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리릭-!
서지수가 자랑하던 무적의 검은 방어막이 마력 루프의 꼬임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흩날리는 반투명한 파편 너머로, 그녀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성당 가득 들어찬 검붉은 마기가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리려던 그 찰나였다.
서지수의 절망적인 시선이 향한 곳은 성당 구석의 거대한 돌기둥 뒤였다.
그곳에 서 있는 세 사람. 그 중심에서 붉은 세무 인장을 가볍게 손끝으로 굴리며, 비정하게 입꼬리를 올린 남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랜만입니다, 서지수 사장님."
한강진의 목소리는 폭주한 보스의 괴성 속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렸다.
"하, 한강진……? 네가 왜 여기……!"
서지수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갈라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들의 손으로 가문째 짓밟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아스텔리아의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는 미지의 존재이자, 모든 아틀라스 소속 길드원들이 치를 떠는 공공의 적 '독점'의 얼굴을 하고서.
쾅-!
심연의 심판관이 내리치는 대검이 지면을 강타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성당 바닥이 뒤집히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즉사 판정의 검은 파동이 서지수의 발밑까지 들이닥쳤다.
[기믹 윈도우 활성화: 12초]
"시간이 얼마 없군요. 바로 비즈니스를 시작하죠."
한강진이 오른손을 가볍게 퉁겼다.
손무릎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붉게 타오르는 마법 진영이 폭주하는 보스의 발밑을 중심으로 성당 전체로 뻗어 나갔다. 허공에 거대한 차원의 균열이 찢어지며 푸른빛의 경매장 인터페이스가 강제로 사방을 뒤덮었다. 보스의 즉사급 광역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오직 찰나의 순간 동안만 열리는 절대적인 안전지대이자 착취의 공간.
차원 거래소가 개방되었다.
"지안 씨."
"준비 완료했습니다, 대표님."
뒤에 서 있던 채지안이 품 안에서 빛바랜 양가죽 문서를 꺼내 들었다. 가죽 표면에는 고대 제국의 세무 인장과 함께 붉은 사슬 모양의 봉인이 얽혀 있었다. 2화에서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해독되지 못했던 '봉인된 세금 감면 증서'였다.
채지안의 손가락이 문서 위를 빠르게 훑었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고대 면세 칙령 제47조, '비정상적 차원 간섭으로 인한 재화 이동 시 제국은 징벌적 세율을 면제한다'를 적용합니다. 해독율 100%. 시스템 인가 확인."
파지직!
양가죽 문서를 얽매고 있던 붉은 사슬이 차례로 끊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한강진의 시야에 화려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안내: '봉인된 세금 감면 증서'의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세율 변동 적용: 차원 거래소 이용 시 발생하는 일시적 동결 세율이 기존 90%에서 10%로 영구 감면됩니다!] [자산 해제 성공: 현재 동결 상태였던 수수료 재화 중 80%가 즉시 인출 가능한 가용 자산으로 전환됩니다!]
그동안 심장을 조여 오던 세금 징수 인스턴스 미션의 압박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한강진의 자산 주머니에 수천만 골드에 달하는 가용 자금이 실시간으로 찍히기 시작했다.
"미친... 저게 대체 무슨 짓이야?"
바닥에 쓰러진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아틀라스의 부대원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 가고 있는 아틀라스 힐러진들의 시체가 있었다.
한강진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 뜬 아틀라스 대원들의 시체를 차례로 가리켰다.
"거래상의 권능입니다. 압류(Seizure)."
우웅-!
사망한 힐러들의 가슴팍에서 눈부신 금빛과 은빛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영혼 귀속 상태로 귀속되어 사망하더라도 결코 떨어뜨리지 않아야 할 전설급 성물들이, 한강진의 손짓 한 번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 내 성물이! 어째서 귀속 아이템이 뽑혀 나가는 거야?!"
부활 대기 상태로 영혼만 남은 힐러가 비명을 질렀지만, 차원 거래소의 낙인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시스템 안내: '차원 거래소'의 권능으로 대상의 영혼 귀속 아이템을 강제 압류합니다.] [압류 대상: 성녀의 황금 향로 (Legendary), 대주교의 묵주 (Epic)]
한강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성당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틀라스의 횡포에 밀려 레이드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구석에 숨어 있던 야인 플레이어들과 용병들이 침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아스텔리아의 방랑자 여러분. 평생 구경도 못 해봤을 명품들이 매물로 나왔습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강제 역경매를 시작하죠. 수수료는 제 몫인 99%가 선포함되어 있습니다."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경매판이 팝업되었다.
``` +-------------------------------------------------------------+ | [차원 강제 경매 개시] | +-------------------------------------------------------------+ | 대상 품목: 성녀의 황금 향로 (Legendary, 영혼 귀속 해제 상태) | | 현재 최저가: 2,500,000 골드 (수수료 99% 적용가) | | 거래 제한 시간: 00:07 (기막 윈도우 한정) | +-------------------------------------------------------------+ ```
"미쳤다! 진짜 전설급 향로잖아?!" "저거만 있으면 나도 1티어 힐러 공대에 들어갈 수 있어!"
성당 구석에 숨어 있던 야인 플레이어들의 눈이 뒤집혔다. 아틀라스가 독점하고 결코 시장에 풀지 않았던 최고 등급의 힐러 성물이었다. 그것이 지금, 자신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던 아틀라스의 시체에서 갓 뜯어낸 상태로 매물로 올라온 것이다.
"2,600,000 골드!" "2,800,000 골드! 내가 산다, 제발!"
입찰가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이 개자식아! 내 아이템이야! 내 장비라고!"
서지수가 바닥을 기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녀의 눈가에 핏발이 섰다. 자신들이 그토록 공들여 세팅한 정예 부대의 핵심 장비가, 눈앞에서 길거리 잡상인의 물건처럼 팔려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을 벌레 보듯 하던 야인 유저들의 손에.
"착각하지 마십시오, 서지수 사장님."
한강진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들이 계약서라는 이름의 쓰레기로 일반 유저들의 고혈을 짤 때, 나 역시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자본주의는 원래 이렇게 차가운 법이니까요."
그 순간, 보스 '심연의 심판관'이 폭주 상태의 대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기막 윈도우의 제한 시간이 단 5초 남은 시점이었다. 보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즉사급 마기가 성당 전체를 쓸어버릴 기세로 요동쳤다.
"야! 사기꾼 놈아! 어그로 끌린다! 빨리 방패 넘겨!"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태윤이 대검을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태윤 씨, 계약대로 진행합니다. 수수료 99%는 선입금인 거 아시죠?"
"아, 알았다고! 이 지독한 세금 도둑놈아! 입금했다!"
강태윤의 계좌에서 잔고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한강진이 압류했던 아틀라스 메인 탱커의 최고급 방패 '용의 숨결 방벽'이 강태윤의 손에 쥐어졌다.
[시스템 안내: '용의 숨결 방벽 (Epic)'의 강제 낙찰이 완료되었습니다.] [낙찰자: 강태윤 / 거래 수수료 99%가 '독점'의 계좌로 즉시 적립됩니다.]
"좋아, 묵직하구만!"
강태윤이 새로운 방패를 치켜세우며 보스의 앞길을 막아섰다.
쿠우우웅-!
폭주한 심연의 심판관이 내리친 대검이 강태윤의 방패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성당 바닥이 움푹 파였지만, 강태윤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틀라스의 전설급 장비와 강태윤의 무식한 맷집이 결합하자, 즉사급 판정의 보스 공격이 완벽하게 상쇄되며 어그로가 고정되었다.
"말도 안 돼……."
서지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자신들이 자랑하던 완벽한 공략 부대는 붕괴했는데, 단 세 명뿐인 한강진 일행은 자신들의 장비를 빼앗아 보스의 패턴을 장난감 다루듯 받아내고 있었다.
"자, 경매 종료입니다."
탁.
한강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떠 있던 성녀의 황금 향로가 빛의 무리가 되어 낙찰받은 야인 힐러의 품으로 날아갔다.
[최종 낙찰 완료: '성녀의 황금 향로'가 3,200,000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수수료 정산: 수수료 99% (3,168,000 골드)가 '독점'의 금고로 입금됩니다.] [세금 감면 적용: 최종 입금액 2,851,200 골드가 즉시 가용 자산으로 등록됩니다.]
단 한 번의 거래로 대기업의 몇 달 치 예산에 맞먹는 거금이 한강진의 주머니로 들어왔다. 그것도 세금 감면 증서 덕분에 동결 없이 온전히 쓸 수 있는 진짜 돈이었다.
반면, 서지수의 주변에는 이제 부서진 방패 조각과 차갑게 식은 팀원들의 시체만이 뒹굴고 있었다. 아틀라스가 이 신전을 공략하기 위해 쏟아부은 수십억 원 가치의 자원이 단 몇 분 만에 증발한 순간이었다.
서지수가 흙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한강진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한강진……! 감히 네까짓 놈이 내 앞길을 막아서? 네 아비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잊었나 보지?"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의 극에 달한 독기와 광기였다.
서지수가 품 안에서 검은색과 붉은색이 기괴하게 뒤섞인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수정구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심연의 신전 전체를 뒤흔드는 불길한 고주파 음이 울려 퍼졌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같이 지옥으로 데려가 마땅해."
그녀의 몸 주변으로 피처럼 붉은 마법 진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스텔리아 내에서 금기시되는 자폭형 저주 결계이자, 자신의 캐릭터 영구 스탯을 제물로 바쳐 주변의 모든 대상을 소멸시키는 최악의 스킬이었다.
[위험 경고: 서지수가 금기 스킬 '황폐의 영역 (Domain of Desolation)'을 캐스팅합니다!] [시스템 경고: 결계 내부의 모든 플레이어는 치유 불가의 지속 피해를 입으며, 공간 이동 및 탈출이 전면 봉쇄됩니다!]
"미친년이 결국 선을 넘는구만!"
강태윤이 방패를 꽉 쥐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붉은 장벽이 성당 입구까지 빠르게 차단하며 탈출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서지수의 전신이 붉은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녀의 피부가 저주로 인해 검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강진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같이 죽자, 한강진."
서지수의 신형이 붉은 유성이 되어, 한강진의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