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용 코드의 신호기가 이 좌표에서 사라졌다.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마주할 준비를 해라, 무례한 쓰레기."
홀로그램이 파스스 깨어지며 뿜어내던 푸른 안광의 잔상이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아크 연합의 지배자, 신무경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기도 전에 강태현은 가볍게 발을 내뻗었다.
빠드득!
구렁텅이로 질질 끌려 들어가던 강비룡의 시체 주머니에서 굴러나온 미니 홀로그램 단말기 장치가 태현의 전투화 밑창에 완전히 짓눌려 박살 났다. 짓이겨진 기계 부품 사이로 불꽃이 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말이 많군. 짖는 개 치고 안 아픈 개가 없지."
태현은 전투화 끝에 묻은 기계 파편을 털어내며 흙바닥을 툭툭 찼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의 빈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얼굴에는 그 어떤 동요의 기색도 없었다. 신무경이 직접 오든, 그의 정예 병력이 쏟아지든 그것은 태현의 손익계산서 위에 올라올 새로운 수치적 자원에 불과했다.
"태현 씨, 정말 괜찮겠습니까?"
유진우가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겨왔다. 그의 두 손은 여전히 검자루를 꽉 쥔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회귀자로서 신무경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신무경은 아크의 수장입니다. 그가 가진 무력은 단순한 초인의 범주를 넘어섰어요. 지금 당장 방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뿐만 아니라 이 근처의 피난민들까지 전부 몰살당할 겁니다!"
"진우 씨. 호들갑 떨지 마세요."
한설아가 안경테를 가볍게 치켜올리며 태연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에는 복잡한 수치와 붕괴 그래프가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방금 전 강비룡의 소대를 통째로 매장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수년간 고장 난 상태창을 분석해 작성했던 '던전 포털 주기의 72시간 불확실 붕괴 위험성' 기밀 통계 자료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정밀 타격이었죠. 태현 씨는 이미 모든 변수를 계산에 넣고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기밀 통계 덕에 아크의 정예 추격대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치웠지."
태현이 유진우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리고 신무경이 보낼 다음 소대에 대비하는 것도 이미 계산이 끝났다. 내 사전에 무방비한 손실이란 없어."
태현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푸르스름한 상태창 너머로,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안쪽인 백엔드 데이터 인터페이스가 노이즈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가 기형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문자열을 훑어내렸다.
[백엔드 로그 검색 중...] [검색 결과: 미확인 메모리 누수 버그 (Error Code: 0x00F77A) 감지]
과거 1화에서 백엔드 시스템을 처음 조작할 때 메모해 두었던 바로 그 정체불명의 메모리 누수 에러 로그였다. 시스템이 가동된 이래로 패치되지 않고 쌓여온 이 쓸모없는 찌꺼기 데이터야말로, 태현에게는 가장 훌륭한 해킹의 문고리였다.
"시스템이 만든 에러는 시스템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지. 이 누수 코드를 쉘터의 방어 장벽 프로토콜에 이식한다."
태현이 허공에 손가락을 대고 찌르듯 밀어 넣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마력 파동이 에러 로그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강제로 데이터 왜곡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구축하려는 것은 단순한 콘크리트 성벽이 아니었다. 외부의 차원 대재앙이든, 신무경이 쏘아 보낼 파괴적인 광선이든, 물리 법칙 자체를 왜곡하여 모든 타격 대미지를 백엔드 단에서 일방적으로 '비활성화(Disable)' 처리하는 침입 불가 구역.
이름하여 '쉘터 하우스' 물리 면역 영토 코딩의 시작이었다.
[상태창 복사 및 백엔드 데이터 왜곡 발동] - 대상 영역: 강태현 지정 아지트 반경 500m 구역 - 이식 코드: 0x00F77A (메모리 누수 버그) - 출력 설정: 물리/마법 대미지 완전 굴절 장벽 (시스템 예외 처리 구역 설정) - 동기화율: 85% -> 81% (경고: 에러 누적으로 인한 전신 통증 발생 위험)
"윽...!"
가슴뼈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태현의 전신을 강타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며 혈관마다 에러 메시지가 물리적인 바늘이 되어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입안에 쇠 비린내가 훅 끼쳤지만, 태현은 턱을 굳게 사려 물며 신음을 삼켰다.
이 왜곡 권능은 만능이 아니다. 쓸 때마다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에러 통증과 동기화율 저하가 동반된다. 하지만 이 정도의 대가는 완벽한 요새를 완성하기 위한 통계적 비용에 불과했다.
"태현 씨! 몸에 무리가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유진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현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태현은 차갑게 유진우의 손을 쳐냈다.
"손대지 마. 내 내구도는 내가 계산해. 그것보다 진우 씨, 네가 데려온 그 쓸모없는 피난민들 관리나 똑바로 해."
"쓸모없다니요! 그들은 대재앙 속에서 갈 곳을 잃은 무고한 생존자들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내 요새에 무임승차는 없다."
태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들이 살아서 이 방벽 안의 공기를 마시고 싶다면,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야지. 난 세상을 구하는 영웅 놀이 따위엔 관심 없어. 내 규칙에 따르지 않는 인간은 그 즉시 방벽 밖의 고기방패로 던져질 뿐이다."
"강태현 씨!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철저히 장부처럼 다룰 수가 있습니까! 그건 독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유진우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의 정의감과 구원 신념이 태현의 비정한 효율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태현은 대꾸하는 대신 상태창의 조작을 마무리 지었다.
우우웅-!
순간, 아지트 주변을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기묘하게 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투명한 반구가 지상과 하늘을 덮어씌우며, 외부에서 불어오던 불길한 재앙의 바람과 먼지가 단 한 톨도 넘어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굳어 부서졌다.
동시에, 아지트 내부에서 불안에 떨며 웅크리고 있던 피난민들의 머리 위에 일제히 푸른빛의 시스템 조율 광선이 내리쬐었다.
"어...? 내, 내 몸이 왜 이러지?"
"스탯이... 스탯이 오르고 있어!"
피난민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공포가 아닌 경악과 환희의 비명이었다.
태현이 쉘터 하우스의 백엔드 설정을 완료함과 동시에, 영토 내부의 아군들에게 적용되는 '장부식 정밀 분배' 버프가 활성화된 것이다.
[쉘터 하우스 영토 효과 활성화] - 영토 내 등록된 거주민 스탯 보정식 가동 - 거주민 기초 스탯 상향 조정: 복사된 장부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화 정밀 분배 - 영토 버프: [물리 방어력 400% 증폭], [자원 생산 효율 500% 증가] - 특수 효과: 영토 내 거주민의 모든 액티브 스킬 효율 10배 증폭
"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유진우는 자신의 상태창에 표시된 믿기 힘든 수치의 변화를 보며 턱을 벌렸다.
자신이 이끌던 피난민 중에는 기초 체력이 바닥나 걷기조차 힘들어하던 노약자들과 일반인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기초 체력과 방어 스탯이 어지간한 C급 각성자 수준으로 폭증해 있었다.
단 한 명의 무고한 아군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으며, 침입한 적들에게는 지옥을, 내부의 순응자들에게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절대 안전과 무력을 제공하는 초인 공장.
"보이지?"
태현이 차갑게 비웃었다.
"네가 질질 짜며 백 명을 구하려고 똥꼬쇼를 할 때, 내 방식은 백 명을 완벽한 규격 전투원으로 개조해서 스스로 살아남게 만든다. 누가 더 효율적이지?"
유진우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태현이 민간인을 장부의 소모품처럼 다루는 악마적인 방식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완벽한 방벽 효과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살아남아 강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멸망한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구원은 낭만적인 영웅주의가 아니라 강태현의 비정한 철옹성 아래 머무는 것뿐이었다.
"내가... 틀렸던 건가."
유진우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침내 태현이 구축한 절대적인 규칙과 성벽의 가치 앞에 자신의 신념을 접어두고 종속되기를 자처했다.
"당신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지옥 같은 규칙이라도 지키겠어."
"현명한 선택이군."
태현이 짧게 답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태현의 목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쿨럭! 컥...!"
태현이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틈새로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현 씨!"
한설아가 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태현은 손을 저어 그녀를 제지했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시스템 과부하 통증. 백엔드를 무리하게 뒤흔들어 '쉘터 하우스'의 절대 영토 코드를 강제 활성화한 부작용이었다. 시야의 끝자락에서 시스템 동기화율 수치가 붉은빛으로 깜빡이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경고: 시스템 동기화율 78% 돌파] [영구적 시스템 에러 및 유전자 괴멸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즉시 근처의 '재앙 스퀘어' 오류 코어를 제거하여 정화 작업을 수행하십시오.]
"제길, 한계치에 너무 빨리 도달했군."
태현이 핏방울을 닦아내며 이를 갈았다.
이 통증을 리셋하고 하락한 동기화율을 완벽히 복구하려면, 세상의 대재앙이 뭉쳐진 지옥 구덩이인 '재앙 스퀘어'의 코어를 정화해야만 했다. 그곳은 남들에게는 유전자와 영혼이 꼬여 죽는 절대 금역이지만, 태현에게는 치명적인 에러를 지워내는 필수 정화 작업장이었다.
태현은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유진우가 이전에 무심결에 흘렸던 극비 정보를 떠올렸다.
'아크의 지배자 신무경만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고유 백도어 접속 패시브 식별 정보.'
신무경이 강비룡의 복수를 위해 직접 움직이거나 부하들을 보낼 텐데, 그가 백도어를 열어 쉘터의 좌표를 추적하려 드는 순간을 역으로 노려야 했다. 신무경 그놈의 머리통에 저주 코드를 역송출해 사지를 마비시킬 계획을 세우며, 태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설아 씨, 진우 씨."
태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 요새 근처의 재앙 스퀘어로 가서 내 내부 시스템을 정화하고 올 테니, 내가 없는 동안 이 쉘터 하우스의 방어선을 유지해라."
"알겠습니다. 제 연산 장치를 총동원해 방벽의 상태를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한설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진우 역시 검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숨을 걸고 한 명의 적도 쉘터 안으로 들이지 않겠어."
태현은 그들의 다짐을 뒤로한 채, 쉘터 하우스의 경계를 넘어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붉고 검은 에러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재앙 스퀘어의 구덩이를 향해 거침없이 보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의 실루엣이 황량한 대지 위로 길게 늘어지며 멀어졌다.
* * *
같은 시각.
강태현이 재앙 스퀘어의 오류 코어를 정화하기 위해 아지트를 비우고 떠난 바로 그 직후였다.
웅장하게 세워진 쉘터 하우스의 외곽 성벽 모서리 주변의 공기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대기 속에서, 소리도 없이 공간의 입자들이 굴절되며 사람의 형상들이 희미하게 뿜어져 나왔다.
스우우우...
눈에 보이지 않는 최첨단 차광 및 마력 차단 장막을 온몸에 두른 자들. 신무경이 자랑하는 아크 연합 최정예 암살 병단, '유령 소대'였다.
"목표물 강태현은 방금 요새를 이탈해 재앙 스퀘어 방면으로 이동했다."
장막 내부에서 극도로 억제된 차가운 음성이 송신기를 타고 흘렀다.
"방벽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다. 장막을 유지한 채 성벽을 넘어 내부의 피난민들과 한설아, 유진우를 선제 타격한다. 흔적도 남기지 말고 전부 도살해라."
은신 기술의 달인인 유령 소대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발들이 성벽의 가파른 경사를 타고 은밀하고 빠르게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칼날 끝에 묻은 치명적인 독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