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떻게 할 거야, 우진 씨?"

서율의 목소리는 벼려진 칼날처럼 매끄럽고 차가웠다. 그녀의 시선은 우진의 정지된 심장 부근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가, 이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발소리들로 향했다.

지하 객실의 눅눅한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단청의 틈새마다 고여 있던 핏빛 물방울들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지며 기분 나쁜 파열음을 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마강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천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곰팡이처럼 웅웅거리고 있었다.

"보나 마나 쥐새끼처럼 숨어 있겠지! 연우진, 이 살인마 자식!"

복도 끝, 어둠을 찢으며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 손에 녹슨 쇠지게 작대기와 정육점용 칼을 든 사내들이었다. 우화각에 갇힌 이후 공포에 절어 서로를 의심하던 자들이 마강현이라는 '가짜 구원자'의 선동 한 자락에 맹목적인 사냥개로 돌변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입술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인간이 이성을 잃고 맹목적인 살의에 눈뜰 때 풍기는 독특한 악취가 좁은 지하 복도를 가득 채웠다.

"저기 있다! 저놈이야!"

앞장선 사내는 과거 부도 어음을 남발해 수많은 이들을 스스로 목숨 끊게 만들었던 사채업자 황만식이었다. 그가 쥔 쇠지게 작대기 끝에는 우화각의 어둠 속에서 묻은 정체 모를 끈적한 점액질이 묻어 있었다. 뒤따르는 다른 두 명 역시 법망을 피해 도망쳐 온 파렴치한 죄인들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진흙을 밟듯 질척거렸다.

서율은 우진의 옆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 상황을 아주 합리적인 실험실의 관찰자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우진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살의의 시선들을 가만히 마주했다. 그의 왼팔은 이미 어깨까지 단단히 얼어붙어 상아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 끝은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장은 단 한 번의 고동도 허락하지 않은 채 가슴뼈 아래에서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진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억울함도 없었다. 그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무감각만이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고여 있을 뿐이었다.

우진의 시선은 자신에게 도끼와 칼을 겨누고 달려드는 사내들을 비껴갔다. 그의 눈동자가 닿은 곳은 객실 한구석, 먼지 쌓인 자개 제단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나무 상자였다.

그것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었다.

'찾았다.'

우진의 머릿속에서 명부장부의 보이지 않는 책장이 스르륵 넘어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상자 틈새로 흘러나오는 기운은 축축하고 차가웠으나, 동시에 우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감미로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우화각 지하 깊은 곳,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황천의 틈새에 옭아매여 날마다 비명을 지르고 있을 여동생 우희의 영혼. 그 단편을 담아내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릇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교하게 깎인 나무 소체는 마치 우희의 뼈대와 살결을 대신할 수 있을 것처럼 기이한 생동감을 품고 있었다.

"죽여! 저놈만 죽이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갈 수 있어!"

황만식이 침을 튀기며 쇠지게 작대기를 치켜들었다. 쇳소리가 좁은 복도의 벽을 때리며 고막을 찔렀다.

우진은 품 안에서 낡고 해진 가죽 장부, 명부장부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손가락 끝이 장부의 가죽 표지에 닿는 순간,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왼팔에 이어 왼발 끝에서부터 서서히 감각이 마비되는 기괴한 동결이 시작되었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마치 뼈를 깎아내는 송곳처럼 가차 없었다. 맥박이 영하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고통 속에서, 우진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우진의 품 안, 낡은 매화나무 상자에서 아주 미세하고 따스한 온기가 배어 나왔다.

스스스.

마치 여동생 우희가 오빠의 차가운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은은한 매화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얼어붙어 가던 우진의 심장 근처에 작은 온기의 불씨를 지폈다. 영혼이 통째로 얼어붙어 바스러지기 직전, 그 미약한 온기가 우진의 이성을 붙잡아 주었다. 우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여동생의 온기가 여전히 자신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확신이 그를 채웠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황만식과 그 일당들이 서너 걸음 앞까지 육박했다. 그들이 쥔 무기 끝이 우진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우진은 조용히 명부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누런 종이 위로 붉은 먹선이 빠르게 그어지며, 습격자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카르마의 수치들이 선명하게 시각화되었다.

[채무자: 황만식 외 2명] [담보 자산: 살인 및 사기에 얽힌 원한의 부채] [현재 이자율: 복리 300%]

우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무기들, 꽤 많은 피를 먹었군."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당신들이 쥐고 있는 그 무기에는 변제되지 않은 채무가 얽혀 있어."

우진의 손가락이 장부의 한 면을 툭 쳤다.

"채권 이전. 그 무기들이 짊어진 원한의 무게를 지금 이 순간, 소지자들의 육체적 채무로 즉시 청구한다."

바람 한 점 없는 지하 객실 내부에 기괴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황만식이 쇠지게 작대기를 내리치려던 순간,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어…… 어억?!"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쥐고 있던 녹슨 쇠지게 작대기가 갑자기 수백 킬로그램의 무쇠 덩어리로 변한 것처럼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황만식의 손목 뼈가 뚝 하는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꺾였다. 뒤따르던 다른 남자의 정육점용 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칼날을 아래로 잡아당기듯, 칼끝이 바닥 돌판에 단단히 박혀버렸다.

"이, 이게 왜 안 뽑혀?! 으아악!"

사내들은 자신들이 쥔 무기를 들기는커녕, 무기에 깃든 인과적 무게에 이끌려 바닥으로 처참하게 끌려 내려갔다. 그들의 손가락 가죽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무기에 깃들어 있던 과거 피해자들의 원한과 카르마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맷돌 아래에 깔린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척추가 부러질 듯한 압박감에 그들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우진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그들의 처절한 비명 속을 유유히 걸어갔다.

"아아아악! 살려줘! 숨이…… 숨이 안 쉬어져!"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황만식의 등 뒤로 우진의 발걸음이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타인의 비명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기묘한 공감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신의 얼어붙어 가는 왼발 때문에 가해지는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기괴한 걸음걸이였다.

서율은 그 광경을 보며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꼈다. 물리적인 힘을 쓰지 않고도, 오직 그들의 죄악과 인과의 법칙만을 뒤틀어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는 힘. 그것은 단순한 오컬트 주술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의한 '파산'이었다.

"괴물이네, 정말로."

서율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외와 섞인 기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우진은 제단 앞에 멈춰 섰다.

검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자, 옅은 매화 향기와 함께 마침내 자태를 드러낸 정교한 인형 소체가 보였다. 맑고 하얀 나무로 깎아 만든 인형은 관절 마디마디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뼈대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이 소체라면 우화각 깊은 곳에 묶인 우희의 영혼을 온전히 정착시킬 수 있을 터였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소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얼어붙은 그의 가슴팍에 소체가 닿자, 기묘하게도 심장이 멈춘 자리에서 아주 작고 정겨운 온기가 다시금 번져 나갔다. 우희의 영혼 단편이 오빠의 온기를 알아채고 숨을 죽이는 듯한 안도감이 전해졌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는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우진이 소체를 완전히 품에 안고 뒤를 돌아선 찰나.

지하 객실의 사방 벽면에서 찌르르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청의 틈새뿐만 아니라 흙벽 전체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피부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며 나오는 것은 물이 아니었다.

진득하고 붉은,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피였다.

벽면 전체가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젖어들며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엎드려 비명을 지르던 죄인들의 몸 위로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벽면의 가장 거대한 균열 사이로, 살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마찰음과 함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그것은 인간의 머리통보다 수십 배는 더 거대한, 황금빛 홍채를 가진 기괴한 거대 안구였다. 핏발이 어지럽게 얽힌 거대한 눈동자가 기이하게 굴러가며 우진과 서율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

서율의 숨이 턱 막혔다.

우화각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대원귀, 백일홍의 감시안이 마침내 그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대청 아래 지하실에서 개안한 것이었다. 거대 안구의 동공이 우진의 품에 안긴 소체를 향해 기괴하게 수축했다.

질척이는 핏물이 벽을 타고 내려와 바닥의 먼지와 뒤섞였다. 썩은 꽃향기와 비린내가 뒤엉킨 기괴한 악취가 좁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황금빛 동공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기묘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우진이 품에 안은 인형 소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거대한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대기 자체가 무겁게 짓눌렸다. 우진의 왼발 끝에서부터 시작된 동결이 발목을 지나 정강이까지 빠르게 타고 올라왔다. 살가죽이 얼어붙으며 하얗게 균열이 이는 소리가 지하실의 고요를 깨뜨렸다. 감각이 사라진 다리는 이제 디디고 서 있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지, 지독하네……."

서율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녀의 이성적인 눈동자조차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대 안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오컬트의 압력은 단순히 시각적인 공포를 넘어, 영혼 자체를 짓이기는 중력과도 같았다. 그녀의 얇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였다.

우진은 서율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다리가 얼어붙어 부서지기 직전인 상황에서도, 그의 기괴한 감각은 서율이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슴뼈 아래, 멈춰 버린 심장이 타인의 비명에 호응하듯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정작 제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우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명부장부를 바짝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붉은 먹선들이 장부 위에 어지럽게 뒤엉켰다. 백일홍의 감시안이 발산하는 살의는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화각이라는 거대한 회계 장부에서 '허가되지 않은 자산'을 회수하려는 강박적인 채권 추심이었다.

[경고: 우화각의 소유권자가 자산 반출에 대한 즉각적인 이자를 청구합니다.] [청구 예정액: 소지자의 남은 수명 전체 및 영혼의 소유권.]

장부에 기록된 붉은 글씨가 우진의 망막을 붉게 물들였다. 수명 전체를 빼앗긴다면 여동생 우희를 되살리기도 전에 이 차가운 고택의 거름이 되고 말 터였다. 우진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 왼발을 억지로 끌며,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황만식을 내려다보았다.

"내 자산을 지키기 위해선, 대위변제(代位辨濟)가 필요하겠지."

"우진 씨? 무슨……!"

서율이 경악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진은 오른손 끝으로 자신의 피를 찍어 장부의 새로운 면에 거칠게 갈겨썼다.

[채무 조정 신청: 소체 반출에 따른 일시적 이자 납부를 제3자의 카르마로 대체함.] [대체 대상: 황만식(남은 수명 12년 4개월)]

장부의 종이가 찢어질 듯 펄럭였다. 그 순간,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던 황만식의 비명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

"희, 희아아악! 내 몸이, 내 몸이 왜 이래?!"

황만식의 검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눈이 내린 듯 하얗게 세어 갔다. 팽팽하던 그의 뺨은 순식간에 수분이 빠져나간 가죽처럼 말라붙었고, 검버섯이 피어올랐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린 것처럼 기괴하게 꺾이며 늙어 갔다. 백일홍의 안구가 요구하는 방대한 인과적 이자를 황만식의 수명으로 강제 대납시킨 결과였다.

거대 안구의 황금빛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황만식의 쪼그라드는 육신을 향해 돌아섰다. 그 틈을 타 우진은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여 제단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우화각의 지배자는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황만식의 수명을 전부 빨아들인 거대 안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가늘게 좁혀지는가 싶더니, 이내 기괴한 뒤틀림과 함께 한 번 세차게 깜빡였다.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

질척이던 지하실의 바닥 돌판들이 마치 살아 있는 진흙처럼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돌판 아래에서 솟구친 것은 검은 물이었다. 이승의 물이 아닌, 죽은 자들의 원한과 비명으로 가득 찬 황천의 진창이었다.

"우진 씨! 바닥이……!"

서율이 비명을 지르며 제단 위로 뛰어올랐다.

검은 진창은 순식간에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얼어붙어 움직임이 둔해진 우진의 왼다리가 검은 물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황천의 물이 닿자, 우진의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품에 안은 인형 소체마저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검은 진창의 표면이 부글거리며 솟구치더니, 수십 개의 창백한 손들이 물 위로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진의 옷자락과 소체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지하실 벽면에 박힌 거대 안구의 동공 속에서, 붉은 피 대신 검은 글씨가 흘러내려 벽면에 기괴한 문장을 완성해 나갔다.

[죄인의 십조율 제삼조: 타인의 죄를 대납한 자, 그 대가의 배(倍)를 자신의 육신으로 갚아야 하리라.]

새로운 규칙의 강제 집행이었다.

동시에, 우진의 품에 안긴 나무 인형 소체의 가슴팍에 쩍 하는 불길한 굉음과 함께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희의 온기가 서려 있던 매화 향기가 급격히 바래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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