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가여운 영혼의 부스러기가 화약고의 심지가 된다면, 과연 어떤 소리로 터져 나갈꼬? 우화각의 밤을 수놓을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가 되겠구나."

백일홍의 목소리는 대청마루의 갈라진 나무 틈새마다 고여 있던 썩은 물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고택의 천장을 가득 메운 거무죽죽한 나무뿌리들이 꿈틀거리며 붉은 점액을 뱉어냈다. 뿌리 끝에 옭아매어진 것은 연우희의 영혼 단편이었다. 푸르스름한 안개처럼 바스러져 가는 우희의 얼굴이 허공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백일홍은 그 가냘픈 영체를 사령들의 원한이 가득 찬 검은 구체, 즉 사령 포탄의 보조 심지로 옭아매고 있었다.

지독한 매화나무 향기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피비린내와 섞여 진하게 풍겼다. 연우진이 품에 안고 있는 인형 소체 보관함에서 새어 나오는 옅은 온기였다. 그것은 심장이 멈춘 우진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온도의 이정표였으나, 지금은 그 온기마저 백일홍의 서슬 퍼런 살의에 짓눌려 지워지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혹은 여동생을 구하겠다고 이 아비규환에 뛰어든 평범한 오빠라면 이 순간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으리라. 제발 그녀만은 살려달라고, 내 영혼을 대신 가져가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인과였다.

그러나 연우진의 눈동자는 기괴할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그의 입가에 느슨하고 태연한 미소가 걸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슬픔의 발로가 아니었다. 타인의 비명과 고통에만 비정상적으로 동조하는 감정 불감증의 육체가 만들어 낸, 기계적인 생리 반응일 뿐이었다. 우진은 얼어붙은 왼팔을 늘어뜨린 채, 살아 있는 오른손으로 뺨의 물기를 느긋하게 훔쳐냈다.

"백일홍 씨."

우진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마른 우물처럼 건조했다.

"협박의 격식치고는 꽤나 유치하군요. 고작 그 정도의 인질극이 당신이 자랑하던 고택의 대단한 인과율입니까?"

- 무엇이라?

백일홍의 환영이 일그러졌다. 허공에 뜬 해골 형상의 푸른 불꽃이 거세게 일렁이며 사방의 대들보를 태워 먹었다.

"여동생의 영혼을 폭탄의 심지로 쓰겠다니. 참으로 참신하고도 부실한 담보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우진이 명부장부의 낡은 가죽 표지를 툭툭 쳤다. 장부 뒷장, 미세한 먹선으로 숨겨진 '연대채무 보증'의 테두리 수식들이 그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희미한 금빛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 고택의 규칙은 결국 거래와 인과로 굴러가지요. 당신이 쥐고 있는 그 우희의 영혼은, 내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회수하려 할 때에만 비로소 '자산'으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채무자가 담보물의 소유권을 아예 포기하고, 그 가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 이 미친 자가…… 무슨 헛소리를!

"심연의 반비례 규칙을 모르시는군요."

우진의 목소리에 한 줄기 서늘한 웃음기가 섞였다.

"인질 협상에서 한쪽이 계약 주권을 아예 포기하는 순간, 인질의 가치는 소멸합니다. 즉, 당신이 우희를 터뜨려 소멸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순간, 나는 이 장부의 계약 주권을 스스로 폐기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쥐고 있는 영혼은 아무런 인과적 가치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지요. 채권자가 담보를 스스로 파괴해 채권을 부도내는 꼴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당신이 감당해야 할 막대한 인과적 과부하뿐입니다."

우진은 장부의 한 페이지를 거침없이 넘겼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가혹한 붉은 글씨가 명시된 강제 청산 조항이었다.

[시스템 경고: 계약자의 계약 주권 포기 시, 우화각의 모든 인과 채무는 설계자 '백일홍'에게 즉시 전액 대위청구됩니다.]

"자, 터뜨려 보십시오."

우진이 대낮처럼 명백하고 맑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우희의 영혼을 날려 버리는 즉시, 나는 내 영혼과 심장을 담보로 이 장부 전체를 강제 파산 처리하겠습니다. 내 심장은 이미 멈춰 있고, 수명은 10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 파산자와의 치킨게임에서, 과연 우화각의 지배자이신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무척 기대되는군요."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오른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배어 나온 붉은 피를 장부의 강제 파산 서명란에 문지르려 했다. 망설임이란 단 한 푼도 존재하지 않는, 진짜 광인의 손짓이었다.

백일홍의 환영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인간의 영혼을 옭아매고 고통을 주며 즐거움을 느끼던 대원귀의 오만한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과 공포가 스몄다. 이 인간은 정말로 여동생의 소멸도, 자신의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 제 목숨을 아주 값싼 칩처럼 판돈으로 던져 버리는 미치광이.

- 멈춰라! 네놈은……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어찌 제 핏줄의 종말 앞에서도 그리 평온할 수 있단 말이냐!

백일홍의 비명 섞인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영혼 단편을 옭아매고 있던 거무죽죽한 나무뿌리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증발해 버린 담보물은 이제 백일홍에게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말했지 않습니까."

우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대청마루 바닥에 툭, 투둑 떨어졌다.

"나는 타인의 비명에는 심장이 찢어지듯 공감하지만, 내 파멸 앞에서는 꽤나 태연한 편이라고요."

그 순간, 옆에서 지켜보던 서율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언제나 손익분기점을 따지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냉혹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우진이 보여 준 이 끈질기고도 기괴한 배짱 싸움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미친 짓이었지만, 동시에 이 우화각이라는 부도 직전의 판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의 한 수였다.

"확실히 미친놈 옆에 있으면 물드는 법이군."

서율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품 안에서 구리선과 낡은 도화선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지하신전에서 올라올 때 챙겨 두었던 폭발성 진흙 가루 동이를 대청마루 중앙의 대들보 아래로 걷어찼다. 진흙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매캐한 유황 냄새가 고택의 썩은 공기를 덮어씌웠다.

"백일홍, 혹은 우화각의 망령들 들어라."

서율이 라이터를 켜서 불꽃을 도화선 끝에 가만히 가져다 대며 차갑게 웃었다.

"연우진이 장부의 주권을 버리고 파산하는 순간, 나 역시 이 고택의 중심 기둥들을 전부 날려 버릴 생각이다. 이 폭발 진흙은 단순한 화약이 아니지. 지하신전의 카르마를 품은 영적 폭약이다. 기둥이 무너지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우화각의 위상 자체가 찢겨 나갈 텐데, 과연 당신의 그 고귀한 정원이 온전할 수 있을까?"

서율의 가세는 완벽한 확인사살이었다.

우진의 광기 어린 폭주에 서율의 냉혹한 실행력이 더해지자, 고택의 인과율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사이다처럼 톡 쏘는 해방감이 대청마루의 무거운 공기를 관통했다. 언제나 생존자들을 쥐락펴락하며 가학적인 유희를 즐기던 백일홍이, 이제는 역으로 필멸자들의 동귀어진 협박에 짓눌려 숨조차 쉬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 네놈들이…… 감히 이 우화각에서 나를 협박해?

백일홍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보다 두려움으로 젖어 있었다.

"선택하십시오, 백일홍 씨."

우진이 피 묻은 손가락을 장부 표면에 바짝 밀착시키며 마지막 통첩을 던졌다.

"우희의 영혼을 돌려주고 거래를 정상 궤도로 돌려놓겠습니까, 아니면 이 자리에서 다 같이 파산하여 황천의 틈새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겠습니까? 카운트다운은 아직 5초 남아 있습니다."

[5…… 4……]

머릿속에서 울리는 붉은 시스템 음이 우진의 망설임 없는 눈빛과 겹쳐졌다.

백일홍은 우진의 눈동자에서 단 한 줌의 거짓이나 허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인간은 정말로 서명을 마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우화각을 지탱하던 거대한 악의가 굴복했다.

- 으아아아악! 불경한 놈들!

백일홍의 비명과 함께 우희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나무뿌리들이 마치 불에 덴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속박에서 풀려난 우희의 푸른 영혼 단편들이 허공을 표류하다가, 우진이 안고 있던 향나무 상자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동시에 매화나무의 은은한 향기가 대청마루 가득 퍼져 나가며, 우진의 얼어붙은 가슴팍에 미약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완전히 멈췄던 그의 심장이 아주 느리게, 쿵…… 하고 한 번 요동쳤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우진이 장부를 덮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백일홍의 거대한 해골 환영은 수치심과 공포로 일그러진 채, 대청마루 밑바닥의 어둠 속으로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고택을 뒤흔들던 진동이 멈추고, 사방에는 오직 서율이 켜 둔 라이터의 미약한 불꽃만이 흔들릴 뿐이었다.

"해냈군, 연우진."

서율이 라이터 불을 끄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당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만약 그 자가 정말로 끝까지 버텼다면 어쩌려고 그랬지?"

"글쎄요."

우진이 기괴할 정도로 덤덤한 표정으로 옷자락을 털어내며 답했다.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하는 거래처는 정리하는 것이 회계의 기본이니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의 기쁨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이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백일홍을 굴복시켰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시선을 나눈 바로 그 순간.

고택의 무거운 침묵을 찢고, 기둥 뒤편의 짙은 어둠 속에서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만…… 너만 없었으면……!"

탈탈 털려 신용 등급이 완전히 파산하고, 영혼의 밑바닥까지 악령들에게 저당 잡힌 몰골의 마강현이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다 못해 검붉게 죽어 있었고, 입가에는 허연 침이 고여 있었다.

위선자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복수귀가, 우진의 무방비한 등덜미를 향해 소리 없이 폭발하듯 돌진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청동 칼날 끝에는 검푸른 독기가 서려 있었다.

"죽어라, 연우진!"

우진의 몸은 여전히 절반쯤 동결되어 즉각적인 회피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율이 경악하며 손을 뻗었지만, 마강현의 칼끝은 이미 우진의 목덜미를 가혹하게 질러 들어가고 있었다.

서늘한 쇠붙이가 목덜미의 솜털을 뉘이며 파고들었다.

쩍, 하고 살갗이 갈라지는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검푸른 독기가 서린 청동 칼날은 우진의 얇은 피부를 찢고 뼈마디가 만져지는 목뼈 직전까지 밀고 들어왔다. 지독한 산(酸) 마취제라도 바른 것처럼, 상처 부위에서부터 신경을 마비시키는 저릿한 통증이 축축하게 번져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척수까지 얼어붙을 공포에 비명을 질렀을 테다. 하지만 우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오히려 시계를 보듯 나지막이 숨을 내쉴 뿐이었다.

"마강현 씨."

우진의 목소리는 제 목이 썰려 나가는 순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잔잔했다.

"당신의 칼끝에서 흐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군요."

그는 자신의 죽음에는 기괴할 정도로 무감각했다. 목덜미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독기가 심장을 향해 흘러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우진의 머릿속은 오직 차가운 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진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마강현의 영혼 밑바닥, 탐욕과 공포에 찌들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는 위선자의 영혼이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우진의 기이한 공감각적 인지 속으로 가감 없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남의 고통에는 뼈가 저리도록 공감하는 이 비정상적인 결함이, 우진의 뺨을 눈물로 적셨다.

"참으로…… 가엽고 시끄러운 영혼이군요. 그렇게 비명을 지를 거면서, 왜 감당하지도 못할 채무를 지셨습니까."

"시끄러워! 죽어! 네놈만 없으면 이 고택의 불씨도, 영생도 다 내 거야!"

마강현이 광기 서린 힘으로 칼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우진의 오른손은 이미 덮어 두었던 명부장부의 마지막 장을 다시 들추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묻은 핏방울이, 장부 뒷장에 미세하게 그려진 '연대채무 보증'의 테두리 수식 위로 매끄럽게 번져나갔다.

[시스템 조회] [대상: 마강현] [신용 등급: 파산 (F)] [보유 자산: 영혼의 잔해 12%, 잔여 수명 3시간] [특이사항: 우화각의 연대보증 조항에 의거, 계약자 연우진의 채무 일부를 강제 분담할 수 있는 '채무자'로 지정 가능.]

"거래를 제안하지요."

우진이 피 묻은 입술을 열어 차갑게 속삭였다.

"내가 짊어진 우화각의 모든 부실 채무 중, 90%를 이 신용불량자에게 강제 양도한다. 신용 등급이 파탄 난 자에게 이자를 독촉하는 것은 채권자의 당연한 권리이니까요."

스스스스슥!

우진의 선언과 동시에, 마강현의 발밑에 고여 있던 썩은 핏물들이 순식간에 검은 손아귀의 형상으로 솟구쳤다. 대청마루 밑바닥에 숨어 있던 아사귀들과 굶주린 원혼들이, 자신들의 채권이 마강현에게 이전되었음을 감지하고 일제히 울부짖으며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빙한실에서 올라온 그 차디찬 냉기가 마강현의 발목을 타고 올라가 그의 살점을 박제하듯 얼려 붙였다.

"어, 어 아악! 이게 뭐야!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왜 이래!"

마강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우화각의 썩은 대들보와 동화된 것처럼 딱딱하게 석화되어 가고 있었다. 채무 독촉의 대가로 몸이 강제로 징수당하는 영적 압류 현상이었다.

"연우진 씨!"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우진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손을 붉게 적셨다.

"목의 상처가 깊어. 더 움직이면 경동맥이……."

"괜찮습니다. 아직 심장은 뛰고 있으니까요."

우진은 제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 양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의 내부 장기는 이미 명부장부의 부작용으로 인해 서서히 동결되고 있었기에, 감각 자체가 극도로 마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방심한 것은, 완전히 파멸해 가던 마강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만…… 나만 지옥에 갈 순 없어……."

하반신이 완전히 얼어붙어 대청마루 바닥에 고정된 마강현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캑캑거리며 상체를 앞으로 뻗었다. 그의 눈 고인 구멍에서 검붉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핏발 선 손가락이 겨냥한 것은 우진의 목숨이 아니었다.

우진이 왼팔로 겨우 품고 있던, 옅은 매화나무 향기를 풍기는 향나무 상자. 여동생 연우희의 영혼 단편이 깃든 인형 소체 보관함이었다.

"그 인형…… 네놈이 목숨보다 아끼는 그거……!"

찰나의 순간, 마강현의 손끝이 향나무 상자의 모서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우진의 왼팔은 이미 어깨까지 완전히 얼어붙어 감각이 없던 상태였다. 미약한 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우진의 품에서 상자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안 돼."

우진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기괴한 평온함 대신 낯선 균열이 일어났다.

마강현은 기괴하게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낚아챈 향나무 상자를 대청마루 중앙에 뻥 뚫려 있던 지하신전의 검은 심연 속으로 내던졌다. 그곳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자, 우화각의 온갖 저주받은 원혼들이 소용돌이치는 황천의 틈새였다.

"같이 죽자, 연우진!"

마강현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우희의 영혼이 담긴 상자가 어둠 속으로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우희야!!"

우진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타인의 비명에만 울던 광인이, 마침내 제 자신의 영혼이 찢겨 나가는 진정한 고통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우진은 제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도, 얼어붙은 왼팔도 아랑곳하지 않고 향나무 상자가 떨어진 어둠을 향해 제 몸을 그대로 던졌다.

"연우진 씨! 미쳤어?! 거긴 황천의 틈새야! 들어가면 두 번 다시—!"

그 뒤로 서율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으나, 우진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어둠이 그의 전신을 삼켜갔다. 바람소리조차 나지 않는 기괴한 무중력의 심연 속에서, 저 멀리 아래로 떨어지는 향나무 상자의 희미한 매화나무 향기만이 그의 유일한 이정표였다.

그와 동시에, 우진의 귓가에 붉은색 시스템 알림이 무자비하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계약자가 인과의 경계를 넘어 '황천의 틈새' 본류에 진입했습니다.] [경고: 대위변제 가중 과부하가 허용 한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신체 붕괴율 99% 돌파.] [남은 수명: 0일 0시간 0분—]

차가운 어둠 속에서 우진의 의식이 빠르게 꺼져 가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여동생의 영혼을 낚아채고 이 무한한 파산의 나락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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