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드 남작이 최후의 독점 신호를 내리며, 어둠 속의 추적 검 수십 자루가 일제히 루안의 심장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칠흑 같은 허공을 가르는 서슬 퍼런 쇠붙이의 비명이 지하 전당의 침묵을 산산조각 냈다. 은밀하게 도포된 맹독의 비린내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영창을 시작하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아, 저거 피하면 옷 찢어지는데. 새로 맞춘 지 얼마 안 된 아카데미 제복이란 말이다. 세탁비는 둘째 치고 수선비가 더 나와.’
귀차니즘이 내 전신을 지배하는 사이,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내 안구 뒤편에서 차갑게동작하는 고대 연산 장치, ‘아덴의 서’가 기동한 탓이었다.
머릿속에서 1초에 수만 번씩 돌아가는 가상의 톱니바퀴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 연산 장치가 돌아갈 때마다 느껴지는 영혼이 통째로 깎여 나가는 듯한 감각은 언제 겪어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콧속이 찡해지더니 철 비린내가 훅 끼쳤다. 또 피가 솟구치려는 징조였다. 성광석을 제때 먹어 치우지 않으면 조만간 정말로 저승길 편도 티켓을 끊을지도 모른다.
“후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발치에 쓰러져 기절해 있던 암살단원의 목덜미를 구둣발로 툭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녀석의 가죽 방어구 어깨 부분이 찢어지며 뒤집혔다.
그곳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색 인장. 맹렬하게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의 머리 문양이었다.
내 눈이 가늘어졌다. 저 사냥개 문양. 엘리드 남작이 고대 유적의 봉인 제어 장치에 새겨놓았던, 제국 황실 유물 훼손 사건의 결정적 배후임을 입증하는 바로 그 반역의 낙인이었다. 아주 멍청하게도 자기 부하들 어깨에도 똑같이 새겨놓았을 줄이야. 하긴, 비밀 결사라는 놈들은 꼭 이런 쓸데없는 표식을 남기고 싶어 하더군. 동질감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지.
아덴의 서가 이 문양을 포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수식을 고쳐 쓰기 시작했다.
[시스템: ‘사냥개’ 동기화 연성 신호 감지.] [시스템: 역전 마법 주파수 분석 완료. 오차 범위 0.001%.]
이 암살단 무리는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작의 마력 신호와 이 사냥개 인장을 매개로 한 거대한 ‘군집 마법 제어 네트워크’로 묶여 있었다. 그 말은 즉, 메인 서버의 허점을 찌르면 클라이언트 전체를 통째로 먹통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손끝에 아주 가느다란 마나 실타래를 얹었다. 연산된 역전 주파수를 실어 보낼 매개체만 있으면 끝이었다.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짤랑이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느껴졌다. 제국 표준 구리 동전이었다.
‘……아니, 동전도 아깝다. 내 피 같은 용돈을 이런 놈들한테 던질 수는 없지.’
가성비는 내 은퇴 계획의 핵심 가치였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빼고, 발밑에 굴러다니는, 아까 부서진 석상의 아주 조그마한 돌멩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 정도 크기면 딱 좋았다. 공짜니까.
“아델린. 잠시 귀를 막는 게 좋을 겁니다.”
“예? 루안 님, 그게 무슨……!”
아델린이 검을 치켜세우며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내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손가락 끝에서 튕겨 나간 돌멩이는 정확히 기절한 암살단원의 어깨에 새겨진 사냥개 문양에 내리꽂혔다.
톡.
아주 가벼운 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돌멩이에 실린 역전 마법 주파수가 사냥개 문양의 마력 흐름을 정반대로 뒤틀어 버렸다.
이 암살단원들의 몸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그들의 체내 마력을 하나로 묶어 증폭시키는 ‘신호 연성체 장치’였다. 그런데 그 장치에 정반대의 극성을 가진 주파수가 주입된다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과부하다. 그것도 아주 화끈하고 파괴적인 종류의 과부하.
“어, 어라? 마력이……!”
“내 몸이 왜 이래! 마력이 거꾸로 흐른다! 끄아아악!”
나를 향해 쏟아지던 수십 자루의 추적 검들이 허공에서 맥없이 툭툭 떨어졌다. 검을 조종하던 암살단원들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불꽃이 치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체내에 흐르던 마력이 갑작스러운 신호 역전으로 인해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쿠우우웅-!
고대 유적의 지하 전당이 굉음과 함께 크게 뒤흔들렸다. 사방에서 푸른 마력의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암살단원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동력원의 폭주에 휘말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날아가 단단한 대리석 벽에 처박혔다.
콰아아앙! 퍼엉!
단 한 번의 마법 영창도 없이, 손가락 끝으로 고작 길거리 돌멩이 하나를 튕겼을 뿐인데 수십 명의 정예 암살 부대가 단숨에 자멸해 버렸다.
자욱한 먼지와 차가운 마력의 연기가 제단을 가득 메웠다. 그 너머로 수십 명의 살수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 신음하는 소리만 나직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쿨럭! 컥……!”
아, 역시 무리했다. 아무리 아덴의 서가 연산을 대신해 주었다지만, 내 부실한 시한부 육체에는 1서클 마법의 반동조차 과부하를 준다. 입안 가득 고이는 비릿한 피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후두둑 쏟아냈다. 창백한 대리석 바닥 위에 붉은 혈꽃이 선명하게 피어났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매로 대충 입가를 슥 문질렀다. 피를 닦아내는 기력조차 아까웠고, 무엇보다 빨리 이 귀찮은 상황을 끝내고 기숙사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루안 님.”
옆에서 아델린이 숨을 흡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경악과 숭배,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으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또 시작이군.’
그녀의 머릿속에서 내가 또 어떤 ‘고결한 순교자’로 격상되고 있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가면서까지…… 제국의 평화를 방해하는 사냥개들을 단숨에 처리하시다니요. 단 한 명의 무고한 희생도 없이, 저들의 힘을 역이용해 자멸하게 만들다니. 이 얼마나 자비롭고도 무시무시한 지략입니까.”
아델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손에 쥐인 검끝이 감동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냥 내 세탁비랑 성광석 아끼려고 그런 건데. 그리고 쟤들 무고하지 않아. 날 죽이려고 칼 던졌잖아. 자비는 무슨 자비야.’
변명하고 싶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 자체가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 입을 열면 피가 더 나올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저 차가운 먼지 연기 속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휠체어에 앉아 부르르 떨고 있는 엘리드 남작을 향해 고요히 한 걸음 걸어 나갔다.
내 구두 굽 소리가 유적의 침묵 속에 탁, 탁, 무겁게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내 정예 살수들이, 황실마저 벌벌 떨게 하던 내 사냥개들이 고작 돌멩이 하나에……!”
엘리드 남작의 안색은 이미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휠체어 손잡이를 부술 듯이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네놈, 정체가 뭐냐! 아르비스 영지의 보잘것없는 병약한 도련님 따위가 어떻게 내 완벽한 음모를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거지? 유적의 봉인 장치에 새겨진 내 사냥개 문양을 보고 배후를 확신한 것도 모자라, 그 마력 코드까지 해독해 내다니!”
남작이 광기에 젖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유적 높은 천장에 부딪혀 기괴하게 울렸다.
“그렇다! 제국의 황실 유물을 훼손하고, 아카데미의 성광석 유통망을 마비시켜 반역의 기틀을 다지려 한 것은 바로 나다! 하지만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 네놈 뒤에 제국 재무부나 황실 암부라도 숨어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완벽하게 내 숨통을 조여올 리가 없어!”
“남작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창한 배후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고향에서 조용히 은퇴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 안락한 삶을 방해하는 귀찮은 먼지들을 조금 털어낸 것에 불과하죠.”
“은퇴? 먼지?!”
남작의 눈이 뒤집혔다. 그의 눈에는 내 진심 어린 대답이, 자신들의 목숨을 건 대업을 고작 ‘먼지 털기’ 수준으로 치부하는 절대자의 오만과 멸시로 들렸을 것이다.
사실 나는 정말로 은퇴하고 싶을 뿐이다. 아르비스 영지에서 따뜻한 차나 마시면서 고양이 마사지나 해주는 삶. 그 소박한 꿈을 위해 성광석을 모으고 예산을 짰을 뿐인데, 왜 다들 나를 제국을 정복하려는 혁명가로 만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으으으…… 아르비스! 네놈이 정녕 나를 이 황무지 지하 유적에 묻어버릴 작정이구나! 하지만 나도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는다!”
남작이 품속에서 시커먼 가죽으로 감싸인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 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하 전당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강하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검신 전체에 기분 나쁜 붉은 광채가 혈관처럼 흐르고 있었고, 검자루에는 인간의 갈비뼈를 연상케 하는 기괴한 장식이 돋아나 있었다.
마검 ‘라그나’. 사용자의 영혼과 생명력을 채찍 삼아 불타는 사악한 마기를 내뿜는, 전설 속의 금기된 무기였다.
“루안 님! 조심하십시오! 저 검은 흡혈과 저주로 얼룩진 마검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깎아 파괴적인 마력을 발현하는 자폭용 무기입니다!”
아델린이 다급하게 경고하며 내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전례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엘리드 남작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의 눈동자가 탁한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마검 라그나가 그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검의 진동이 지하 유적의 벽면을 타고 조율되지 않은 불협화음처럼 퍼져 나갔다.
“크하하하! 주거라, 루안 폰 아르비스! 내 영혼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너만은 반드시 이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함께 끌고 가겠다!”
남작이 소리치며 마검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의 영혼을 채찍 삼아 채워진 불타는 사악한 마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검붉은 안개가 제단을 집어삼키며, 유적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우리를 덮쳤다.
아델린마저 그 압도적인 저주의 기운에 짓눌려 신음을 내뱉으며 무릎을 꿇으려 할 때, 마검의 붉은 날끝이 나와 아델린을 아연실색하게 만들 일격을 감행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검붉은 폭풍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델린은 이를 악물며 검을 치켜세웠지만, 마검 라그나가 뿜어내는 저주받은 마기는 그녀의 성스러운 신성력마저 검게 그을려 버릴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정면으로 마주한 파괴의 힘 앞에서, 아무리 강인한 천재 기사라 한들 본능적인 공포를 완전히 지우기는 힘든 법이었다.
‘아, 진짜 귀찮게 구네.’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혀를 찼다. 저 엄청난 에너지가 이 제단에 그대로 작렬한다면, 내가 미래의 아늑한 은퇴용 별장으로 찜해둔 이 고대 유적의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 터였다. 게다가 아델린이 저 일격을 몸으로 받아내기라도 한다면, 평생 나를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며 졸졸 따라다닐 게 뻔했다. 어느 쪽이든 내 안락하고 고요한 은퇴 생활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아덴의 서, 작동.’
머릿속에서 차가운 기계음이 고막을 두드림과 동시에, 내 남은 수명이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내리는 감각이 전신을 엄습했다.
[시스템: 마검 ‘라그나’의 마력 방출 궤적 분석 중…….] [시스템: 연산 완료. 소모 수명: 7일.]
일주일이라니. 이 빌어먹을 장치는 내 목숨을 아주 헐값으로 취급하는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시한부인 인생에서 일주일은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품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지난번 율리우스에게서 뜯어낸 정제 성광석 조각 하나를 꺼내 손바닥 안에서 바스러뜨렸다.
스우우우.
순수한 마력이 손바닥의 모공을 통해 체내로 스며들며 깎여 나가던 생명력이 간신히 채워졌다. 가슴을 옥죄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목구멍 끝까지 뜨거운 액체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델린.”
나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조용히 내리눌렀다.
“예, 예? 루안 님, 위험합니다! 어서 제 뒤로……!”
“검을 비스듬히 15도 각도로 눕히세요. 힘을 빼고, 그저 받아치기만 하는 겁니다.”
“네……?”
아델린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검날 옆면을 내 검끝으로 가볍게 톡, 하고 건드렸다. 아덴의 서가 계산해 낸 완벽한 물리적, 마법적 역학의 교차점이었다.
치이이이익-!
남작이 내리친 마검의 붉은 검기가 아델린의 검날에 닿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 폭주하던 검붉은 폭풍이, 마치 매끄러운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아델린의 검날을 타고 비껴나가 옆벽을 향해 굴절된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제단의 옆면 벽이 거대하게 폭발하며 돌가루와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만큼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태풍의 눈처럼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쿨럭……! 컥, 으윽…….”
붉은 검기를 비껴내느라 체내의 마나 통로가 일시적으로 꼬인 모양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거칠게 피를 토해냈다. 이번에는 조금 양이 많았다.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가 먼지 쌓인 바닥을 적셨다.
“루안 님!”
아델린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부축했다. 그녀의 두 손이 눈에 띄게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검의 그 무시무시한 반동을…… 오직 기공과 검끝의 미세한 흐름만으로 전부 흘려보내신 겁니까? 제 검을 매개로 저를 보호하시면서, 그 모든 저주를 혼자서 감내하신 거군요……!”
그녀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마검의 저주를 몸으로 받아내며 자신을 구원한 고결한 영웅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실은 그냥 내 제복에 먼지 묻는 게 싫어서 가장 효율적인 각도로 흘려보낸 것뿐인데. 그리고 피를 토한 건 내가 원래 시한부라 그런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구구절절 해명하는 것은 오히려 에너지만 낭비하는 꼴이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것보다, 상황이 좀 이상하군요.”
나는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찌푸린 눈으로 폭발이 일어난 옆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남작의 마검 일격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산산조각 난 고대의 석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석판 너머에서, 기분 나쁜 보랏빛 액체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헉…… 컥…… 어떻게…… 어떻게 내 라그나의 일격을 저런 하찮은 초식으로…….”
엘리드 남작은 마검을 쥔 채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고 있었다. 검에 영혼을 너무 많이 빼앗긴 탓인지, 그의 피부는 이미 검푸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박살 난 벽면 너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남작의 눈동자가 공포로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저, 저것은…… 설마 이 유적의 진짜 ‘심장’인 마도 핵의 봉인 인터페이스인가? 안 돼…… 내 피와 부하들의 마력이 흘러들어가서……!”
그의 말대로였다. 자멸한 암살단원들의 피와, 방금 전 남작이 마검을 휘두르며 흩뿌린 검은 마력의 찌꺼기들이 바닥의 홈을 타고 흘러 들어가, 박살 난 석판 내부의 거대한 보랏빛 결정체로 흡수되고 있었다.
위우우우우웅-!
유적 깊은 곳에서부터, 대지를 뒤흔드는 불길한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덴의 서가 내 시야에 붉은색 경고 창을 미친 듯이 띄워 올렸다.
[시스템: 경고. 고대 정화 장치 ‘네메시스’의 폭주 프로토콜이 가동되었습니다.] [시스템: 제단 내부의 생명체 반응을 ‘바이러스’로 규정. 3분 뒤 유적 전체를 소멸시키는 자폭 마법이 실행됩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내 은퇴 자금이자 평화로운 보금자리가 될 예정이었던 이 유적이, 고작 3분 뒤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단다. 그것도 내 목숨과 함께.
“하하…… 하하하! 결국 다 같이 죽는 것이로구나! 네놈이 아무리 천재라 한들, 고작 아카데미 학생의 몸으로 이 고대의 폭주를 막을 수는 없을 터!”
남작이 피를 토하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왜 내 은퇴 길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걸까. 나는 품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성광석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랏빛으로 발광하는 마도 핵을 지시했다.
“아델린. 제국에서 가장 빠른 퇴로 확보 마법이 뭔지 아십니까?”
“예? 그, 그건 잘…….”
“지금부터 보여드리죠. 다만, 이번에는 피가 좀 많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아덴의 서의 연산 한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과 함께, 내 남은 수명이 무서운 속도로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