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내 힘을 너를 위해 보태라고?"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조소의 온도가 던전 입구의 서늘한 바람을 타고 유진우의 안면에 날카롭게 꽂혔다.

유진우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뒤편의 피난민들을 가리켰다.

그의 등 뒤에는 땟국물 흐르는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남녀노소 80여 명이 엉켜 있었다.

"이들을 보십시오. 이 비극적인 서울 한복판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무고한 생존자들입니다. 강태현 씨, 당신 정도의 무력과 내 정보가 합쳐진다면 이들을 전부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습니다!"

유진우의 목소리에는 웅장한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를 인류의 구원자라 굳게 믿는 자 특유의 맹목적인 광기였다.

태현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턱을 까딱였다.

"한설아 씨."

"예, 태현 씨."

"저기 널려 있는 가축들의 가치 평가를 시작하지. 장부 열어."

한설아가 품 안에서 낡은 가죽 표지의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기계적으로 두드렸다.

유진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축이라니요? 지금 사람을 두고 무슨 망발을……!"

"평균 근력 8.1, 민첩 7.4, 체력 9.0."

한설아의 건조한 목소리가 유진우의 외침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전형적인 F급 이하 무능력자 민간인 집단입니다. 총원 82명 중 전투 가능 인원 0명. 하루 최소 소모 칼로리는 인당 2,200kcal. 일일 총합 18만 400kcal입니다."

그녀는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태현을 바라보았다.

"현재 시장 가치로 환산 시, 저들이 하루에 소모하는 식량의 가치는 C급 마석 3개 분량입니다. 반면 전투 기여도 및 던전 부산물 수거 효율은 영(0)에 수렴하는군요. 정밀 분석 결과, 이 집단은 움직이는 식량 소모형 블랙홀입니다."

"이, 이 악마 같은 자들이……!"

유진우의 등 뒤에 서 있던 한 장년의 남성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리가 물건이야? 당장 먹을 물도 없어서 굶어 죽어 가는데, 숫자로 우리 목숨값을 매겨?"

태현은 그 남성을 차갑게 응시했다.

"맞아. 물건이지. 그것도 유지비만 더럽게 많이 드는 불량 재고."

태현의 목소리에는 한 줌의 동정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과거의 배신은 그에게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사람은 오직 숫자로 환산되는 가치로만 증명되어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등 뒤에서 칼날이 들어오는 법이니까.

"유진우. 네가 이 쓰레기 더미를 끌고 다니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왜 그 파산 직전의 부채를 나한테 떠넘기려 하지?"

태현이 한 걸음 다가서며 유진우를 압박했다.

"네가 회귀해서 얻은 알량한 미래 지식이 대단한 대차대조표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강태현!"

유진우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자루를 꽉 쥐었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지며, 회귀자 특유의 강렬한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어! 당신처럼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멀어 동료를 고기방패로 쓰는 살인귀와는 달라!"

"살인귀라."

태현은 유진우의 분노를 비웃듯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태현의 시야에 반투명한 푸른색 백엔드 콘솔 창이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시스템 백엔드 데이터에 강제 접속합니다.]

[경고: 왜곡 권능 사용 시 시스템 동기화율이 하락합니다.]

[현재 시스템 동기화율: 89.2%]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찌릿한 에러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태현은 가볍게 턱을 굳히며 통증을 씹어 삼켰다.

이 정도 고통은 이미 일상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유진우의 몸을 관통해 그 너머의 시스템 코드를 파헤쳤다.

'어디 보자. 회귀자의 상태창 장부는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메모리 누수 버그 코드를 탐색합니다.]

태현은 이미 1화에서 발견해 두었던 '미확인 메모리 누수 버그' 코드 단서를 뇌내 장부에서 끄집어냈다.

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드는 가느다란 균열.

그 에러 로그의 흐름을 트리거 삼아, 유진우의 영혼과 동기화된 시스템 데이터 영역으로 백도어를 밀어 넣었다.

스르륵.

유진우가 감추고 있던 진짜 상태창이 태현의 눈앞에 강제로 복사되어 출력되었다.

================================== [대상 정보 복사 완료] - 이름: 유진우 (직업: 차원의 회귀자) - 보유 전설 무기: 성검 아스칼론 (복제 가능 옵션 보유) - 고유 패시브: [인과율의 가호 (Rank EX)] - 숨겨진 연결망: [아크 연합 백도어 접속 권한 ID: ARC-SYS-9921] ==================================

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검 아스칼론의 옵션이라.'

망설임은 사치였다.

태현은 즉각 골든핑거의 복사 권능을 발동시켰다.

[특수 권능 '상태창 복사'가 활성화됩니다.]

[대상 '유진우'의 전설 무기 옵션 '광휘의 인도자'를 강제로 복제하여 사용자 장부에 편입합니다.]

[복제 성공!]

[광휘의 인도자 (Rank S) 패시브를 획득했습니다.] - 효과: 아군 전체의 상태 이상 저항력을 50% 증가시키며, 공격 시 15%의 광휘 추가 피해를 부여합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강력한 마력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우는 자신의 소중한 능력 중 일부가 고스란히 복제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검자루를 쥔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태현의 시선을 끈 것은 단순한 무기 옵션이 아니었다.

'아크 연합 백도어 접속 권한 ID.'

그것은 자칭 인류의 방주라 불리는 '아크 연합'의 지배자, 신무경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고유 백도어 패시브의 식별 정보였다.

유진우의 데이터 영역 깊숙한 곳에 그 연결망의 흔적이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태현은 복사한 백도어 ID의 코드를 분석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참혹한 진실을 발견하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유진우. 너 아크 연합의 신무경을 철석같이 믿고 있더군."

"신무경 의장님은 이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영웅이시다! 그분은 남부의 거대 결계를 유지하며 수만 명의 생존자를 먹여 살리고 계셔!"

유진우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피난민들 역시 '아크 연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희망에 찬 눈빛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아크 연합으로 가면 우린 살 수 있어!"

"신무경 의장님이 우릴 구원해 주실 거야!"

태현은 그 가련한 가축들의 희망을 단 한마디로 처참하게 박살 냈다.

"신무경이 너희를 먹여 살린다고? 아니, 정확히는 너희를 '사육'하고 있는 거겠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유진우가 검을 반쯤 뽑아 들며 외쳤다.

태현은 한설아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설아 씨, 아까 연구하던 던전 포털 붕괴 주기 데이터와 아크 연합의 백도어 트래픽 로그를 대조해 봐."

한설아는 지체 없이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대조 완료했습니다. 아크 연합이 점유한 남부 결계의 유지 동력원은 마석이 아닙니다. 결계 내부로 유입된 피난민들의 '생명력'과 '스탯 수치'를 백도어로 실시간 흡수하는 흡성(吸星) 코드가 심어져 있습니다."

한설아가 태블릿 화면을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투사했다.

그곳에는 붉은색 에러 코드가 가득한 시스템 백엔드 로그가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ID: ARC-SYS-9921 / 난민 스탯 추출율: 12.4% / 상층부 간부 마력 변환율: 98.7%]

태현이 조목조목 짚어 가며 설명했다.

"신무경이 거둔 난민들의 평균 수명이 왜 3개월을 넘지 못할까? 왜 아크 연합의 상층부 간부들만 기이할 정도로 스탯이 폭등할까? 유진우, 네 그 잘난 회귀 지식으로는 이 장부가 이해가 안 가나?"

화면 속 숫자들이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아크 연합은 인류의 방주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인간들의 스탯과 영혼을 추출해 고위층의 강화 동력원으로 갈아 넣는 비인륜적인 '가축 공장'에 불과했다.

유진우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조작극을……!"

"조작이라고 생각하면 네 상태창에 연결된 그 백도어 신호나 끊고 말해."

태현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는 구원자랍시고 사람들을 이끌고 가 결국 신무경의 도살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던 거야. 아주 훌륭한 고기 중개업자더군."

주변에 서 있던 피난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우리가…… 가축이라고?"

"신무경 의장님이 우릴 죽이려 했다고?"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절망과 공포로 변했다.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태현을 훈계하려던 유진우의 가당치 않은 영웅주의가, 태현이 제시한 완벽한 생존율 효율 데이터 비교로 인해 가루가 되도록 짓이겨졌다.

유진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잃고 멍하니 허공의 데이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신념이 밑바닥부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태현은 그런 유진우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마지막 확인사살을 가했다.

"가치 없는 동정심은 독약이야, 유진우. 네 무능한 이상주의 때문에 저 사람들은 서서히 말라 죽어 가고 있었던 거다."

유진우는 입술을 깨물며 피가 흐르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이끄는 피난민들의 눈빛에도 태현을 향한 두려움과 유진우를 향한 원망이 뒤섞여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치이이익—!

태현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광역 주파수 무전기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간섭을 받아 강제로 채널이 고정된, 폭압적인 마력이 실린 음성이었다.

- [아크 연합 제3사냥꾼 군대 소대장, 강비룡이다. 이 주파수를 수신하는 인근 구역의 모든 각성자들에게 고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유진우와 한설아의 시선이 동시에 무전기로 향했다.

- [현재 구역 코드 042 일대에 거대 재앙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에 따라 아크 연합의 이름으로 강제 징집령을 선포한다. 하수 등급 전원은 즉시 인근 포털 좌표로 이동하여 자원 입대를 대기하라. 불응 시, 인류 배신자로 규정하여 즉결 처분한다.]

일방적이고도 강압적인 아크 연합의 선전포고였다.

태현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올 것이 왔다.

도살장의 주인들이 마침내 고기들을 직접 수거하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전 너머의 목소리가 끊기자, 사위에는 오직 피난민들의 거친 숨소리만 맴돌았다.

"강, 강비룡……! 아크의 학살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한 노인이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들은 이미 아크 연합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자원 입대지, 사지로 몰려 고기방패로 쓰이다 죽는 지옥행 급행열차였다.

유진우의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어졌다.

"신무경…… 나를 속인 건가. 결국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을 도구로만 보는 건 똑같단 말인가."

절망에 빠진 유진우를 보며, 태현은 혀를 내찼다.

"이제야 대가리가 깨졌나 보군, 회귀자."

"강태현 씨. 지금 비아냥거릴 때가 아닙니다! 강비룡은 아크 연합에서도 손꼽히는 잔혹한 사냥꾼입니다. 그가 이끄는 선발대는 자비가 없어요!"

태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위기는 곧 기회다.

그의 머릿속 장부기가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했다.

'아크 연합의 추격대. 그리고 80여 명의 무능력자 난민.'

이들을 어떻게 조합해야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까.

태현이 유진우에게 다가갔다.

"선택해라, 유진우."

"네?"

"이대로 강비룡의 도살장으로 기어들어 가 개죽음을 당할 건가. 아니면 내 밑에서 철저히 소모당하며 생존할 건가."

"소모당하다니요?"

"세상에 공짜 구원은 없어. 나를 방패로 삼고 싶다면, 기꺼이 내 장부의 부채로 등록되어라."

태현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젓자, 반투명한 붉은색 장부 창이 피난민들의 머리 위에 일제히 떠올랐다.

================================== [특수 권능 '장부식 인적 자원 관리론' 가동] - 대상: 유진우 세력 피난민 82명 - 조건: 절대 복종 및 노동력 제공 / 대가: 안전 구역 내 임시 체류 권한 - 임시 자원 등록을 진행하시겠습니까? (Y/N) ==================================

"서명해라. 싫다면 지금 당장 강비룡의 칼받이가 되든가."

태현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피난민들은 침을 삼켰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일제히 시스템 창의 동의 버튼을 눌렀다.

[등록 완료!] [피난민 82명이 '하급 소모성 인적 자원'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보유 자원 총량이 일시적으로 증가합니다.]

그때, 한설아가 태현의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녀는 태블릿의 한 구역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태현 씨,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강비룡이 이용하려는 인근 포털 좌표…… 72시간 내에 불확실 붕괴가 일어날 위험성이 94.2%에 달합니다."

한설아가 수년간 고장 난 상태창을 독자 연구해 작성한 포털 주기 보고서였다.

"붕괴 위험성이라."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거기에 아주 미세한 백엔드 에러 코드 하나만 얹어주면 어떻게 되지?"

"포털 내부의 차원 압력이 왜곡되어, 진입하는 즉시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겨 차원의 미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완벽한 덫이었다. 직접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다.

타다닥!

그때, 골목 저편에서 어둠을 뚫고 기괴한 마력 반응이 솟구쳤다.

검은 전술 슈트를 입고 붉은 안광이 도는 헬멧을 쓴 사냥꾼들. 강비룡의 선발대였다.

"찾았다. 도망친 가축 놈들과…… 아크의 수배자 강태현."

선발대의 대장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읊조리며, 마력 소총의 총구를 태현의 미간을 향해 겨눴다.

"반항하면 즉시 사살한다. 전원 무릎 꿇어라."

유진우가 검을 뽑아 들려던 찰나, 태현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가만히 있어."

태현은 소총의 붉은 레이저 조준선이 자신의 이마에 닿았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기괴한 버그 코드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시스템 백엔드 포털 제어 데이터에 강제 접속합니다.]

[좌표 에러값(NaN) 주입 대기 중……]

태현이 사냥꾼들을 보며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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