게 내 소중한 돈을 한 푼도 줄 수 없지.'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제국의 귀찮은 감시망과 의무에서 벗어나, 가장 구석진 북방의 황무지인 이곳 아르비스 영지에서 누구보다 안락하고 완벽한 자급자족 은퇴 생활을 누리는 것.

그러나 기쁨도 잠시, 뇌리를 때리는 차가운 경고 장치에 루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 시스템 기동 완료. ] [ 연산 대가 지불: 사용자 생명력(수명) 소모. ] [ 현재 잔여 수명: 30일 12시간 44분. ] [ 경고: 생명력 충전을 위한 '성광석(Astral Stone)'의 섭취가 시급합니다. ]

"……하아."

루안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아덴의 서는 신적인 수준의 연산 능력을 제공하지만, 그 대가는 지극히 잔혹했다. 장치를 가동하는 매 순간마다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갔다.

이 빌어먹을 시한부 인생을 연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제국 표준 통화의 가치 기준이자 고밀도 마나 결정체인 '성광석'을 흡수하는 것뿐이었다.

'30일이라니. 지난번 유적 잔해 분석할 때 너무 무리했나.'

성광석의 가치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환산해 보았다.

성광석 10g당 대략 사흘 치의 수명 연장. 한 달을 버티려면 최소 100g 이상의 정제된 성광석이 필요했다.

문제는 이 빌어먹을 돌덩어리가 일반적인 시장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초고가 국가 통제 자원이라는 점이었다. 제국 재무부와 황실이 모든 광맥의 유통망을 꽉 쥐고 독점하고 있었기에, 돈이 있어도 함부로 구할 수가 없었다. 변방의 척박한 아르비스 영지에서는 1년에 고작 몇 그람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베아트리스."

"예, 도련님. 말씀하십시오."

베아트리스는 이미 루안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그가 제국의 거대한 음모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지략을 짜내고 있다고 굳게 믿는 눈빛이었다.

"현재 제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그리고 가장 단기간에 대량의 정제 성광석을 획득할 수 있는 경로가 어디지?"

"성광석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황실의 허가 없이는 유통이 불가능한 자원입니다만…… 아, 딱 한 곳이 있습니다. 제국의 정예들을 양성하는 '베리타스 황립 아카데미'입니다."

베아트리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곳은 제국의 모든 인재와 권력이 모이는 장소이기에, 학업 성적이나 마도 연구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낸 장학생들에게 매 분기마다 포상으로 정제된 성광석을 파격적인 규모로 지급합니다. 황실의 독점권에서 예외로 분류되는 유일한 무풍지대이지요."

루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카데미 장학생 포상.'

그것은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합법적으로 대량의 성광석을 합치고 뜯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구멍이었다. 귀찮게 제국 재무부와 세금 전쟁을 벌이거나 암시장을 뒤적거리며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카데미에 기어들어가 적당히 성적을 내고 성광석만 쏙 빼먹은 뒤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군. 아카데미라……."

루안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해야겠어."

그 한마디에 집무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베아트리스는 입을 딱 벌린 채 루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루안의 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 제국의 권력 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 위대한 혁명의 청사진으로 재창조되고 있었다.

'도련님께서 마침내 움직이신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변방에 숨어 힘을 기르던 아르비스의 천재가, 제국의 숨통을 쥐고 있는 황실 아카데미의 심장부로 직접 걸어 들어가 전면전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성광석의 독점권을 깨부수고, 황실의 목줄을 죄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포석.

"알겠습니다, 도련님! 즉시 아카데미 입학 절차를 밟겠습니다. 이미 도련님의 명성은 제국 중앙에도 비밀리에 퍼져 있으니, 수석 입학은 따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도련님의 원대한 대업을 위해 이 베아트리스, 목숨을 바쳐 보필하겠습니다!"

"……아니,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는데."

"그 고결한 사명감, 깊이 새기겠습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루안이 손을 저었지만, 베아트리스는 이미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며 집무실을 뛰어나간 뒤였다.

루안은 이마를 짚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조용히 성광석만 캐먹고 튀려던 계획이었는데, 어째 시작부터 주변의 오해가 은하계 너머로 날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장 수명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서 조용히 아웃사이더처럼 구석에 처박혀서 장학금만 타 먹고 은퇴하는 거다.'

루안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붉게 물든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들어온 것은 영지의 경비대장이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화려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도련님! 제국 황실로부터 긴급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경비대장이 무릎을 꿇으며 서류를 바쳤다.

봉투를 뜯어내자, 황금색 마나로 각인된 글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 베리타스 황립 아카데미 수석 입학 허가서. ] [ 피교육자: 루안 폰 아르비스. ]

루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계획대로였다. 그러나 경비대장의 다음 한마디가 그의 안면 근육을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 매우 긴박한 첩보입니다. 황실의 감시 세력이자 엘리드 남작의 직속 암살조가 이미 우리 아르비스 영지의 남쪽 경계선을 넘어 잠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집무실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루안은 허공에 떠 있는 입학 허가서를 빤히 응시했다. 은퇴를 향한 그의 첫걸음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국의 거대한 음모가 먼저 그의 발목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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