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벽이 신전의 대리석 바닥을 뚫고 솟구쳤다.
사방을 메운 공기가 비명지르듯 진동했다. 서지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한강진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 속에서도 한강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선에 가벼운 미소마저 감돌았다.
"같이 죽자고 하셨습니까?"
한강진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양하겠습니다. 제 장부에 손실을 기록하는 건 질색이라서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한강진의 옷깃에 닿기 직전, 붉은 장벽의 마력이 그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위험: '황폐의 영역' 내부에서 초당 최대 마력의 15%가 지속적으로 소멸합니다!] [경고: 마력 소모 디버프가 플레이어의 영혼 각인과 동조를 시도합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일반적인 유저라면 마력이 고갈되어 스킬 한 번 쓰지 못하고 말라 죽었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한강진의 눈동자는 그 소멸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한 곳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력이 깎여 나가는 정확한 주기. 시스템이 피해 판정을 내리는 0.5초의 미세한 간극.
보스 몬스터의 무적 기믹 틈새뿐만 아니라, 유저가 목숨을 걸고 펼친 자폭 결계의 틈새 역시 완벽한 '기믹 윈도우(Gimmick Window)'였다.
"채지안 씨, 준비된 장부를 펼치십시오."
"이미 대기 중입니다, 대장."
결계 너머에서 들려오는 채지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기계적이고 서늘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빛으로 봉인되어 있던 가죽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2화에서 획득한 이후 줄곧 품고 다녔던 정체불명의 고대 문서가 마침내 온전한 형태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이템 정보] | 항목 | 상세 정보 | | :--- | :--- | | 아이템명 | 고대 제국의 면세 칙령 (해독 완료) | | 등급 | 레전더리 (봉인 해제) | | 효과 | 인스턴스 전장 및 강제 거래 발생 시, 시스템 세금 징수율을 영구적으로 90% 감면. 동결 자산의 즉시 해제 권한 부여. | | 해독자 | 채지안 (세무 광인 각성 버프 적용) |
"세무법 제4조 2항 및 제12조에 의거, 해당 영지의 모든 강제 경매 수수료는 임시 동결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채지안이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차율 0%. 면세 증서의 효력이 지금 이 순간부터 시스템 소급 적용됩니다. 대장, 마음껏 뜯어내십시오."
서지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뭐...? 면세...? 그딴 아이템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존재합니다. 당신들이 사냥터 통제하고 유저들 등쳐먹을 때, 저희는 세법을 공부했거든요."
한강진이 차갑게 비웃으며 오른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칠흑 같은 어둠의 파편들이 뿜어져 나와 서지수의 전신을 휘감았다. 결계의 붉은 마력이 한강진의 손끝으로 강제 수렴되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차원 거래소 (강제 경매)'를 개방합니다!] [경매 대상: 서지수의 액티브 스킬 '황폐의 영역 (황각 등급)'] [경매 조건: 기믹 윈도우 타임어택 (제한 시간: 15초)] [시스템 권능 적용: 대상의 영혼 귀속 스킬을 강제 가압류하여 매물로 등록합니다!]
"아아아악! 내 스킬이! 내 스킬이 왜 떨어져 나가?!"
서지수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붉은 사슬에 묶인 책 한 권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일생을 바쳐 아틀라스의 자본력으로 겨우 손에 넣은 전설적인 자폭 결계 스킬북이었다.
공중에 거대한 경매창이 떠오르며 주변의 공기를 압도했다.
[실시간 강제 경매 현황] | 경매 번호 | 매물명 | 현재 최고 입찰가 | 남은 시간 | | :--- | :--- | :--- | :--- | | #0991 | [액티브 스킬북: 황폐의 영역] | 1,000 골드 (기본가) | 12초 | | **수수료율** | **99% (독점 임의 책정)** | **유찰 시 소멸** | - |
"미친놈... 진짜 미친놈이구나!"
서지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건 내 영혼 각인 스킬이야! 이걸 잃으면 내 캐릭터는 그냥 깡통이 된다고!"
"그럼 사십시오. 본인 물건을 본인이 돈 주고 사는 것도 나름 신선한 경험 아니겠습니까?"
한강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참고로 유찰되면 이 스킬은 시스템 내부에서 영구히 데이터 삭제 처리됩니다. 아, 시간은 벌써 8초 남았군요."
"한강진!!!"
서지수의 눈에서 핏물이 고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허공을 휘저으며 입찰 버튼을 눌렀다. 스킬을 잃는다는 것은 아틀라스 내에서의 지위와 사장단으로 올라갈 모든 기회를 상실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동시에, 결계 외부에서 채지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심연의 신전 전체를 울렸다.
"서지수 팀장님. 헛수고는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방금 당신이 이 비밀 던전 공략을 위해 아틀라스 본사에서 승인받은 법인 계좌의 잔고를 실시간으로 교란했습니다."
"뭐... 라고?"
"주주 통신망 및 길드 연합 게시판에 당신의 공략 실패 보고서와 자금 낭비 내역을 실시간으로 박제 처리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길드 신용 등급은 쓰레기통으로 처박히는 중입니다."
채지안이 띄워 올린 아틀라스의 실시간 경제 지표는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틀라스 길드 신용도 하락 추이] | 기준 시간 | 신용 등급 | 예상 손실액 | 주주 반응 | | :--- | :--- | :--- | :--- | | 10분 전 | AAA | - | 안정적 | | 현재 | C- (투자 경고) | 4,200,000,000 골드 상당 | 폭동 직전 |
"아틀라스의 주식 가치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요."
채지안의 기계적인 보고에 서지수는 숨을 쉬지 못했다. 눈앞에 떠오른 경매 제한 시간은 단 3초.
"으아아아아! 입찰! 최고가 입찰!!!"
서지수가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가진 개인 비상금과 길드 자금의 마지막 한 푼까지 전부 쓸어 담은 금액이 경매창에 입력되었다.
[입찰 확인: 플레이어 '서지수'가 4,500,000 골드를 입찰했습니다!] [최종 낙찰: '황폐의 영역' 스킬북이 서지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하아... 하아... 지켰어... 내가 지켰다고..."
서지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으려던 찰나, 한강진의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졌다. 맑고 청아한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신전의 침묵을 깨뜨렸다.
[수수료 정산: 수수료 99% (4,455,000 골드)가 '독점'의 금고로 입금됩니다!] [세금 감면 적용: 최종 입금액 4,455,000 골드가 즉시 가용 자산으로 등록됩니다!] [경고: 낙찰자는 수수료 지불 대가로 영구 마력 스탯의 90%를 시스템에 압류당합니다!]
"어...?"
서지수의 안색이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변했다. 스킬은 인벤토리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푸른 마력의 기운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마력 스탯이 바닥을 치면서 스킬을 시전할 최소한의 마력 통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스킬을 사셨으니 돌려드리는 게 시장의 도리지요."
한강진이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수수료는 제 몫입니다. 마력이 없는 마법사라니, 아주 훌륭한 장식품이 되셨군요."
"이... 악마 같은... 큭...!"
서지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며 캐릭터의 정신력이 한계를 초과했다는 시스템 경고가 떴다. 결국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져 기절했다.
[황폐의 영역 결계가 시전자의 기절로 인해 강제 해제됩니다!]
결계를 이루던 붉은 장벽이 미세한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먼지 구덩이 사이로 강태윤이 헛구역질을 하며 걸어 나왔다.
"어우, 징그러운 놈. 자기 기술을 자기 돈 내고 사게 만드냐? 그것도 수수료로 99%를 뜯어가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정당한 거래 방식입니다, 강태윤 씨."
한강진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리고 태윤 씨도 잊지 마십시오. 이번 레이드의 정산 수수료 역시 99%입니다."
"아오! 내가 진짜 빚만 다 갚으면 네놈 밑바닥에서 탈출한다!"
강태윤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아틀라스를 상대로 이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신전의 천장이 갈라지며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내렸다. 히든 던전 '심연의 신전'이 완전히 공략되었음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전 서버 유저들의 귓가를 강타했다.
[서버 전역 공지: 히든 던전 '심연의 신전' 최초 공략 성공!] [공략 파티: 독점(차원 거래상), 채지안(세무사), 강태윤(수호자)] [공략 보상: 서버 전역 경제 활성화 버프 적용 및 아틀라스 독점 전선 붕괴!]
순간, 아스텔리아 공식 홈페이지와 커뮤니티 전역은 대폭발을 일으켰다.
- [일반] 야, 방금 서버 공지 봤냐? 독점 걔 또 사고 쳤다ㅋㅋㅋㅋㅋ - [일반] 아틀라스 대기업 형님들 떼거지로 몰려가서 소수정예 파티한테 털린 거 실화냐? - [일반] 서지수 스탯창 보셈ㅋㅋㅋ 마력 통 90% 날아가서 마법사인데 평타 치고 다녀야 댐ㅋㅋㅋㅋ - [일반] 독점 저 새끼는 진짜 악마냐? 수수료 99% 뜯어서 적을 고사시키네ㅋㅋㅋㅋㅋ 수수료 깡패 인정한다. - [일반] 이제 아틀라스가 통제하던 사냥터 다 풀리는 거임? 갓독점 찬양해라 진짜!!
커뮤니티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던 채지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완벽합니다. 아틀라스의 여론은 완전히 바닥을 쳤고, 저희 금고에는 가용 자금 오백만 골드가 확보되었습니다. 이 정도 자본이면 다음 단계의 시장 독점 계획을 실행하기에 충분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채지안 씨. 이제 아틀라스가 세운 가짜 금융 시스템을 통째로 뒤흔들 차례입니다."
한강진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배신했던 자들의 숨통이 서서히 조여오는 감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신전 내부의 모든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공기가 얼어붙듯 차가워졌고, 하늘의 황금빛 보상 메시지들이 기괴한 노이즈와 함께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기분 나쁜 기계음과 함께 가상현실 인터페이스 전체가 붉은색 에러 코드로 뒤덮였다.
[시스템 경고: 비인가 트랜잭션 및 비정상적 경제 행위 감지!] [시스템 경고: 게임 내 경제 밸런스를 훼손하는 특정 클래스의 권능을 제한합니다!]
강태윤이 검을 뽑아 들며 주위를 경계했다.
"뭐야? 보스 몹이 또 나오는 건가? 기믹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채지안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이건 게임 몬스터의 기믹이 아닙니다. 시스템 자체의 강제 개입... 운영자의 권한 행사입니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차원의 균열이 열렸다. 그 틈새 사이로 푸른색의 데이터 스트림이 쏟아져 내리며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아바타가 아니었다. 이 가상 세계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아틀라스와 결탁하여 모든 시스템 규칙을 쥐고 흔드는 존재.
시스템 총 관리 기획자, 천도현의 사념체였다.
허공에 떠오른 천도현의 푸른 눈동자가 한강진을 굽어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시스템의 물리 법칙을 직접 뒤흔들며 한강진의 고막을 압박했다.
[플레이어 '독점'. 너의 선을 넘은 시장 교란 행위는 여기까지다.]
그의 선언과 함께 한강진의 머리 위로 시뻘건 패치 로그 스트림이 직접 투사되었다. 한강진의 고유 권능인 '차원 거래소'를 정조준한, 전례 없는 강제 무력화 패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