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동기화율 정화를 위해 요새의 수비를 한설아와 복종한 유진우에게 맡겨둔 채 가까운 재앙 스퀘어의 에러 소용돌이 구덩이 안으로 보폭을 넓힌 바로 그 시각, 신무경이 파견한 은신 기술의 달인인 일류 아크 암살 병단 '유령 소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장막을 쓴 채 성벽 모서리를 타고 은밀하게 기어 들어오는 습격 직전의 상황.

모든 것이 신무경의 계산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 세계의 모든 움직임은 강태현의 '장부' 위에서 노는 숫자놀음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스스스스.

재앙 스퀘어의 붉고 검은 대지가 태현의 군화 아래에서 바스러졌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러 코드가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시스템 동기화율이 떨어질 때마다 찾아오는 전신 마비 증세가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귀를 찢는 이명이 들려왔지만, 태현의 안색은 창백할지언정 고요했다.

그의 귓가에 장착된 초소형 인이어 스피커가 미세하게 떨렸다.

-태현 씨, 쥐새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한설아의 차분하면서도 정교한 목소리였다.

"예상대로군. 신무경 그 인간 이하의 생물체가 내 요새를 그냥 둘 리가 없지."

태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장막을 치고 성벽을 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제가 수년간 고장 난 상태창을 독자 연구해 작성했던 '던전 포털 주기의 72시간 불확실 붕괴 위험성' 기밀 통계 자료, 기억하시죠?

"기억하고 말고. 내 장부에 기록된 가장 값진 데이터 중 하나니까."

-지금 요새 주변의 차원 경계가 그 72시간 주기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유령 소대가 은신 장막을 유지하기 위해 방출하는 미세한 마력 파동이, 이 불안정한 차원 균열과 맞물려 완벽한 간섭 현상을 일으키고 있어요.

한설아의 목소리에는 지적 희열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다. 태현의 비정한 효율성에 가장 완벽하게 복종하면서도, 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연산 자원이었다.

-실시간 좌표 전송합니다. 침입자들의 현재 진입 각도는 북동쪽 32도, 속도 초속 4.2미터. 삼각함수로 환산한 차원 균열점과의 오차는 소수점 넷째 자리 이하입니다. 놈들은 자신들이 벼랑 끝을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요.

태현의 시야 우측 하단에 맑은 청색의 데이터 링크가 활성화되었다.

[한설아의 연산 데이터 동기화 완료] [침입자 수: 12명] [타깃 지정 상태: 미인식]

"훌륭해, 설아 씨. 그 통계 자료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겠지."

-태현 씨의 장부에 들어간 이상, 먼지 한 톨도 낭비되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두 사람의 지적 호흡은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태현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그는 쉘터를 완전히 비운 것이 아니었다. 놈들을 더 깊고 확실한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끼를 던졌을 뿐이다.

바스락.

등 뒤의 허공에서 미세한 기류의 흐름이 느껴졌다.

인간의 가청 영역을 벗어난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태현의 감각은 이미 초월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놈들이 요새 내부의 난민들을 도살하려다, 태현의 동선이 재앙 스퀘어로 향하는 것을 보고 사냥감을 바꾼 것이다.

'요새의 주인만 죽이면 나머지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겠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태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재앙 스퀘어의 가장 깊은 심부, 붉은 에러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섰다.

사방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스템의 불완전한 코드가 실체화된 변종 마수들이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슈우우욱!

공기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은빛 궤적이 나타났다.

유령 소대의 기습이었다.

그들은 숨막힐 정도로 정교하게 칼날을 비틀며 태현의 경동맥과 심장을 동시에 노려왔다.

기척조차 없는, 완벽한 사선(死線)의 그물망.

하지만 태현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의 시스템 백엔드 로그를 강제로 개방했다.

'지금이다.'

태현의 머릿속에 1화에서 발견했던, 그러나 그동안 쓰지 않고 묵혀 두었던 아주 특별한 에러 코드가 떠올랐다.

[시스템 백엔드 로그 분석 중...] [검색 완료: 미확인 메모리 누수 버그 (Error Code: 0x000F-Null)] [특이사항: 대상의 타기팅 데이터를 일시적으로 굴절 및 무한 루프에 빠뜨림]

"버그 수정(Debugging)을 시작하지."

태현이 나직하게 읊조린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보랏빛 스파크가 튀었다.

지독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치밀어 올랐다.

"윽...!"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 정도의 대가는 이미 장부에 계산되어 있었다.

위이이이잉!

공중에서 태현의 목을 베려던 은빛 칼날들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기묘한 각도로 꺾여 나갔다.

"뭐, 뭐라고?!"

허공에서 은신을 유지하던 유령 소대원들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메모리 누수 버그의 효과였다.

그들이 태현을 향해 발산한 살의와 타기팅 데이터가 허공에 고정된 채 갈 길을 잃고 굴절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태현은 재앙 스퀘어 최하부 심부의 불안정한 에러 코어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시스템의 깨진 데이터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쓰레기통이자,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백엔드 데이터 왜곡 시도] [대상: 재앙 스퀘어 에러 코어 0x09] [연계 대상: 주변 변종 마수들의 타기팅 시스템]

태현은 고통으로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강제로 코드를 입력했다.

단순히 공격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기된 데이터 잔여물들을 수확하는 도중, 구덩이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기묘한 데이터 덩어리를 발견했다.

[특수 데이터 발견] [명칭: 시스템 포맷 코드 조각 (Fragment_01)] [상태: 수확 가능]

'이건...!'

태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영공 전체의 백업 데이터마저 한순간에 삭제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비장의 붕괴 데이터.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 포맷 코드 조각을 자신의 데이터 장부 깊숙한 곳에 밀반입했다.

전신을 찢는 통증이 두 배로 강해졌지만, 이 엄청난 수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 이제 손님들을 대접할 시간이다."

태현이 서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 순간, 유령 소대의 대장이자 신무경의 오른팔인 '흑영'의 상태창이 태현의 눈앞에 강제로 복사되어 떠올랐다.

[대상: 흑영 (Lv. 58)] [보유 패시브: 심연의 장막 (EX - 기척 및 마력 100% 차단)]

"그 귀한 은신 패시브, 내가 조금 수정해 주지."

태현의 손가락이 허공을 휘저었다.

백엔드 단에서 직접 코드를 뜯어고치는 해커의 손길이었다.

`[심연의 장막]`의 소스 코드가 강제로 변조되기 시작했다.

`Status: Active -> Error` `Value: Stealth 100% -> Aggro 10000%` `Effect: 광역 도발 및 차원 침식 유도`

"끄아아악?!"

돌연 흑영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시린 오색찬란한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마치 아포칼립스 세계관 한복판에서 디스코 조명을 켠 것처럼, 번쩍이는 마력의 광원이 흑영의 온몸에서 소용돌이쳤다.

"이, 이게 무슨...! 내 스킬이 왜 이래?!"

흑영이 경악하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무제한 주변 강력 어그로 및 침식 도발 상태 코드가 활성화된 결과였다.

쿠구구구구!

재앙 구역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덩이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심연의 마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붉은 안광들이 은신 장막이 깨진 유령 소대원들을 향해 집중되었다.

마수들에게 있어, 지금 흑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고기 덩어리와 다름없었다.

캬아아아악!

크르르르!

"미친...! 괴수들이 전부 우리 쪽으로 온다!"

"은신이 안 풀려! 스킬이 취소가 안 된다고!"

유령 소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광분한 수백 마리의 심연 마수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콰직! 서걱!

"아악! 살려줘! 대장! 살려...!"

"으아아아악!"

기척마저 지우고 어둠 속에서 암살을 지휘하던 일류 병단이, 자신들이 기습하려던 대상 앞에서 가장 비참한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마수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유령 소대원들의 사지를 찢고 뼈를 으스러뜨렸다.

태현은 그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장부상의 적자가 완전히 메워졌군."

그에게 있어 유령 소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재앙 스퀘어의 마수들을 처리하고, 자신들의 목숨값을 스탯 데이터로 환원해 줄 소모성 자원에 불과했다.

"커헉... 컥...!"

사지가 뜯겨 나간 채 피웅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흑영이 태현을 향해 피 묻은 손을 뻗었다.

"네, 네놈... 도대체... 무슨 짓을..."

태현이 천천히 다가가 흑영의 머리를 군화로 짓밟았다.

지그시 힘을 주자,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질문은 내가 한다."

태현은 흑영의 두뇌 상태창에 강제로 백엔드 동기화를 실시했다.

그의 뇌세포 속에 남아 있는 잔여 데이터와 시스템 연결망을 역추적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백엔드 동기화율 10%... 40%... 80%...] [역추적 경로 확보 중...]

흑영의 동공이 뒤집히며 거품을 물었다.

그의 영혼 깊숙한 곳, 시스템의 백도어 경로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포착되었다.

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찾았다."

그 흐름의 끝에는, 아크 연합의 지배자 신무경의 고유 백도어 계정이 연결되어 있었다.

유진우가 이전에 무심결에 흘렸던 그 극비 정보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태현은 흑영의 머리통을 매개체 삼아, 신무경의 계정 데이터 내부로 깊숙이 해킹 코드를 밀어 넣었다.

놈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태현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 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치명적인 시스템 위협 감지!] [우회 연결된 백도어 계정 '신무경'이 강제 프로토콜을 실행 중입니다.] [위치 추적 및 공간 좌표 전송 완료율: 99%] [전송 대상: 쉘터 하우스 (Shelter House) 본체 중심부] [남은 시간: 3초]

"이 미친 새끼가...!"

태현의 안색이 처음으로 급격하게 굳어졌다.

신무경의 목표는 단순히 태현을 암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령 소대를 미끼로 던져 태현의 감각을 분산시킨 뒤, 그들의 연결망을 역이용해 쉘터 하우스의 절대 안전 구역을 통째로 붕괴시킬 치명적인 공간 타격 좌표를 송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치가 99.1%를 넘어가는 순간, 태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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