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뺨을 때리는 빗줄기가 매서웠다. 무너진 중앙 도서관의 아치형 천장 사이로 차가운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 위로 붉은 황실 문양이 새겨진 철갑 구두가 거칠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철컥, 철컥, 철컥!

쇠사슬이 부딪치는 불길한 마찰음이 사방을 메웠다. 청동 구속구를 치켜든 기사들의 안광이 투구 틈새로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들의 중심에 선 사내, 엘리드 남작의 최측근이자 계엄군 지휘관인 바르토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황실의 명령이다. 중앙 도서관의 고대 성물을 고의로 폭주시키고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반역 혐의로, 이곳에 있는 전원을 체포한다. 저항하는 자는 즉시 사살하라!"

사살 목적의 기습 계엄령.

귀를 찢는 천둥소리가 머리 위를 때렸다. 빗물이 옷깃을 타고 흘러내려 등줄기를 싸늘하게 적셨다.

'아, 진짜 퇴근하고 싶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도서관의 성물을 흡수해 수명을 2년 남짓으로 겨우 늘려놓았더니, 이번에는 황실 군대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겨우 늘어난 수명이 이 귀찮은 녀석들과 싸우느라 다시 깎여 나갈 것을 생각하니 명치 부근이 욱신거렸다. 은퇴의 길은 어째서 매 순간 이렇게 가성비가 맞지 않는단 말인가.

"루안 님."

내 등 뒤에서 아델린이 검자루를 움켜쥐며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길을 열겠습니다. 루안 님의 그 고결한 뜻이 이런 썩어빠진 권력의 개들에게 무릎 꿇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아델린."

나는 귀찮음을 담아 그녀의 말을 잘랐다.

"힘 빼지 마라. 굳이 저 무식한 철갑덩어리들과 몸을 부딪칠 필요는 없다."

"예? 하지만 저들은 사살 명령을 받고 온 자들입니다. 포위망이 좁혀지면 아무리 루안 님이시라 해도……."

"지켜봐라. 제국의 법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하게 움직이는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심상 속에 잠들어 있던 '아덴의 서'를 호출했다.

웅-.

뇌리를 울리는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내 시야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 홀로그램 연산창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연산 장치 '아덴의 서' 가동을 시작합니다.] [실시간 수명 소모율: 초당 0.005일] [보유 성광석 잔량: 205개 (생명력 환산 대기 중)]

지독한 연산 장치 놈. 켜는 순간부터 내 수명을 실시간으로 갉아먹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운 성광석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가장 빠른 탈출 경로를 찾아내야만 했다. 적들과 직접 칼을 섞는 육체적 노동은 내 은퇴 계획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변 지형 및 적 병력 배치 시뮬레이션을 실행합니다.] [황실 계엄군 보병: 42명, 마도 기사: 8명, 마력 탐지견: 4마리.] [강수량 및 풍향을 고려한 최적의 야간 기동 경로를 탐색합니다.]

아덴의 서가 빗방울의 낙하 궤적과 바람의 흐름, 그리고 기사들이 뿜어내는 마력의 파동을 3차원 입체 좌표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가느다란 파란색 이동 선이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갔다.

"나를 따라와라. 발소리는 3초 주기로 떨어지는 천둥소리에 맞춰라."

"……네?"

아델린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덴의 서가 지시한 대로 첫발을 내디뎠다.

쾅-!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나와 아델린의 발걸음이 동시에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움직이는 궤적은 기사들의 시선이 교차하는 사각지대만을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고개를 돌리는 찰나의 타이밍, 빗방울이 가려주는 시야의 왜곡 현상, 심지어 마력 탐지견들이 빗물 냄새 때문에 코를 킁킁거리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경로였다.

"어? 분명 이쪽에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는데……!"

한 기사가 우리 바로 옆 3미터 거리를 스쳐 지나가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는 빗줄기 속에서 유령처럼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우리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델린은 내 뒤를 따르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계엄군의 포위망을 마치 제 집 앞마당을 거니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나가고 계셔. 게다가 이 폭우와 천둥소리마저 완전히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통제하시는 듯한 이 걸음걸이는……!'

아델린의 눈에 어린 존경심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녀는 루안이 이미 계엄군이 들이닥칠 시간과 날씨, 그리고 그들의 순찰 경로까지 전부 예측하고 완벽한 탈출 시나리오를 짜두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저 1초라도 빨리 이 축축한 빗속을 벗어나 따뜻한 기숙사 침대에 눕고 싶을 뿐이었다.

"거의 다 빠져나왔군."

나는 도서관 서쪽 벽면의 낡은 배수구 뒤편에 몸을 숨겼다. 이곳은 아덴의 서가 찾아낸 완벽한 감시의 사각지대였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아카데미 전체의 마력 공급을 담당하는 연동 마도 배전반이 빗물에 젖은 채 철창 너머로 보였다.

"루안 님, 여기는 마력 공급처 아닙니까? 포위망을 뚫으려면 어서 외곽으로……."

"아델린, 제국 놈들이 가장 신뢰하는 게 뭔지 아나?"

나는 품속에서 낡은 가죽 장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빗물에 젖어 잉크가 약간 번졌지만, 그 안에 적힌 암호화된 유통망 결제 내역과 마력 회선 번호들은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지난번 암시장 브로커에게 입수했던, 율리우스가 관리하는 유령 유통망의 통제 장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맹신하지. 특히 율리우스가 뒤로 빼돌리던 이 유령 유통망의 비밀 회선은, 황실 계엄군마저 아카데미의 정상적인 보안 회선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아……!"

아델린이 짧은 탄성을 질렀다.

이 장부는 단순한 비자금 영수증이 아니었다. 율리우스가 가문의 힘을 빌려 아카데미 내부의 방어 결계와 마력 신호를 임의로 조작하기 위해 심어놓은 '백도어(Backdoor)'의 마스터키였다.

나는 아덴의 서를 통해 장부에 적힌 암호 코드를 분석했다.

[율리우스 유령 유통망의 마력 배동 신호 제어권을 획득합니다.] [아카데미 외곽 방어 결계의 피아식별 주파수를 강제로 변조합니다.] [대상: 계엄군 선발대의 마력 신호 -> '반혁명군 사설 마법사'로 오인 등록.]

내 손가락이 배전반의 낡은 다이얼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아덴의 서가 연산한 미세한 이종 마력이 회선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삐이이이-!

순간, 아카데미 외곽을 두르고 있던 거대한 방어 결계가 붉은색 경고등을 뿜어내며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결계의 제어 장치가 완전히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무, 무슨 일이지?!"

저 멀리서 계엄군 지휘관 바르토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보음이다! 결계가 침입자를 감지했다! 좌표는…… 동쪽 숲속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리킨 동쪽 숲속은, 다름 아닌 엘리드 남작의 사설 수색대가 숨어 있는 곳이었다. 아덴의 서가 피아식별 신호를 비틀어버린 탓에, 결계는 정당한 황실 계엄군인 남작의 가신들을 '반역 세력의 습격조'로 인식해 버린 것이다.

쿠구구구둥!

결계에서 뿜어져 나온 파란색 마도 탄환들이 동쪽 숲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적습이다! 반역자 놈들의 매복이다!"

"황실의 이름으로, 저 불순분자들을 즉시 섬멸하라!"

어둠 속에서 황실 계엄군과 엘리드 남작의 사설 부대가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빗속에서 마력의 섬광이 번쩍이고, 철과 철이 부딪치는 귀를 찢는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찌르고 베는 대상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조차 꿈에도 모른 채, 빗속에서 처절한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황실 계엄군이 자랑하던 철통같은 포위망은, 단 한 번의 조작으로 거대한 자멸의 소용돌이로 변해버렸다.

"세상에……."

아델린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저들의 거대한 군세를 서로 맞붙여 무력화시키시다니……. 율리우스의 장부를 이 타이밍에 이렇게 활용하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루안 님은 정말로…… 모든 것을 내다보고 계셨던 거군요."

"말했지 않나. 가성비가 중요하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배전반 앞에서 돌아섰다.

"저들이 서로 신나게 칼싸움을 벌이는 동안, 우리는 유적으로 간다. 지금이 가장 조용할 때니까."

단 한 방울의 가성비 쓸데없는 피도 흘리지 않는다. 내 육체적 노동력은 물론이고, 쓸데없는 마력 소모 마찰조차 최소화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아웃사이더의 생존 공식이었다.

우리는 요란한 비명과 폭음이 울려 퍼지는 도서관 공터를 뒤로하고, 유적 입구를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빗방울이 사방에서 쏟아졌지만, 아덴의 서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주는 최적의 바람길을 따라 걷는 덕분에 내 옷자락은 기이할 정도로 덜 젖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최소화하려 해도, 고도의 연산 장치를 장시간 가동한 대가는 내 시한부 육체에 고스란히 쌓이고 있었다.

"흡……!"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틈새로 붉은 선혈이 울컥 흘러내려 빗물과 섞였다.

툭, 투둑.

바닥의 진흙탕 위로 내 핏방울이 떨어져 붉게 번졌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반동이었다. 지독한 가성비의 대가.

"루, 루안 님?!"

아델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은 슬픔과 경외감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또 피를……! 아덴의 서를 가동하여 제국의 마력망을 뒤흔드는 대가가 이토록 가혹한 것입니까? 어째서 매번 자신을 이토록 깎아가며 세상을 구하려 하시는 겁니까!"

나는 입가 묻은 피를 거칠게 훔쳐내며 혀를 찼다.

"별것 아니다. 먼지가 좀 들어가서 기침을 했을 뿐이다. 신경 쓸 거 없다."

"거짓말 마십시오! 그 고통을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제국의 모순을 파헤치고 율리우스의 파멸을 이끄는 과정에서, 루안 님이 짊어진 마법적 반동이 육체를 갉아먹고 있는 것을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아델린은 내 퉁명스러운 해명을 '고결한 영웅의 눈물겨운 침묵'으로 완벽하게 필터링하여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루안 님의 그 고결한 침묵이 저를 더욱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약속하겠습니다. 루안 님이 열어주신 이 길, 결코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맘대로 생각해라."

말을 섞는 것조차 산소 소모가 심해 나는 대꾸를 포기했다. 오해를 해명하는 것보다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에너지 효율 면에서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우리는 마침내 유적 입구의 봉인 결계선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거대한 화강암 기둥들이 빗속에서 엄숙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만 넘어서면 결계 내부의 고대 마도 핵을 흡수해 영구적인 수명과 낙원 같은 은퇴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아르비스 영지에서의 삶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다, 루안 폰 아르비스."

어둠 속에서, 빗물에 젖어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빗줄기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율리우스 카이저.

그의 화려했던 금발은 빗물과 진흙에 절어 엉망으로 떡져 있었고, 항상 오만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붉은 실핏줄이 터져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카이저 가문이 자랑하는 최정예 사설 기사단 열댓 명이 검을 뽑아 든 채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왔군. 내 모든 유통망을 마비시키고, 가문의 자금줄을 통째로 쥐고 흔든 쥐새끼가 바로 너였다니."

율리우스의 목소리는 빗소리 속에서도 기괴할 정도로 낮고 날카롭게 긁혔다.

"네놈이 기획한 그 해괴망측한 예산안이 처음부터 내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한 경제적 선전포고였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내 모든 재산과 명예를 앗아가고, 아카데미에서 나를 매장한 대가를 오늘 여기서 치르게 해주마."

그는 품속에서 기괴한 붉은 문양이 새겨진 고대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날이 율리우스의 손바닥을 파고들자, 붉은 피가 검신에 흡수되며 불길한 진홍빛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피를 매개로 마력을 극대화하는 고대 마검의 폭주였다.

"이 유적은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네놈의 숨통을 끊고, 내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율리우스가 광소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기괴하게 요동치는 진홍빛 마력이 빗줄기를 가르며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왔다.

"루안 님, 위험합니다!"

아델린이 검을 뽑아 들며 내 앞을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가문의 몰락이라는 극단적인 벼랑 끝에 몰린 천재의 마지막 발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마력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스스스스-.

내 눈앞에서 '아덴의 서'가 율리우스의 마력 궤적을 붉은색 경고등으로 도배하며 거칠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대상의 마력 방출량이 정상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치명적인 마법 반동이 예상됩니다. 우회 경로 차단.]

율리우스가 피를 흘리는 고대 검을 치켜든 채, 광기 어린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빗속을 뚫고 쇄도하는 검날 끝에 서린 살의가 내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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