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백일홍의 집중력이 공포로 흐려진 찰나였다.

그 틈을 타 어둠의 장막 너머에 납작하게 엎드려 숨어 있던 복수귀, 마강현이 튀어 올랐다. 그의 손에는 녹청색 독이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칼날이 쥐여 있었다. 이미 밑바닥까지 털려 이성이 마비된 자의 몸짓은 짐승의 사나움보다 비열하고 매끄러웠다. 기괴한 파찰음을 내며 짓이겨진 대청마루의 틈새를 딛고, 마강현의 독칼이 연우진의 등덜미를 가혹하게 질러 왔다.

"죽어! 같이 죽는 거다, 연우진!"

목을 긁어내리는 듯한 쇳소리가 어둠 속에 축축하게 퍼졌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마치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불길했다. 우진의 왼팔은 이미 어깨까지 퍼런 서리가 내려앉아 굳어 있었고, 그의 발밑은 허공이었다. 황천의 틈새로 떨어져 내리는 찰나의 무중력 속에서, 마강현의 칼끝이 우진의 가슴팍 초근접을 파고들었다.

서늘한 금속의 감각이 가슴뼈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이 헤집어지고 핏줄이 터지는 파열음이 우진의 귓가를 기분 나쁘게 자극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우진의 기괴한 결함은 제 몸이 찢어지는 순간에도 그를 방관자로 만들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두근.

마지막 박동이었다. 독칼에 묻은 음침한 살의와 명부장부의 대가로 지불한 수명의 한계가 겹치며, 우진의 심장 박동은 영구 정지 단계로 급격히 하강했다. 차가운 얼음물이 혈관을 타고 뇌수까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눈꺼풀 안쪽이 하얗게 점멸하며, 명부장부의 붉은 글씨가 허공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남은 수명: 0일 0시간 0분 0초] [경고: 계약자의 생명 활동이 영구히 소멸합니다. 영혼 회수 절차를—]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우진의 정지된 감각 세포를 깨운 것은 기괴하게도 향기였다.

그것은 우진이 품에서 놓쳤던 향나무 상자, 여동생 연우희의 영혼 단편이 깃든 인형 소체 보관함에서 번져 나온 것이었다. 상자의 이음새 사이로 옅은 매화나무 향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화각의 썩은 피 냄새와 곰팡이 가득한 습기를 말끔히 지워내는, 지독하리만큼 이질적이고 온화한 향기였다.

상자 안쪽, 붉은 실로 정교하게 꼬아 만든 매화나무 매듭끈이 스스로 예열되듯 붉은 안개를 토해냈다. 그 안개는 황천의 어둠을 뚫고 우진의 얼어붙은 가슴을 향해 실타래처럼 뻗어왔다.

'오빠.'

귓가를 스치는 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진의 꿈속을 헤매던, 가냘프지만 꺾이지 않는 여동생의 음성이었다.

'아직은 안 돼. 나 때문에 오빠가 멈추면 안 돼.'

매화나무 매듭끈에서 흘러나온 붉은 영혼의 온기가 우진의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 속으로 주저 없이 파고들었다. 우희의 영혼 단편이 지닌 마지막 생명 온도가 이식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얼어붙은 혈관을 녹이는 뜨거운 화인(火印)과도 같았다.

쿵.

멈췄던 심장이 한 번 크게 요동쳤다. 가슴팍의 자창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피가 붉은 빛을 띠며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전신을 지배하던 죽음의 동결이 우희의 온기로 인해 일시적으로 밀려났다.

[시스템: 특수 인과율 '매혼의 온기(妹魂之溫)'가 발동되었습니다.] [계약자의 심장 박동이 임시 재가동됩니다. 잔여 수명이 영체의 온기로 연명됩니다.]

우진이 감겨 가던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정이 배제된 채 맑았으나, 그 안에는 기괴한 생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분명히 심장을 찔렀는데!"

마강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칼끝을 타고 전해져야 할 죽음의 감촉 대신, 기묘한 열기가 되돌아오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진의 오른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가죽으로 제본된 명부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종이가 쓸리는 소리가 마치 수천 마리의 쥐가 벽을 긁는 소리처럼 음산하게 고택을 가득 채웠다.

"마강현 씨."

우진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제 가슴에 칼을 꽂은 사내를 바라보는 눈빛이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당신은 이 우화각에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삼아 연명해 왔죠. 하지만 세상에 공짜 채권은 없습니다. 만기가 된 이자는 구속으로 변제해야 하는 법입니다."

우진이 손가락 끝으로 명부장부의 빈 지면에 붉은 핏자국으로 글자를 내리썼다. 마강현의 이름 석 자 위로 검은 먹선이 그어지며, 장부의 숨겨진 조항이 드러났다.

[체납 불이행 구속 영장 발부: 채무자 마강현] [구속 수단: 황천의 아사귀 사역 및 영구 차압]

"이, 이게 무슨……!"

마강현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으나, 그의 발밑에 고여 있던 짙은 어둠이 점차 끈적한 진흙처럼 변해갔다.

스르륵, 스르륵.

대청마루 밑바닥, 황천의 틈새에서 굶주린 아사귀들의 검은 손길들이 수십, 수백 개씩 솟구쳐 올랐다. 가늘고 길쭉하게 늘어난 손가락들이 마강현의 발목을 잡고, 종아리를 감싸 쥐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길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마강현의 입에서 핏방울이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연우진! 살려줘! 내가 잘못했다! 제발, 제발 이 손들 좀 치워줘!"

"당신이 제물로 바쳤던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진은 마강현이 내지르는 단말마를 들으며, 오히려 눈물을 흘렸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은 마강현의 고통과 공포에 완벽히 동조한 결과물이었다. 정작 자신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에는 무감각하면서도, 타인의 파멸에는 이토록 깊게 반응하는 괴물.

"그들의 원한은 이미 이자가 붙어 당신의 영혼 전체를 청구하고 있습니다. 잘 가십시오."

우진이 장부를 덮었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옥의 아귀 손길들이 마강현의 온몸을 낚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 뼈가 으스러지고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마강현은 비명조차 완전히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이 기괴하게 꺾이며 황천의 검은 심연 속으로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추악한 죄악이 우화각의 채무로 완전히 청산된 순간이었다.

마강현이 소멸함과 동시에, 우진은 허공에서 떨어지던 향나무 상자를 정밀하게 낚아챘다.

상자 뚜껑이 열리며 우희의 마지막 영혼 묶음이 푸르스름한 보라색 불꽃의 형태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우화각의 지배자, 백일홍이 뻗은 보이지 않는 인과의 실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백일홍은 우희의 영혼을 우화각의 영구 자산으로 묶어두려 제단 밑바닥에서 원한의 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 정원을 장식할 가여운 나비의 날개를 꺾으려 드는구나."

백일홍의 목소리가 사방의 벽면에서 스며나왔다. 시조를 읊는 듯한 우아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는 우진의 인과 왜곡에 대한 극도의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우진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미 백일홍의 장악권이 가진 취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당신이 이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우화각의 기단에 새겨진 인과 십조율 덕분이겠지요. 하지만 이 영혼의 본래 소유주인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이 권리를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무단 점유된 자산은 즉시 반환되어야 합니다."

우진이 명부장부를 넓게 펼쳤다. 장부의 마지막 장, 미세한 먹선으로 숨겨져 있던 '연대채무 보증' 법조항 테두리 수식이 붉은빛을 발산하며 우화각 전체의 마력 흐름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백일홍이 우희의 영혼을 붙잡고 있던 인과의 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이내 회계적 오류를 일으키며 툭, 툭 끊어져 나갔다. 권리를 상실한 백일홍의 마력이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우진은 제 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정교한 구속 인형을 꺼냈다. 사람의 살결과 흡사하게 깎아 만든 백동나무 골조와 비단으로 엮은 관절들. 그것은 여동생의 영혼을 담기 위해 그가 수년 동안 피를 흘리며 깎아 만든 육신이었다.

"우희야, 돌아올 시간이야."

우진의 나지막한 부름에 반응하듯, 허공에 떠돌던 보라색 영혼의 불꽃이 인형의 이마를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스으으으.

영혼이 인형의 가슴속으로 녹아들어가자, 백동나무 피부 위로 실핏줄 같은 붉은 선들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딱딱하던 관절이 부드럽게 연화되고, 차갑던 인형의 뺨에 옅은 홍조가 돌았다. 인형의 닫혀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마침내 완전한 영혼의 하우징이 결착되었다.

우진의 품에 안긴 인형의 가슴이 작게 오르내렸다. 인형의 입술 사이로 아주 가늘고 따뜻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오…… 빠……."

기적이었다. 우화각의 지독한 저주와 인과의 사슬을 끊어내고, 마침내 여동생의 영혼을 온전한 육신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진의 가슴속에서 수년 동안 묵혀두었던 갈망이 마침내 눈부신 성공의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우화각 전체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릉구릉구릉!

"감히 나의 정원을 파산시키고, 나의 나비를 훔치려 드는구나."

백일홍의 목소리가 더 이상 우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찢어지는 듯한 살의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우화각의 중심을 지탱하던 거대한 대들보가 쩍쩍 갈라지며 붉은 피를 토해내듯 진흙을 뿜어냈다. 기단석들이 뒤틀리며 대청마루와 2층의 방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리석 기둥들이 무참히 부서지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연우진 씨! 피해요! 여기가 통째로 무너지고 있어요!"

저 멀리 무너지는 천장 잔해 사이로 서율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화각의 지배자가 제 공간 전체를 스스로 폭주시켜, 침입자들과 함께 모든 것을 대리석 잔해 밑에 깔아뭉개 버리려는 종말의 시작이었다.

우진은 품에 안은 우희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대들보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콰르릉!

단단하던 대청마루가 수직으로 갈라지며 우진의 발바닥을 집어삼켰다. 부서진 기와와 흙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우진의 시야는 오히려 정교한 격자무늬처럼 차갑게 분할되었다.

장부의 안쪽 페이지가 백일홍의 폭주로 인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찢겨 나가는 우화각의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부채'로 환산되어 우진의 망막에 붉은 숫자로 명멸했다.

[공간 붕괴율: 42%... 55%...] [경고: 우화각의 무단 강제 폐업(자진 폭파)으로 인한 물리적 피해가 계약자의 생명 자산을 직접 타격합니다.]

"연우진 씨! 이쪽이에요!"

서율이 기둥 뒤에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방울져 떨어졌다. 평소의 이성적인 냉정함은 간데없고, 그녀의 동공은 죽음의 공포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남을 배신하고 서라도 살아남으려던 그녀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진이라는 유일한 동률의 나침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악착같이 매달렸다.

우진은 서율의 손을 잡는 대신, 품에 안은 우희의 인형 소체를 왼팔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인형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온기가 그의 얼어붙은 흉곽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서율 씨. 뛰지 마세요."

우진의 목소리는 폭풍의 중심처럼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뛰어봤자 무너지는 속도보다 느립니다. 지금 이 집은 자신을 스스로 파산 처리하려는 겁니다. 채권자들을 한꺼번에 매장해서 채무를 소멸시키려는 속셈이지요."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당장 깔려 죽게 생겼는데!"

서율의 비명 뒤로, 가로세로 수 미터에 달하는 대리석 들보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직격했다. 중력을 무시한 듯한 육중한 질량이 고막을 찢는 파찰음과 함께 낙하했다.

우진은 오른손에 쥔 명부장부를 높이 치켜들었다. 손가락 끝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가죽 표지에 닿자마자, 동결된 왼팔에 이어 오른팔마저 손목부터 서서히 푸르스름한 얼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극심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의 제기(異議提起)합니다."

우진의 입술 사이로 서리 섞인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우화각의 자진 폭파는 채권자의 동의 없는 불법 자산 은닉 및 처분 행위입니다. 본 장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낙하하는 건축 자재의 '인과적 질량'을 동결 처리합니다."

[계약 조항 발동: 자산 동결(凍結)] [대가: 계약자의 우측 상지 기능 일시 정지 및 남은 온기 15% 차감]

쩌적!

머리 위를 덮치던 거대한 대리석 들보가 우진의 머리맡 불과 한 뼘 위에서 기적처럼 멈춰 섰다. 들보를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빙결되며, 허공에 고정된 채 굳어버린 것이다. 물리적인 질량 자체가 장부의 채권 보전 처분에 의해 잠정 유예된 기묘한 광경이었다.

"미쳤어…… 정말 괴물 같은 짓을……."

서율은 멈춰 선 대리석 들보를 보며 턱을 벌렸다. 공포를 넘어선 경외감이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짙게 새겨졌다.

그러나 우진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오른손마저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얼어붙은 양팔로는 품 안의 인형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인형의 육신을 얻은 우희가 우진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나무 관절이 맞물리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우진의 귓가에 울렸다.

'오빠, 내 온기를 가져가. 나 때문에 오빠가 얼어 죽는 건 싫어.'

"안 돼, 우희야. 네 영혼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온기다. 내가 감당할 수 있어."

우진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잇몸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타인의 고통에는 찢어지듯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뼈가 삐걱거리고 살이 얼어 터지는 고통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기괴한 무감각이 오히려 이 지옥 같은 회계 거래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무기였다.

그때, 대청마루 중앙의 뚫린 지하 구멍에서 거대한 푸른 불꽃을 품은 그림자가 구렁이처럼 기어 올라왔다. 백일홍의 본체였다. 수많은 해골과 짓이겨진 인간의 형상들이 기괴하게 얽설힌 집합체인 그것이, 고택의 무너진 자재들을 흡수하며 거대하게 팽창했다.

"가소롭구나, 필멸자여. 네놈이 장부로 얼려둔 공간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 우화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인과의 무게를 네 얄팍한 목숨값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백일홍의 가학적인 외침과 함께, 얼어붙었던 대리석 기둥 주변의 공간들이 다시 한번 요동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장부의 제약 조건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우진의 뇌리를 때렸다.

[위험: 담보 자산의 가치 하락. 동결 조항의 유지 한계 도달까지 5초.]

우진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냉정하게 명부장부의 맨 뒷장을 훑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미세한 먹선으로 숨겨진 '연대채무 보증' 법조항 테두리 수식이 희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금되지 않은 이 조항은, 우화각이 지닌 방대한 원한과 저주를 설계자인 백일홍에게 강제로 공동 부담하게 만들 최종 역전의 실마리였다.

'아직은 조항의 발동 조건이 부족해. 백일홍의 인과를 완전히 옭아맬 결정적인 부채 연계가 필요하다.'

우진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율 씨, 내 옷자락을 잡으세요."

우진이 차갑게 명령했다. 서율은 주설치 않고 우진의 얼어붙은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사방이 막혔어!"

"출구는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자산의 중심부로 들어갑니다."

우진이 가리킨 곳은 백일홍의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지하신전의 검은 심연, 황천의 틈새였다.

"미쳤어?! 거긴 아까 마강현이 떨어진 곳이잖아!"

서율이 경악하며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우진은 이미 그녀의 손목을 굳어버린 오른손으로 단단히 결착한 상태였다.

그 순간, 머리 위의 대리석 들보가 굉음과 함께 완전히 붕괴했다. 수십 톤의 석재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덮치는 찰나, 우진은 서율을 이끌고 검은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와중에, 우진의 시야에 기이한 시스템 알림이 붉은 잉크처럼 번져 나갔다.

[경고: 계약자가 '황천의 틈새' 최심부에 진입했습니다.] [알림: 우화각의 숨겨진 원죄 자산이 감지되었습니다. '연대채무 보증' 조항의 강제 활성화 수치가 급상승합니다.]

그리고 추락하는 어둠의 끝자락에서, 우진은 보았다.

지하실 밑바닥, 푸른 불꽃의 심장부에서 서서히 눈을 뜨는, 백일홍조차 통제하지 못한 채 묶여 있는 거대한 '영혼의 불씨'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기괴한 형상의 철창을.

동시에 우진의 가슴 안쪽에서, 완전한 인형의 몸을 얻은 우희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우진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오빠…… 저 불꽃 속에…… 내 영혼의 진짜 '원본'이 묶여 있어…… 저걸 건드리면 우리는……!"

우희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추락하던 세 사람의 몸을 향해 심연 밑바닥에서 수천 개의 가시 돋친 쇠사슬이 뱀처럼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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