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셨군, 아르비스 영지의 천재 도련님."
휠체어 바퀴가 차가운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낮게 울렸다.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엘리드 남작의 얄팍한 두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비웃음이 귓가를 끈적하게 파고들었다.
수백 미터 아래의 지하 제단. 사방을 메운 푸르스름한 안개 너머로 붉은 안광 수십 개가 일제히 번뜩였다. 살갗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살기가 사방에서 조여들었다. 사냥개 문양을 칠흑 같은 가죽 갑옷에 새긴 초정예 암살단이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긴장감이 제단 전체를 짓눌렀다. 아델린의 손이 검자루를 꽉 쥐었다. 가죽 장갑이 쓸리는 거친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파문을 일으켰다.
"루안 님, 제 뒤로 서십시오. 이 쥐새끼들은 제가 전부..."
아델린이 검을 반쯤 뽑아 들며 나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녀의 어깨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휠체어에 앉아 비열하게 웃고 있는 엘리드 남작에게도, 검은 안개 속에서 숨을 죽인 암살자들에게도 향하지 않았다.
내 눈이 닿은 곳은 그들의 등 뒤, 제단의 중심에 우뚝 솟은 거대한 석벽이었다.
'귀찮게 됐네.'
속틀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아르비스 영지의 세금 면제 장부를 조금 주물럭거려서 평생 놀고먹을 은퇴 자금이나 마련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 제국의 남작이라는 인간이 직접 휠체어까지 타고 이 춥고 눅눅한 지하 유적까지 기어 내려와서 나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걸까. 인간적으로 의사소통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세상이었다. 그냥 다들 각자 갈 길 가면 안 되는 걸까.
[경고: 고대 연산 장치 '아덴의 서'를 강제 기동합니다.] [가동률 15%... 22%... 실시간 수명 소모율이 기존 대비 1.5배로 증가합니다.]
가슴 한구석이 화끈거리며 타들어 가는 통증이 회로를 타고 번졌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혀끝으로 꾹 눌러 삼켰다. 지금 피를 쏟으면 저 휠체어 탄 노친네가 기고만장해서 더 떠들어댈 것이 뻔했다.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도 귀찮은데, 비웃음까지 받아줄 여유는 없었다.
"루안 폰 아르비스. 네놈이 아카데미의 세력들을 규합해 제국의 조세 제도를 뒤흔들려 한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았더냐?"
엘리드 남작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앙상하게 마른 목소리를 높였다.
"변방의 비루한 영지를 독립 영토로 만들어 황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그 대담한 반역의 음모! 오늘 이 유적의 붕괴와 함께 네놈의 그 건방진 대가리도 함께 묻힐 것이다. 역사에는 고대 유물의 폭주를 막지 못해 자멸한 가련한 천재로 기록되겠지."
남작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과대망상은 이미 안드로메다를 돌파해 제국 황실의 안위까지 걱정하는 애국 열사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반역은 무슨 얼어 죽을 반역이야. 그냥 세금 좀 덜 내고 조용히 감귤이나 키우면서 살고 싶다니까.'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 인간이 "그 고도의 심리전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하며 더 날뛸 것이 뻔했다. 오해를 해명하는 데 드는 마나와 언어적 에너지는 완벽한 낭비였다.
나는 엘리드 남작의 도발을 완전히 무시한 채, 터벅터벅 제단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루, 루안 님?!"
아델린이 경악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 시야에는 오직 '아덴의 서'가 실시간으로 투사하는 푸른빛의 해독 격자만이 가득했다. 벽화의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흠집과 균열, 그리고 고대 아덴 문자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거대한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해독 진행률 45%... 67%... 89%...] [분석 완료: 고대 아덴 제국 제3기 마도 공학 일지.]
벽화는 단순한 장식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유적이 건설된 진짜 이유를 기록한 거대한 일기장이자 경고문이었다.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던 내 눈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성광석이... 그런 물건이었다고?'
제국 화폐의 기준이자, 모든 마법 장치의 동력원. 그리고 내 깎여 나가는 수명을 채워줄 유일한 생명줄인 성광석.
벽화가 말하는 진실은 제국의 상식과 완벽하게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과거, 세계의 마나가 극도로 포화하여 대지가 스스로를 불태우려던 종말의 시대가 있었다. 마나 폭주로 인해 모든 생명체가 재가 되기 직전, 고대 아덴의 마도사들은 행성의 심장에 거대한 생명 유지 장치들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폭주하는 대지의 마나를 강제로 한 점에 압착하여 안전하게 고형화시켰다.
그것이 바로 성광석이었다.
즉, 성광석은 마력을 지닌 축복의 광물이 아니라, 행성의 파멸을 막기 위해 억지로 묶어둔 '마나 폭주의 안전핀'이었던 셈이다.
'미친놈들.'
나는 제국 황실과 귀족들의 멍청함에 치가 떨렸다. 그 안전핀을 광산에서 미친 듯이 캐내어 화폐로 쓰고, 마법 도구로 가공해 펑펑 소비하고 있었다니. 안전핀을 뽑아 쓸수록, 세상의 마나 균형은 무너지고 결국 이 유적처럼 봉인이 풀린 고대 장치들이 폭주하게 되는 구조였다.
결국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남아 안락한 은퇴를 즐기려면, 제국이 성광석을 마구잡이로 캐내는 짓을 막고 내 영지만큼은 완벽한 마도 차단 구역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은퇴고 뭐고 세상과 함께 동반 자살하는 꼴이 될 터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엘리드 남작의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웅장한 선전포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벽화나 구경하고 있는 내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감히 나를 무시해? 네놈이 아무리 천재라 한들, 이 사방을 포위한 은밀 암살단의 칼날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마법을 캐스팅할 틈조차 주지 않고 네 사지를 토막 내 주마!"
살수들이 검을 고쳐 잡았다. 금속음이 제단을 날카롭게 긁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손가락끝으로 벽화의 가장 거대하게 깨진 조각을 툭툭 건드렸다.
"타오르는 종말의 불씨를 억누르기 위해, 우리는 대지의 뼈를 깎아 안전핀을 심었노라."
나직하게 읊조린 한 구절이 지하 제단의 눅눅한 공기를 통과해 울려 퍼졌다.
순간, 제단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푸른 안개가 기이하게 요동쳤다.
고대 연산 장치가 벽화의 쐐기 문자와 공명하며, 제단 바닥의 마법 회로에 미세한 전류를 흘려보낸 탓이었다. 웅웅거리는 나직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무, 무슨...?"
엘리드 남작의 옆에 서 있던 수석 마법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지팡이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그 발음은... 상고 시대의 순수 마도어...? 게다가 마나의 흐름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아니, 멈춘 게 아니라 저 자의 목소리에 반응해 유적 전체가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저놈이 마법이라도 부렸다는 말이냐!"
엘리드 남작이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쥐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 영창이 없었습니다! 그저... 저 벽화에 새겨진 고대의 금기를 읽었을 뿐인데, 유적의 제어권이 저 자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전설 속의 마도 황제들이나 쓰던 영식 제어법..."
마법사의 목소리에 깃든 공포가 주변의 암살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암살자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사냥개 문양이 새겨진 검들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흔들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그냥 벽에 적힌 글씨 읽은 건데 왜 저렇게 쫄아 있는 거야? 그리고 마도 황제는 무슨... 나 지금 수명 깎여서 가슴 아파 죽겠구만.'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그들의 상상 속 절대자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아델린은 내 등 뒤에서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외감을 넘어선 일종의 신앙심마저 어려 있었다.
"루안 님... 당신은 이미 이 유적의 비극을 알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제국이 성광석이라는 탐욕에 눈이 멀어 세상의 안전핀을 뽑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그 슬픈 진실을, 홀로 짊어지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아델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거대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당신은 아카데미의 예산을 통제하고 제국의 조세 제도에 칼을 대려 하신 것이군요. 세상이 당신을 반역자라 손가락질할지라도, 오직 구세를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시며..."
'아니야, 제발 그만해. 나 그냥 세금 떼먹고 편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피가 방해를 했다. 아덴의 서를 무리하게 가동한 반동이 기어코 터져 나온 것이다.
"콜록!"
가벼운 기침과 함께, 내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차가운 돌바닥 위로 붉은 핏방울이 툭, 툭 떨어지며 얼룩을 남겼다.
그 순간, 제단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루안 님!"
아델린이 비명을 지르듯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손을 살짝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피를 닦아낼 기력조차 아까웠기에, 그저 무심하게 입가를 소매로 쓸어내렸다.
피 묻은 소매와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그 어떤 순간보다 고요하고 깊게 번뜩였다.
암살단원 중 몇 명이 침을 크게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눈에는 지금 내 모습이, 거대한 고대의 금기를 해독하느라 육체적 반동을 겪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절대적인 괴물로 보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괴, 괴물 같은 놈..."
엘리드 남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오만한 미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피를 흘리면서도 저런 기세를 유지하다니... 네놈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냐? 내 음모마저 네놈의 장단 위에서 춤추는 인형극에 불과했다는 말이냐!"
남작의 목소리가 광기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치밀한 계획이 고작 아카데미의 학생 한 명에게 손쉽게 간파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유유자적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말을 하기가 귀찮아 지은 썩은 미소였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비웃는 천재의 여유로 비쳤으리라.
"남작님."
내가 입을 열자, 사방의 살수들이 움찔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그릇보다 큰 힘을 탐하는 자는, 결국 그 힘에 깔려 죽기 마련입니다. 이 유적도, 당신의 그 얄팍한 야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목소리는 차분했고, 단호했다. 은퇴 후의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경고였다.
하지만 엘리드 남작에게 그 말은 최후의 사형 선고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서며 완전히 이성을 잃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당장 저놈의 주둥이를 찢어버려라!"
남작이 휠체어 팔걸이를 두드리며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제국의 숨통을 쥐려는 저 위험한 반역자를 당장 죽여라! 독침이든, 마법이든 상관없다! 저놈의 심장을 꿰뚫어라!"
남작의 표효와 함께, 사방의 어둠 속에서 억눌려 있던 살기가 폭발했다.
쉬익-!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제단을 가득 메웠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수십 자루의 추적 검과 독을 바른 투척 단검들이 오직 하나의 표적, 나의 심장을 향해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사방이 죽음의 궤적으로 가득 차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