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빛으로 물든 빗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코끝을 찌르는 비린내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저가 허공을 갈랐다. 피를 머금고 기괴하게 울부짖는 고대의 마검이 내 목덜미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그 찰나의 순간. 그의 눈에 서린 광기는 이미 이성이 완전히 타버린 잿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죽어라, 루안 폰 아르비스! 네놈만 없었어도 내 가문은, 나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폭음 속에서도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렇게 무식하게 마력을 폭주시키며 달려드는 미치광이를 상대로 굳이 내 아까운 수명을 깎아 가며 마법 보호막을 펼칠 필요가 있을까?
머릿속에서 가성비 계산기가 요란하게 굴러갔다.
'보호막 전개 시 소모 수명 최소 사흘. 게다가 성광석 정제 비용까지 생각하면 손해가 막심하다.'
은퇴 자금의 마지노선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내 영혼을 때렸다. 나는 율리우스의 광기 어린 얼굴 대신, 내 시야 오른쪽 구석에서 맹렬하게 깜빡이는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대 연산 장치 '아덴의 서' 기동.] [구역 내 고대 통제 프로토콜 감지.] [수천 년 전 전설기 봉인 보초 제어 장치 '아에테르의 파수꾼' 역해킹을 시도합니다.] [소모 수명: 12시간 (성광석 0.1개 분량으로 대체 가능)]
싸구려 여관 한 달 숙박비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이거다. 가성비의 극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즉시 정신적 동의 버튼을 눌렀다.
"루안 님! 피하셔야 합니다!"
아델린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은빛 갑옷이 빗물에 젖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검끝만큼은 흔들림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해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발을 내딛기도 전에, 내 손가락이 가볍게 허공을 튕겼다.
탁.
경쾌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내 발밑의 고대 석판들이 기괴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푸른빛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진동은 이윽고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지진으로 변모했다.
"무, 무슨...?"
돌진하던 율리우스의 신형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카이저 가문의 정예 사설 기사단 역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들의 발밑에서, 수천 년간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그림자들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구구구궁!
유적의 벽면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쩍쩍 갈라졌다. 그 틈새로 흘러나온 것은 정교한 은빛 룬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석상들이었다. 높이만 해도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이는 고대의 수호 석상 네 기가 육중한 안광을 번뜩이며 일어섰다.
"고대 수호자...? 어째서 이것들이 기동하는 거지? 작동 열쇠는 우리가 파괴했을 텐데!"
기사단장 중 한 명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리라. 유적의 제어권을 쥐기 위해서는 황실에서 공인한 복잡한 의식과 정제된 마력석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시스템 자체의 관리자 권한을 탈취하는 사기적인 연산 장치 '아덴의 서'가 있었다.
나는 그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턱끝으로 율리우스 일당을 가리켰다.
"쓸어버려."
나지막한 혼잣말 같은 명령이었으나, 고대의 거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의 계시와도 같았다.
쿠웅!
가장 거대한 석상이 들고 있던 거대한 석조 대검을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엄청난 질량의 낙하와 함께 거센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었다. 일직선으로 몰아치던 진홍빛 마력의 궤적은 그 단 한 번의 격돌로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커흑?!"
율리우스는 검을 맞부딪치기도 전에 가해진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에 밀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자랑하던 정예 기사단 역시 낙엽처럼 쓸려나가 벽면에 처박혔다. 수호 석상들은 자비가 없었다. 거대한 석조 손가락들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앉자, 기사들의 사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정없이 짓눌러 바닥에 고정해 버렸다.
"아악! 내, 내 다리가...!"
"비켜라! 이 괴물 놈들아!"
처절한 비명과 쇠가 부딪치는 소음이 사방을 메웠다.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저항해 보았지만, 신화 시대의 합금과 마법 장벽으로 둘러싸인 석상들의 표면에는 자그마한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발버둥은 석상의 압박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단 몇 초 만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직접 칼을 겨누고 땀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손가락 하나 까딱한 것으로, 가문의 명운을 건 복수극은 한 편의 코미디로 전락했다.
나는 흙바닥에 보기 좋게 처박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율리우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고대 마검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진흙탕 속에 처박혀 있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율리우스가 피를 토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형언할 수 없는 극치의 공포였다.
"어떻게... 어떻게 고대 신들의 보초를 산책하는 개마냥 부리는 거지? 네놈의 정체가 대체 뭐냐? 황실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반역의 수괴가 바로 너였단 말이냐!"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제국을 집어삼키다니. 나처럼 평화와 안락함을 사랑하는 소시민이 어디 있다고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한단 말인가. 내 목표는 그저 조용한 영지에서 따뜻한 코코아나 마시며 은퇴 생활을 즐기는 것뿐이다.
"율리우스 님."
나는 최대한 귀찮음을 숨긴 채, 나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시야란 참으로 좁은 법입니다. 눈앞의 권력과 가문의 안위밖에 보지 못하니, 그 너머에 있는 진짜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실제로는 '너 같은 녀석이랑 말 섞는 시간조차 아덴의 서 연산 수명이 아깝다'는 뜻이었지만, 내 고결한(?) 목소리 톤 덕분에 율리우스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거대한 흐름...? 설마, 처음부터 카이저 가문의 몰락뿐만 아니라... 제국의 재정 구도를 통째로 재편하기 위해 이 유적을..."
"생각은 자유입니다만, 제 갈 길을 방해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가볍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내 뒤를 따르던 아델린의 눈빛은 이미 깊은 감동과 숭배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율리우스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검을 칼집에 꽂았다.
"카이저 가문의 공자여. 루안 님의 혜안은 이미 제국의 썩어빠진 근간을 향해 계십니다. 당신 같은 속물이 감히 그분의 원대한 구세를 위한 공작을 가로막으려 들다니, 참으로 가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아델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조차 없었다.
"루안 님은 스스로 피를 흘려 가며 제국을 치료하려는 고독한 선각자이십니다. 당신들의 그 알량한 욕심으로 그분의 발목을 잡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델린. 나 진짜 그냥 은퇴하고 싶은 것뿐이라니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왜 고대 석상을 부렸는지부터 시작해서 귀찮은 설명이 줄을 이을 게 뻔했다. 나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유적의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침묵이야말로 오해를 가장 빠르게 증폭시키는 촉매제이지만, 동시에 가장 에너지를 적게 쓰는 방어 기제였다.
율리우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내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고대 신들의 군대마저 수하로 부리는 자가... 제국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이건 재앙이다. 황실이, 제국 전체가 그에게 속고 있었어...!"
그의 처절한 독백이 빗소리에 묻혀 멀어져 갔다.
그 순간, 대지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이번에는 석상들의 기동 여파가 아니었다.
쿠구구궁!
"루안 님, 바닥이...!"
아델린이 급히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리가 딛고 서 있던 고대 석판들이 거대한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아래로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석상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스템을 역해킹한 여파로, 유적의 심층부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격인 하강 장치가 강제로 작동해 버린 모양이었다.
"어라."
내 멍청한 감탄사와 함께, 발밑의 대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꺄악!"
아델린의 짧은 비명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은 수백 미터 아래의 어둠 속으로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꼈겠지만, 내 눈앞에는 이미 '아덴의 서'가 친절하게 무중력 낙하 마법을 연산해 띄워두고 있었다.
[경로 분석 완료. 하강 속도 조절 마법 '그라비티 컨트롤'을 전개합니다.] [마나 소모 최소화 모드 가동. 수명 소모 없음.]
공짜는 언제나 환영이다.
스스스스.
우리 몸 주변으로 은은한 청백색의 마력 막이 형성되더니,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떠돌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머리칼을 사정없이 흔들었지만, 추락의 공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옆을 바라보니, 아델린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내 소맷자락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꾹 다문 입술이 보였다. 평소에는 철혈의 기사처럼 굴더니, 이럴 때는 영락없는 제 나이대의 소녀 같았다.
"아델린, 눈 떠도 괜찮습니다."
내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한쪽 눈을 떴다. 사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청백색 마력의 입자들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무중력 하강 마법이옵니까? 영창도 없이, 이 정도 규모의 고위 마법을 이토록 정교하게..."
"그저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 늦춘 것뿐입니다."
"아닙니다! 마력의 흐름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역시 루안 님이십니다. 이 차가운 유적의 심연마저 당신의 의지대로 춤추게 만드시는군요."
그녀의 눈에 다시 한번 맹목적인 신뢰가 들어찼다. 나는 그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심층 코어 방의 바닥은 기묘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 거대한 제단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중앙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진 석판이 놓여 있었다.
사냥개 문양.
'아덴의 서'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낸 정보가 내 시야에 붉은 글씨로 떠올랐다.
[식별 완료: 제국 남부 귀족 연합의 배후 세력, '엘리드 남작'의 사설 문양.] [경고: 해당 문양에는 고대 유적의 봉인을 강제로 파괴하기 위한 마도 폭탄의 제어 영식이 심어져 있습니다.]
내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엘리드 남작. 아르비스 영지의 세금 면제 조항을 빌미로 나를 반역자로 몰아세우려던 그 졸렬한 정치가 놈의 하수인이 이미 여기까지 손을 뻗쳐 두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유적의 봉인을 깨뜨려 대재앙을 일으키고, 그 책임을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음모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사뿐.
우리의 발이 마침내 지하 제단의 차가운 대지에 닿았다.
무중력 보호막이 걷히자,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짙은 안개가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밀려들었다.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직 우리의 발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스스스스-.
그때, 안개 너머 어둠 속에서 기이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살인 기술만을 훈련받은, 제국 최고의 암살 부대가 뿜어내는 숨 막히는 살기였다.
안개가 천천히 걷히며, 그들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개 문양이 새겨진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초정예 은밀 암살단.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드디어 오셨군, 아르비스 영지의 천재 도련님."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뱀처럼 낮고 집요하게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