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가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바닥은 깨진 콘크리트 파편과 검붉은 오물로 가득했다.
등 뒤로 차가운 철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잠금장치가 덜컥거리며 맞물리는 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선명했다.
"태현아,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탱커잖아! 네가 버텨줘야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살지!"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길드장 박민우의 다급한 외침.
그 뒤를 이어 다른 길드원들의 비겁한 웃음소리가 웅성웅성 섞여 들었다.
"어차피 쟤는 스탯도 어정쩡하잖아. 여기서 시간이라도 끌어주면 고맙지." "얼른 뛰어! 저 괴물 놈이 태현이 뼈를 씹어 먹는 동안 도망쳐야 해!"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자신을 미끼로 던져두고 저들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인간들의 발버둥.
강태현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피가 섞인 붉은 침이 콘크리트 바닥을 적셨다.
가슴 뼈가 서너 대 부러져 숨을 쉴 때마다 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눈앞에는 이 지옥의 전장을 지배하는 네임드 마수, '심연의 포식자'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세 개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들거리며 태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흘러내린 침이 바닥을 녹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절망에 울부짖거나 신을 찾았을 터였다.
하지만 15년 동안 이 바닥에서 구른 고인물 강태현의 눈은 달랐다.
그의 시야를 가로막은 것은 붉게 점멸하는 경고 문구들이었다.
[WARNING: 시스템 내부 메모리 오버플로우 발생!] [WARNING: 데이터 동기화 지연율 89% 돌파!] [오-류-오-류-오-류-오-류]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세상 사람들은 이 상태창을 절대적인 신의 권능이자 우주의 진리라고 숭배했다.
하지만 태현의 눈에는 그저 다르게 보였다.
이것은 온통 누더기 같은 땜질식 패치 코드로 도배된, 엉성하기 짝이 없는 '불량 소프트웨어'에 불과했다.
"신비는 개뿔……."
조잡하게 짜인 스파게티 소스코드일 뿐이다.
태현은 심호흡을 하며 시야 구석, 기괴하게 깨진 텍스트 상태창 끝자락을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실시간으로 깜빡이는 에러 로그가 있었다.
`[Warning: Unidentified Memory Leak Bug detected in segment 0x7FFF3...]`
시스템 백엔드 로그에 찍힌 미확인 메모리 누수 버그 코드.
그것은 이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이 품고 있는 치명적인 구멍이었다.
태현은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상태창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꽉 움켜쥐었다.
허공의 빛이 유리처럼 우드득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버그가 있으면, 고쳐 쓰는 게 개발자의 일이지."
태현의 손끝이 시스템의 백엔드 데이터 영역을 강제로 비집고 들어갔다.
백도어 경로가 강제로 개방되는 감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과 함께, 시스템의 장부가 그의 눈앞에 통째로 복사되어 펼쳐졌다.
스마트폰의 루팅 권한을 획득한 것처럼, 시스템의 근원 데이터가 손끝에서 출렁였다.
[특수 권능 '백엔드 데이터 왜곡'이 각성 완료되었습니다.]
================================== [권능: 백엔드 데이터 왜곡 (Grade: EX)] - 설명: 시스템의 오류 및 백도어를 이용해 대상의 상태창 데이터를 강제로 왜곡·수정합니다. - 제약: 데이터 왜곡 시 전신에 극심한 에러 통증이 동반되며, 시스템 동기화율이 영구적으로 하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재앙 스퀘어 코어 정화로 상쇄 가능) ==================================
"하하, 진짜 되네."
태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눈앞의 심연의 포식자가 굉음을 지르며 덮쳐왔다.
길이만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앞발이 태현의 머리통을 짓이기기 위해 낙하했다.
스치기만 해도 상체가 날아갈 파괴력이었다.
태현은 눈을 부릅뜨고 놈의 머리 위에 떠오른 상태창을 응시했다.
================================== [심연의 포식자 (네임드)] - 근력: 189 - 민첩: 120 - 공격력: 4,700 (치명적) ==================================
수치가 선명하게 보였다.
태현은 정신을 집중해 놈의 데이터 장부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놈의 공격력 수치를 머릿속으로 지워버렸다.
`Delete.`
4,700이라는 숫자가 순식간에 공백으로 변하더니, 이내 차가운 숫자로 대체되었다.
`0.`
[데이터 왜곡을 실행합니다.] [경고! 백엔드 왜곡에 따른 시스템 부하가 발생합니다!]
그 순간, 태현의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갈 듯한 극통이 덮쳐왔다.
"끄으윽!"
뼈마디가 통째로 으스러지고 뇌수를 송곳으로 휘젓는 듯한 고통이었다.
귓가에는 기계적인 경고음이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시스템 동기화율이 1.2% 하락합니다! 현재 동기화율: 98.8%]
하지만 고통은 대가일 뿐, 결과는 확실했다.
콰아아앙!
심연의 포식자의 거대한 앞발이 태현의 어깨를 그대로 강타했다.
바닥의 콘크리트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먼지 구름이 일었다.
하지만 일어난 결과는 기묘했다.
태현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머리 위에 떠오른 대미지 표기는 선명했다.
[Damage: 0]
"크르릉?"
마수가 자신의 앞발을 내려다보며 의아한 듯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분명 온 힘을 다해 짓밟았는데, 눈앞의 사냥감은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오히려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프지도 않네, 개새끼야."
태현은 옆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철근을 비틀거리며 쥐어 잡았다.
그리고 놈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방어력 수치 역시 깔끔하게 지운 뒤 '0'으로 고쳐 썼다.
동시에 자신의 완력 수치 장부를 일시적으로 오버클럭해 백 배로 뻥튀기했다.
[시스템 왜곡: 일시적 완력 증폭 (12 -> 1,200)] [경고! 영혼 동기화율 저하 위험!]
척추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다시 한번 전신을 휩쓸었다.
하지만 태현은 이빨이 깨질 정도로 악물며 버텨냈다.
온몸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며 터질 듯한 힘이 차올랐다.
태현은 철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쉬이익!
단순한 휘두름이었다. 어떠한 화려한 스킬도 섞이지 않은 평범한 평타.
하지만 그 끝에 실린 파괴력은 자연재해와 같았다.
퍼어어엉!
철근이 마수의 대가리에 닿는 순간, 괴물의 거대한 신체가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뼈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전장의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단 한 방.
네임드 몬스터가 형체도 없이 폭사해 버렸다.
태현은 피비린내 나는 폭풍 속에서 천천히 철근을 내려놓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서 쇳소리가 났다.
"하아, 하아…… 동기화율이 깎이는 건 꽤 뼈아프군."
하지만 해결책은 알고 있었다.
재앙 스퀘어로 들어가 코어를 정화하면 이 수치는 다시 리셋된다.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태현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치료 패시브 스킬의 초당 회복 수치를 강제로 수천 배 왜곡했다.
[시스템 왜곡: 자가 치유 패시브 수치 왜곡 (초당 1 -> 5,000)]
우드득! 우득!
으스러졌던 갈비뼈가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고, 찢어진 장기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단 3초 만에 태현은 완벽하게 정상 상태로 회복되었다.
피로 물든 옷을 대충 털어내며 태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 빚을 갚아줄 시간인가."
자신을 미끼로 버려두고 도망친 길드원들.
그들이 머물던 안전 구역의 장부에서 그들의 가치는 이미 '폐기물'로 분류되었다.
쓸모없는 자원들은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태현은 철문을 향해 걸어갔다.
두꺼운 철제 잠금장치 따위는 왜곡된 완력 앞에 종이 장난감에 불과했다.
콰직!
손가락 끝으로 철문을 가볍게 잡아당기자, 강철 자물쇠가 힘없이 뜯겨 나갔다.
어두운 복도 너머, 멀리서 비명과도 같은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태현은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의 넓은 광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목소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왜 여기서 열리는 거야?!" "말도 안 돼! 포털 주기는 아직 멀었잖아!"
박민우와 길드원들이 광장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공간 자체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생겨난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였다.
대재앙의 전조이자, 불완전한 시스템이 붕괴하며 발생하는 차원의 불균형 균열.
'재앙 스퀘어'였다.
주변의 모든 물리 법칙을 집어삼키며 웅웅거리는 검은 폭풍이 그들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도망치려던 배신자들의 앞길이 가차 없이 포위된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벽 뒤에서 지켜보던 태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도망친 곳이 하필 지옥이라니."
낮게 읊조리는 태현의 목소리에 차가운 실소가 섞여 들었다.
태현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 어어……?"
길드원 중 가장 눈치가 빠른 녀석이 먼저 태현을 발견하고 손가락을 떨었다.
그의 손에 들린, 마수의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근을 본 박민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강태현? 네가…… 네가 어떻게 살아 있어?"
"그게 중요해?"
태현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박민우의 상태창을 복사해 띄웠다.
================================== [대상: 박민우] - 클래스: 돌격 전사 - 현재 상태: 극도의 공포 - 자원 효율성: F (가치 없음, 폐기 권장) ==================================
태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자꾸 멍청한 질문만 하는군."
"태, 태현아! 오해야! 아까는 어쩔 수 없었어! 네가 탱커니까……!"
박민우가 비굴하게 손을 내밀며 다가오려 했다.
그 순간, 재앙 스퀘어의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척추가 돋아난 기괴한 마수들이 떼를 지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급 마수 '공허의 사냥개'들이었다. 그 수가 어림잡아 수십 마리.
"으아악! 온다! 태현아, 제발! 네가 앞을 막아줘! 넌 방어력이 높잖아!"
박민우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태현을 고기방패로 밀어 넣으려 했다.
태현은 가만히 서서 머릿속으로 백엔드 명령어를 타이핑했다.
"탱커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다면 만들어 주면 그만이다.
태현의 시선이 박민우와 길드원들의 상태창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위협도' 스탯을 강제로 편집했다.
`Edit: Threat Level -> 9,999 (Max)`
[데이터 왜곡을 실행합니다.] [경고! 강제 데이터 왜곡에 따른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척추를 타고 극심한 에러 통증이 뇌를 찔렀다.
태현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묵묵히 통증을 씹어 삼켰다.
[시스템 동기화율이 0.8% 하락합니다! 현재 동기화율: 98.0%]
수정은 완벽했다.
박민우 일당의 몸에서 기괴할 정도로 짙은 붉은색 마력 파동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수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미끼가 된 셈이었다.
"캬아아아악!"
공허의 사냥개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태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직 박민우 일당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어? 어어?! 왜 나한테만 오는데!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살려줘! 강태현! 제발 살려줘!"
박민우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수들의 이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비명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태현은 그 비참한 단말마를 들으며, 유유히 마수들 사이를 걸어 지나갔다.
그에게는 단 한 마리의 마수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주 훌륭한 고기방패들이야."
쓸모없는 폐기물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자원이 된다.
이것이 태현이 정립한 '장부식 인적 자원 관리론'의 기초였다.
태현의 시선은 이미 박민우 일당을 벗어나, 재앙 스퀘어의 심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오류 코어를 정화해야만, 방금 깎인 동기화율을 복구할 수 있다.
검은 폭풍을 헤치며 심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주의! 재앙 스퀘어의 코어 데이터가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강제 잠금(Lock)되어 있습니다.]
[시스템 권한 충돌 발생!]
태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군가 시스템 백도어를 통해 이 재앙 스퀘어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경고였다.
그리고 소용돌이 너머, 정체불명의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