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직, 지지직!
허공이 찢어발겨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붉은색 노이즈가 폭발했다.
도망치던 박민우와 길드원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차원의 불균형 균열, ‘재앙 스퀘어’였다.
"어, 어째서 여기에 균열이……!"
박민우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균열 너머에서 풍겨오는 비린내와 기괴한 마력 파동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퇴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뒤편에서, 뚜벅거리는 일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이었다.
방금 전까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던 태현의 신체는 이미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데이터 왜곡: 회복 패시브 배율 수정 완료] [상태 효과: '초재생(Active)' 적용 중]
찢어졌던 가죽 재킷 사이로 붉은 빛이 감돌더니, 새살이 돋아나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아물었다.
태현은 목을 가볍게 좌우로 꺾었다. 뚜둑 하는 뼈마디 비틀리는 소리가 고요한 광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태현아! 강태현! 제발, 제발 살려줘!"
박민우가 무릎을 꿇고 태현을 향해 기어왔다. 조금 전까지 태현을 고기방패로 밀어 넣으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우리가 동료잖아! 내가 미쳤었어! 길드 자금도 다 너 줄게! 내 장비도 다 가져가!"
"동료라."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눈동자가 박민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태현에게 인간이란 오직 가치와 소모율로만 계산되는 장부상의 숫자에 불과했다.
"동료라는 단어는 단가가 너무 안 맞아. 너희는 그저 감가상각이 끝난 불량 자재일 뿐이지."
태현은 허공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박민우와 그 뒤에 얼어붙어 있던 길드원 3명의 머리 위에 가상 상태창이 복사되어 떠올랐다.
그들의 고유 스탯과 방어 수치들이 태현의 눈앞에 나열되었다.
"탱커가 필요하다고 징징댔던가."
태현의 손가락이 허공을 빠르게 훑었다. 백엔드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접속하는 해킹 시퀀스였다.
"그럼 원하는 대로 완벽한 탱커로 만들어 주지."
[데이터 왜곡(Data Distortion)을 시작합니다.] [대상: 등록번호 402-A '박민우' 외 3명] [수정 항목: 물리 방어력(DEF) -> 1, 마법 저항력(MRES) -> 1] [수정 항목: 위협도(Threat Level) -> 9,999 (MAX)]
"아, 악! 끄아아악!"
박민우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몸을 감싸고 있던 마력의 보호막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피부가 종잇장처럼 얇아진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이 그들을 덮쳤다.
동시에,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색 도발 광선이 재앙 스퀘어 너머의 괴수들을 자극했다.
"캬아아아악!"
"구르르르!"
균열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계의 사냥개들과 썩어 문드러진 살점의 구울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놈들의 붉은 눈동자는 오직 단 한 곳, 위협도 9,999로 고정된 박민우 일당만을 향해 있었다.
"안 돼! 오지 마! 저리 가라고!"
박민우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방어력이 1로 고정된 신체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사냥개의 이빨이 박민우의 허벅지를 스치자, 마치 두부처럼 살점이 찢겨 나가며 뼈가 드러났다.
"아아아악! 강태현! 이 괴물 같은 새끼야! 살려줘!"
"비효율적인 자원은 소모품으로 쓰는 게 정답이야."
태현은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수들이 박민우 일당을 뜯어먹는 동안, 태현에게는 단 한 마리의 마수도 접근하지 않았다.
완벽한 고기방패. 단 10초 만에 길드원 전체가 마수들의 어그로를 완벽히 끌어당긴 채 고기로 다져지고 있었다.
그 순간, 태현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으윽."
태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경고: 시스템 백엔드 강제 왜곡에 따른 동기화 거부 반응 발생!] [경고: 시스템 동기화율이 0.5% 하락합니다. 현재 동기화율: 97.5%] [디버프: '시스템 역류 통증(Lv.2)'이 활성화됩니다.]
뼛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왜곡 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이 동기화율 저하를 막지 못하면 영혼이 시스템 에러로 지워지게 된다.
"역시 빠르게 코어를 정화해야겠군."
태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마수들이 박민우의 시체를 뜯어먹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그는 재앙 스퀘어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때, 무너진 광장 중앙의 시계탑 잔해 속에서 낯선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
"흐읍……!"
짧은 신음소리.
태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한 여자가 무너진 석조 기둥 사이에 갇힌 채, 이빨을 악물고 단검을 쥐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에 가까운 은발, 그리고 지독하리만큼 차분한 파란 눈동자.
한설아였다.
그녀의 주위로 세 마리의 공허 사냥개가 침을 흘리며 다가가고 있었다.
보통의 생존자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손에 쥔 단검의 각도를 조절하며, 자신의 가쁜 숨소리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지 않는군."
태현이 잔해 위로 올라서며 말했다.
한설아는 고개를 들어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마수들이 더 빨리 반응해. 생존 확률이 12% 낮아지지."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극도로 차분했다.
"그리고 당신은 감정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방금 저 쓰레기들을 고기방패로 쓰는 걸 봤어."
태현의 입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올라갔다.
"그럼 내가 굳이 널 구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 가치는 통계와 분석이야. 난 이 구역의 시스템 에러 주기와 마수들의 젠 타임을 전부 기록해 뒀어."
한설아가 품 안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내 보였다.
"당신은 상태창을 조작할 수 있지? 하지만 시스템의 물리적 붕괴 주기까지는 모를 거야. 내가 그걸 제공할 수 있어. 난 쓸모없는 고기방패보다 훨씬 오래가는 자원이야."
태현은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거짓도, 얄팍한 동정심을 구걸하는 위선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거래 제안뿐이었다.
"마음에 드는군."
태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데이터 왜곡: 지정 무기 '기본 단검' 공격력 수정] [공격력(ATK): 12 -> 9,999 (Temporarily)]
태현이 가볍게 던진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단검에 깃든 백엔드 왜곡 마력이 폭발적인 궤적을 그리며 사냥개 세 마리를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퍼엉! 퍼엉! 퍼엉!
사냥개들의 신체가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단 한 격이었다.
태현이 다가가 잔해를 가볍게 걷어차 한설아를 꺼내 주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새로운 시스템 라벨을 지정했다.
[요새 자원 등록 완료] [이름: 한설아] [지정 등급: 도서관 사서 (Library Keeper)] [상태: 영구 귀속 및 안전 자원 분류]
"사서?"
한설아가 흙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내 절대 안전 구역이 완성되면, 넌 거기서 모든 데이터를 관리하게 될 거다. 밥값은 철저히 해야 할 거야."
"바라던 바야. 위선자들이 가득한 '아크' 연합에서 건전지 취급당하는 것보단, 당신의 명확한 장부가 백 배는 안전하니까."
한설아는 품에서 붉게 깜빡이는 통계 디스크 하나를 꺼내 태현에게 건넸다.
"이게 내 생존 신고서야. 이 일대 던전 포털의 연결선은 매 72시간 주기마다 극악의 불안정 폭주 패턴에 돌입해 소멸해. 지금이 바로 그 폭주가 시작되기 10분 전이지."
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첩에 기록된 데이터 로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스템 백엔드의 수치와 일치하고 있었다.
"확실히 쓸모가 있군."
하지만 칭찬도 잠시, 태현의 전신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뒤틀렸다.
"윽……!"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겨우 버텨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마치 뜨거운 납물처럼 온몸을 태우는 감각이었다.
[경고: 시스템 동기화율 97.4%] [경고: 주기적인 오류 코어 정화가 지연될 경우, 영혼 데이터의 영구 손상이 발생합니다.]
"상태가 안 좋군."
한설아가 태현의 안색을 살피며 냉철하게 말했다.
"이 통증을 없애려면 저 재앙 스퀘어의 심부로 가야 해. 거기에 있는 '오류 코어'를 뜯어내서 흡수해야만 내 동기화율이 리셋되니까."
태현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재앙 스퀘어의 붉은 소용돌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라. 길을 잃으면 넌 여기서 고기방패로 소모될 테니까."
"내 계산에 오차는 없어."
한설아는 주저 없이 태현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붉은 노이즈와 파편들이 휘몰아치는 재앙 스퀘어의 경계선을 넘어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내부는 기괴했다. 하늘은 검게 물들어 있었고, 시스템의 에러 코드들이 허공에 깨진 글자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텍스처가 깨지며 기괴한 기하학적 문양들이 솟구쳤다.
"거의 다 왔어. 이 좌표의 중심부에 코어가 존재해."
한설아가 단말기를 보며 소리쳤다.
그 순간,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쿵! 쿵!
묵직한 철제 마찰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며,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온몸이 부서진 시스템 장갑판과 에러 코드로 뒤덮인 강대한 철제 괴수였다.
[주의! 재앙 스퀘어 수호 기계 '데이터 가고일(Data Gargoyle)'이 출현했습니다!] [개체 상태: 시스템 폭주 및 수호 모드 활성화]
가고일의 거대한 석조 날개가 펄럭이자, 주변의 에러 노이즈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리고 가고일의 머리 중앙에 위치한 외눈에서 시뻘건 살상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익!
공기를 태우는 기분 나쁜 고주파 소음과 함께, 레이저의 초점이 태현의 가슴팍, 심장 궤적에 완벽하게 고정되었다.
[락온(Lock-on) 완료. 살상 프로토콜을 개시합니다.]
피할 틈도 없이, 가고일의 안광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머금고 팽창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살상의 궤적이었다.
태현의 눈동자에 붉은 레이저 빛이 가득 들어찼다.
콰아아아앙!
대기를 찢는 파음과 함께 붉은 광선이 폭발했다.
피할 수 없는 속도. 하지만 태현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허공에 떠오른 백엔드 로그 화면을 분주히 두드리고 있었다.
'찾았다.'
1화에서 시스템 폭주 속에서 백엔드 데이터를 헤집다 발견했던 기괴한 에러 로그.
용도 불명의 쓰레기 데이터로 무시하고 넘겼던 ‘미확인 메모리 누수 버그’의 코드 단서였다.
`[Sys_Error: Memory Leak Detected at 0x09F-A1]`
태현은 망설임 없이 그 쪼개진 코드 조각을 복사해 가고일의 타기팅 레이저 제어 장치에 강제로 붙여넣었다.
`Patch: Target_Vector_X -> Target_Vector_X + [0x09F-A1 (Leak Value: NaN)]`
지직! 지지지직!
태현의 심장을 향해 짓쳐들던 시붉은 광선이 공중에서 기괴하게 꺾였다.
메모리 누수로 인해 타기팅 좌표 연산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콰르릉!
굴절된 광선은 태현의 어깨를 한 끗 차이로 비껴가 뒤편의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들을 통째로 증발시켰다.
"……!"
한설아의 파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레이저의 물리적 궤적 자체를 해킹으로 비틀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한 까닭이었다.
"캬오오오오!"
눈앞의 먹잇감을 놓친 데이터 가고일이 기괴한 기계음을 내지르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태현의 가슴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다시 몰려왔다.
"흡……!"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전신의 신경계가 역류하는 마력에 갈기갈기 찢기는 감각에 태현의 허벅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경고! 강제 데이터 왜곡에 따른 동기화 페널티 발생!] [시스템 동기화율이 0.6% 하락합니다! 현재 동기화율: 96.9%]
한계치에 가까워질수록 통증의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강태현 씨!"
한설아가 급히 단말기를 두드리며 외쳤다.
"가고일의 코드가 꼬이면서 주변의 에러 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어! 던전 붕괴 타이머가 앞당겨졌어!"
그녀가 보여준 단말기 화면에는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포털 붕괴 잔여 시간: 02분 14초]
10분 남았다던 탈출 시간은 고작 2분 남짓으로 단축되어 있었다.
시간 내에 저 거구를 쓰러뜨리고 심부의 오류 코어를 적출하지 못하면, 이 공간과 함께 존재 자체가 포맷된다.
"크르르르……!"
메모리 누수 버그로 인해 폭주한 데이터 가고일의 온몸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놈의 부서진 장갑판 사이로 붉은 에러 텍스트들이 뱀처럼 들끓으며 신체를 강제로 거대화시키고 있었다.
[주의! 대상이 '오버클럭 에러 상태: 광폭화'에 진입합니다!]
한 번 더 왜곡 권능을 무리하게 사용했다간 동기화율이 위험선 이하로 곤두박질칠 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2분을 흘려보내면 공간과 함께 소멸한다.
퇴로는 끊겼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태현은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2분이라."
장부상의 계산은 이미 끝났다.
태현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허공의 허름한 시스템 백엔드를 향해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