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심연의 신전 통제라. 아틀라스 이 새끼들이 진짜 갈 데까지 갔구만."

강태윤이 거대한 방패를 바닥에 쿵 내려찍으며 이를 갈았다. 방패 가장자리에 묻은 가고일의 푸른 피가 먼지 섞인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하늘을 뒤덮은 황금빛 서버 공지는 여전히 오만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심연의 신전 최종 구역을 독점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아스텔리아의 대다수 유저들을 디지털 소작농으로 굳히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아틀라스의 사설 은행과 통행세 횡포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메인 시나리오 던전까지 물리적으로 막아서겠다니요. 시장 지배적 지위의 남용이자 명백한 불공정 거래 행위입니다."

채지안이 주판알을 튕기듯 허공의 홀로그램 장부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녀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진 씨. 저들이 입구에 친 결계는 단순한 차단막이 아닙니다. 서버 관리자인 천도현의 권한이 일부 개입된 '시스템 영지 점유 결계'입니다. 아틀라스 소속이 아닌 유저가 접근하는 즉시 위치가 노출되고, 초당 최대 체력의 5%가 깎이는 지속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정면 돌파는 기회비용이 너무 큽니다."

"정면 돌파? 제가 그런 무식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지안 씨?"

한강진은 결빙의 세무 인장을 손가락 사이로 장난스럽게 굴리며 픽 웃었다.

"그들이 시스템의 룰을 이용해 문을 걸어 잠갔다면, 우리는 더 상위의 물리 법칙으로 그 문을 열면 됩니다. 마침 아주 좋은 영수증이 하나 있거든요."

한강진이 인벤토리에서 빛바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2화에서 오염된 강철 골렘을 독식할 때 획득했던, 정체불명의 붉은 인장이 찍힌 봉인된 문서였다.

[봉인된 제국 세금 감면 증서] - 분류: 특수 소모품 (봉인됨) - 효과: ??? - 상세: 고대 아스텔리아 제국의 세무국에서 발행한 증서입니다. 강력한 봉인 주술이 걸려 있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내용을 해독할 수 없습니다.

"이게 뭡니까?"

강태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우리가 지난번 세수 독촉 인스턴스에서 살아 돌아오며 챙긴 전리품 중 하나입니다. 지안 씨, 이 장부의 붉은 인장, 낯이 익지 않습니까?"

채지안의 기계적인 눈동자가 양피지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얇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고대 제국 세무국의 1급 감면 코드입니다. 시스템의 세무 회계 로직 상, 영지 점유 결계는 '시스템에 납부하는 가상의 토지세'를 기반으로 유지됩니다. 즉, 이 증서의 봉인을 해독해 결계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아틀라스의 영지에 침입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를 '세금 면제 대상자'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뜻이군요. 탈세가 아니라 합법적인 면세 통과입니다."

한강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독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채지안이 차갑게 읊조리며 양피지를 낚아챘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색 마력 평론선들이 뿜어져 나와 양피지의 붉은 봉인을 정밀하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단 1골드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집요한 세무 분석 능력이 고대 주술의 배열을 해체해 나갔다.

핏빛 봉인이 파스스 깨어지며, 투명한 황금빛 텍스트가 허공에 떠올랐다.

[시스템: 채지안(ID: 면세점)의 세무 해독 권능으로 '봉인된 제국 세금 감면 증서'의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시스템: 사기적인 세무 조작 분석을 통해 증서의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 아이템 정보 | | | :--- | :--- | | **아이템명** | 고대 제국의 면세 칙령 (영구 감면 코드) | | **등급** | 에픽 (Epic) | | **효과** | 시스템이 지정한 모든 '통제 및 영지 결계'의 통행세 및 침입 페널티를 100% 면제합니다. 추가로, 결계 통과 시 사용자 및 파티원의 신원을 '시스템 세무 집행관'으로 위장하여 감지망을 완전히 우회합니다. | | **소모 비용** | 작동 시 10골드 |

"단돈 10골드에 아틀라스가 수억 골드를 들여 구축한 결계망을 무력화한다라. 이거 참 남는 장사 아닙니까?"

한강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태윤 씨, 지안 씨. 가시죠. 아틀라스가 독점한 꿀통에 빨대를 꽂을 시간입니다."

* * *

사흘 뒤. 심연의 신전 입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뒤로 물러나! 아틀라스 길드의 통제 구역이다! 허가증이 없는 비길드원은 즉시 대피해라! 3초 내로 물러서지 않으면 즉결 처형이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아틀라스 수호대 소속 기사들이 거대한 장벽을 치고 일반 유저들을 거칠게 밀쳐내고 있었다.

"이봐요! 심연의 신전은 메인 퀘스트 맵이잖아! 여기를 막으면 우린 전직도 못 하고 손가락만 빨라는 소리요?!"

"더러운 대기업 새끼들! 게임 서버가 느그들 안방이냐?!"

유저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했지만, 아틀라스 기사들의 눈빛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붉은색 '영지 경비병' 마크가 떠 있었다. 천도현의 시스템 권능을 지원받아, 일반 유저를 공격해도 카오틱 수치(성향치 하락)가 쌓이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시끄럽다. 꼬우면 아틀라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든가, 아니면 매달 10만 골드씩 내고 통행증을 끊어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게 죄지, 안 그래?"

아틀라스의 행동대장이 비열하게 웃으며 대검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 파동에 가난한 비길드원 마법사 한 명이 뒤로 나자빠지며 피를 토했다.

바위 그늘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태윤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저 빌어먹을 양아치 새끼들... 당장 가서 대가리를 쪼개버리고 싶군요."

"참으십시오, 태윤 씨."

한강진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동정심 따윈 추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득실 계산기만이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저들을 도와서 얻을 이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아틀라스의 어그로를 끌어주고 있을 때, 우리는 조용히 들어가는 게 이득입니다. 인간의 선의는 가장 값싼 사치일 뿐입니다. 저 비길드원들은 훌륭한 '무료 미끼'가 되어주고 있는 겁니다."

비정하기 짝이 없는 논리. 하지만 강태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강진의 이 차가운 계산법이 자신들을 살려왔으니까.

"지안 씨, 면세 코드를 작동시키십시오. 그리고 제 직업 스킬을 연계합니다."

"예, 진 씨. 세무 위장 코드 입력 완료했습니다."

채지안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세 사람의 몸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 장막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한강진이 자신의 히든 클래스 권능을 발동했다.

[시스템: '차원 거래상' 고유 권능 '상인 위장 은폐(Merchant Camouflage)'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 파티 전체가 '시스템 공식 무역 상단'으로 위장됩니다. 적대 세력의 모든 감지 및 경보 시스템을 패싱합니다.]

"출발하죠."

세 사람은 당당하게 아틀라스의 삼엄한 경비망을 향해 걸어갔다.

붉게 타오르는 영지 점유 결계의 장막이 그들의 몸에 닿는 순간, 거대한 경보음 대신 부드러운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시스템: 제국 세무 집행관 상단의 출입이 확인되었습니다. 통행세 면제 대상입니다. 안전한 거래를 기원합니다.]

아틀라스의 경비병들은 바로 코앞을 지나가는 한강진 일행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시스템의 배경 그래픽이나 NPC 상단이 지나가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진짜로 그냥 지나가네..."

강태윤이 식은땀을 흘리며 속삭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스템의 룰 위에 서는 자가 진짜 독점하는 법이라고."

한강진은 경비대장의 주머니에서 슬쩍 흘러나온 500골드짜리 아틀라스 전용 통행 주화를 훔쳐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입구 통과에 사용한 비용 10골드 대비 5000%의 수익률이었다.

* * *

심연의 신전 중심부, '심연의 심판관'이 잠들어 있는 대성당 안.

장엄한 고딕 양식의 기둥들이 늘어선 그곳에는 이미 아틀라스의 정예 공격대가 보스 레이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칠흑 같은 흑철 갑옷을 입고 오만한 기세를 뿜어내는 여자, 서지수가 있었다.

"화력 집중해! 탱커 라인 무너지지 마라! 이번 레이드만 성공하면 아스텔리아의 메인 에픽 장비는 전부 우리 아틀라스의 손에 들어온다!"

서지수의 목소리가 성당 천장을 울렸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어둠의 마력이 기괴하게 소용돌이치는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영겁의 밤 반지] - 등급: 레전더리 (Legendary) - 영혼 귀속 - 효과: 착용자의 모든 마력 소모량을 0으로 만들고, 10초마다 최대 체력의 20%에 해당하는 어둠의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보스의 광역 메테오가 떨어질 때마다 서지수의 몸 주변으로 칠흑 같은 보호막이 생겨나 모든 피해를 완벽하게 흡수했다. 사기적인 아이템 성능이었다. 아틀라스의 막강한 자본력과 천도현의 특혜가 만들어낸 괴물 같은 장비였다.

성당의 높은 회랑 기둥 뒤에 숨은 한강진 일행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기적인 성능이군요. 마력 소모량 제로에 무한 보호막이라니."

강태윤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채지안의 안경 너머 눈동자는 서지수의 반지를 정밀하게 쫓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반지의 마력 흐름이 실시간 텍스트 데이터로 변환되어 흐르고 있었다.

"아닙니다. 완벽한 장부는 존재하지 않듯, 완벽한 아이템도 없습니다."

채지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진 씨, 서지수의 반지를 보십시오. 저 장비는 시스템의 마력 대역폭을 강제로 끌어다 쓰는 불법 오버클러킹 상태입니다. 10초마다 보호막이 갱신되는 순간, 아주 미세한 '마력 루프 버그'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허공에 반지의 마력 변동 그래프를 띄웠다.

| 마력 누수 대역폭 분석 | | | :--- | :--- | | **기본 대기 상태** | 0.00% | | **보호막 갱신 직전 (9.9초)** | 180.25% (임계점 돌파) | | **갱신 순간 (10.0초)** | 0.00% (일시적 시스템 랙 발생) | | **판정** | 마력 루프 버그로 인해 갱신 순간 0.1초 동안 모든 방어 기믹 무력화 및 강제 압류 가능 취약점 노출. |

"0.1초의 틈새..."

한강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과거에 저를 배신하고 가문을 팔아넘길 때도 저 여자는 항상 완벽을 자처했죠. 하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시스템 규칙을 억지로 비틀다 보니 저런 치명적인 구멍을 스스로 만들어내는군요."

"이 취약점을 이용하면 기믹 윈도우가 열리는 순간 저 반지를 통째로 강제 경매에 부쳐 압류할 수 있습니다. 단, 보스의 상태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채지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당 중앙에서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우우우웅-!

"크아아아아악!"

갑자기 보스인 '심연의 심판관'의 몸에서 붉은빛이 아닌, 시스템 오류를 나타내는 지지직거리는 검붉은 노이즈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스의 눈동자가 완전히 뒤집히며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경고: '심연의 심판관'이 비정상 코드 오염(Corruption)으로 인해 폭주 상태에 돌입합니다!] [시스템 경고: 보스의 공격력이 200% 증가하며, 모든 패턴이 즉사급 판정으로 변경됩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보스 패턴이 이래?!"

아틀라스의 메인 탱커가 경악하며 방패를 올렸으나, 보스가 내리친 거대한 검은 대검에 방패째로 반으로 갈라지며 단 한 방에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힐러! 힐 부어! 부활시켜!"

서지수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폭주한 보스의 무차별적인 광역 참격이 성당 내부를 휩쓸었다. 아틀라스의 정예 딜러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단 몇 초 만에 수십 명의 정예 공략 부대가 흔적도 없이 궤멸당했다.

"이런 젠장! 후퇴해! 진형 무너졌다!"

서지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주변에는 이제 몇 명의 호위 기사들만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쾅! 쾅! 쾅!

심연의 심판관이 검은 마기를 뿜어내며 서지수를 향해 서서히 걸어왔다. 보스의 머리 위에 거대한 '즉사 기믹 윈도우' 타이머가 돌기 시작했다.

[기믹 윈도우 활성화: 15초]

"괜찮아... 나에게는 영겁의 밤 반지가 있어! 10초만 버티면 보호막이 다시..."

서지수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움켜쥐며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폭주한 보스의 검은 검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채지안이 지적했던 바로 그 10.0초의 순간이 찾아왔다.

지리리릭-!

반지의 마력 루프가 꼬이며 미세한 시스템 랙이 발생했고, 순간적으로 서지수가 자랑하던 무적의 검은 방어막이 물거품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 어째서...?"

보호막이 사라진 무방비 상태의 서지수 위로, 즉사급 검은 마기의 칼날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려던 그 찰나.

서지수의 절망적인 시선이 성당 구석, 기둥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그 중심에서 세무 인장을 가볍게 던지며 비정하게 웃고 있는 남자.

"오랜만입니다, 서지수 사장님."

한강진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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