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날 밤, 아스텔리아의 최심부인 '드래곤의 둥지'는 끓어오르는 용암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불타는 암석들이 천장에서 비 오듯 쏟아졌고,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용암 대지 위를 기어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온몸에 감긴 붕대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배어나오는 상태의 서지수였다. 그녀의 뒤로는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엄선한 최정예 엘리트 헌터 열두 명이 간신히 진형을 유지한 채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아틀라스의 사장단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망이 깨지기 직전인 지금, 서지수에게 남은 패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 던전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가상 자산 코어'를 손에 넣는 것. 그것만 확보한다면 한강진에게 당했던 모든 재정적 손실을 메우고도 남을 터였다.

그녀의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전설급 귀속 반지, '영겁의 밤 반지'가 검붉은 빛을 내뿜으며 요동쳤다.

웅웅웅!

길드 자산의 80%가 동결된 충격과 서지수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고스란히 장비에 투영되고 있었다. 마력이 정상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역류하는 '마력 누수 루프' 현상이었다. 당장이라도 반지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과부하 경고음이 시스템 창을 붉게 물들였다.

"서지수 님, 더 가다간 드래곤의 광역 패턴에 전멸합니다! 일단 후퇴하고 정비하시는 편이...!"

"닥쳐!"

서지수가 핏발 선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서라고? 천도현 이사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알아? 이번에도 빈손으로 돌아가면 내 목이 날아간단 말이야! 무조건 전진해!"

그녀가 미친 듯이 발을 내딛는 순간, 용암 호수가 거대하게 솟구쳤다.

크오오오오오!

대지를 진동시키는 포효와 함께, 거대한 붉은 비늘을 가진 화룡 '칼라쉬'가 날개를 펼쳤다. 칼라쉬의 눈동자가 침입자들을 향해 붉게 타올랐다.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운석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화룡의 즉사급 광역 메테오 기믹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이건 막을 수 없습니다! 전원 회피...!"

"아니, 막을 수 있어! 내 반지의 결계라면...!"

서지수가 영겁의 장막을 펼치기 위해 반지를 치켜든 바로 그 찰나였다.

터엉!

귀를 찢는 철퇴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대방패 하나가 날아와 서지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아틀라스의 대장님."

"강태윤...!"

서지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뒤편, 열기를 뚫고 걸어 나오는 슬림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금전 장부를 퉁기며 걸어오는 한강진이었다. 그의 곁에는 차가운 눈빛으로 태블릿 PC를 두드리는 채지안이 서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했군요, 서지수 씨. 야근 수당도 나오지 않는 시간인데 참으로 열정적이십니다."

한강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한강진... 네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어떻게 오긴요. 비즈니스 파트너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우량 기업의 기본 소양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아틀라스의 남은 푼돈까지 털어서 이리로 도망칠 거라는 건 삼류 회계사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죠."

"대표님, 정확히는 이류 회계사 수준에서도 0.3초 만에 계산이 끝나는 동선이었습니다."

채지안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쿠구구구구!

머리 위에서 칼라쉬가 뿜어내는 메테오가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몸체 주변에 푸른빛의 보호막이 감돌았다. 보스 몬스터가 무적 상태에 돌입하며 아스텔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거래 구역, '기믹 윈도우'가 열린 것이다. 제한 시간은 단 15초였다.

"미쳤어! 이 공격이 떨어지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해! 당장 비켜!"

서지수가 절규하며 영겁의 밤 반지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녀가 힘을 주면 줄수록, 반지의 결함인 마력 누수 루프는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한강진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태윤 씨, 지금입니다. 저 잘 정돈되지 못한 마력의 매듭을 정리해 주시죠."

"수수료 99% 떼어가는 악덕 업주 밑에서 일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구만! 하압!"

강태윤이 기합과 함께 대방패를 지면에 내리찍었다. 방패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서지수의 발밑을 강타했다. 중심이 무너진 서지수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채지안의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방향 오프셋 3.14. 서지수의 마력 제어 회로 우측 45도 방향에 정밀 과부하 타격 인가."

채지안이 던진 마법 스크롤의 섬광이 서지수의 검지손가락을 정확히 직격했다.

파지직!

"아악!"

서지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요동치던 검붉은 고리가 비틀리며, 폭주하는 마력의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시스템 강제 해제 판정을 받아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시스템 경고: '영겁의 밤 반지'의 마력 동조율이 0%로 급감하여 착용이 강제 해제됩니다!]

"내 반지...!"

서지수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반지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한강진의 권능이었다.

"차원 거래소, 개장합니다."

한강진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사슬들이 허공에 뜬 반지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사슬은 반지를 휘감아 시스템의 가상 경매대 위에 올려놓았다.

``` ┌────────────────────────────────────────────────────────┐ │ [경매 매물] │ ├────────────────────────────────────────────────────────┤ │ 아이템 명: 영겁의 밤 반지 (전설) │ │ 분류: 반지 (영혼 귀속 -> 일시적 소유권 유예 상태) │ │ 효과: │ │ - 착용자의 모든 마력 소모량 50% 감소 │ │ - 10초간 절대 무적 결계 '영겁의 장막' 전개 (쿨타임 1시간)│ │ ※ 현재 상태: 소유자의 마력 누수로 인해 착용 해제 상태. │ │ 강제 경매 조건 충족. │ └────────────────────────────────────────────────────────┘ ```

"안 돼! 그건 영혼 귀속 장비야! 네놈이 멋대로 손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서지수가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차원 거래소의 권능 앞에서 시스템의 일반 규칙 따위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시스템 안내: 액티브 플레이어의 영혼 귀속 아이템에 대한 강제 경매를 시작합니다.] [경고: 본 거래는 초고가치 자산의 강제 경매로 분류되어 시스템의 역풍(Level 9)이 감지됩니다! 경매 실패 혹은 유찰 시, 시전자 '독점'의 영구 능력치 전반이 20씩 차감됩니다!]

시뻘건 경고문이 한강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마어마한 리스크였다. 만약 서지수가 이 장비를 다시 사 가거나 경매가 꼬인다면 한강진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하지만 한강진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곁에 서 있는 채지안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 씨, 준비한 장부를 보여줄 때가 되었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표님."

채지안이 품 안에서 빛바랜 금빛 가죽으로 제본된 고대의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지난 2화에서 그들이 목숨을 걸고 획득한 후, 채지안이 긴 시간 동안 밤을 새워가며 해독해 낸 '제국 세무국의 비밀 면세 칙령'이었다.

채지안이 안경을 지켜올리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칙령을 낭독했다.

"제국 특별 세무법 제7조 3항에 의거. 본 거래 대상은 '불법 점유물 및 과세 표준 미달의 위험 자산'으로 분류됩니다. 이에 따라 당해 거래에서 발생하는 모든 시스템 역풍과 패널티 소급 적용을 전액 면세 처리할 것을 선언합니다."

화아아악!

그녀가 문서를 찢어 발기자, 한강진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색 강제 제약의 사슬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 ┌────────────────────────────────────────────────────────┐ │ [아이템 효과 발동] │ ├────────────────────────────────────────────────────────┤ │ 아이템 명: 제국 세무국의 비밀 면세 칙령 (에픽) │ │ 효과: │ │ - 차원 거래소 이용 시 발생하는 시스템 역풍 및 스탯 차감 │ │ 패널티를 1회에 한해 100% 무효화. │ │ - 시스템 패널티 소급 적용 취소 완료. │ └────────────────────────────────────────────────────────┘ ```

[시스템 안내: 특수 면세 증서가 적용되었습니다. 경매 실패 시의 역풍 패널티가 '0%'로 경감됩니다!]

"세상에... 면세 증서라고?! 저런 말도 안 되는 템을 어디서 구한 거야!"

서지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아틀라스의 자본력으로도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고대의 히든 피스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인 절세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서지수 씨. 탈세만 일삼던 아틀라스의 회계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죠."

한강진이 경매 인터페이스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딸깍.

[실시간 타임어택 강제 경매가 시작됩니다!] [제한 시간: 5초] [시작 입찰가: 1골드]

"시작가가 고작 1골드야? 하하하! 미쳤구나, 한강진! 내가 더 높은 금액을 부르면 그만이야! 내 반지야, 내가 다시 사 가면...!"

서지수가 다급하게 골드 주머니를 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강진의 직업명이 왜 '수수료 99%의 차원 거래인'인지.

[시스템 안내: 본 경매에는 시전자 '독점'의 고유 권능에 의해 '99%의 강제 입찰 수수료율'이 적용됩니다!] [안내: 입찰에 참여하는 모든 외부 유저는 입찰 희망가의 99%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선입금해야 합니다.]

"뭐, 뭐라고?!"

서지수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지금 서지수와 아틀라스 정예들의 수중에 남은 자금은 한강진의 밀수 채널 개설로 인해 바닥을 긁고 있는 상태였다. 전설급 반지를 낙찰받기 위해 수만 골드를 써야 하는데, 그 금액의 99%를 수수료로 '먼저' 지불해야 입찰 자격이 주어진다니. 이것은 산술적으로 입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수수료율이지요."

한강진이 여유롭게 1골드를 입력했다.

[플레이어 '독점'이 1골드를 입찰했습니다.]

"지수 씨, 호가 올리실 겁니까? 안 올리시면 이대로 낙찰입니다만."

"이, 이 악마 같은 새끼가...! 99% 수수료라니, 이런 사기꾼 놈이 어딨어!"

"사기라니요. 엄연히 시스템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중개 수수료입니다. 꼬우면 당신도 차원 거래상 하든가요."

한강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5. 4. 3.

"막아! 당장 저 새끼를 죽여서 경매를 취소시켜!"

서지수가 비명을 지르자 아틀라스의 정예 헌터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한강진에게 돌진했다.

"어딜 감히 우리 대표님 몸값에 손을 대려고!"

강태윤이 대방패를 지면에 박아넣으며 '철벽의 도발' 스킬을 시전했다. 강력한 도발의 오라가 돌진하던 헌터들의 발걸음을 강제로 묶어버렸다. 헌터들의 칼날이 강태윤의 방패 위에서 무력하게 불꽃을 튕겼다.

2. 1.

띡-.

[경매가 종료되었습니다!] [최종 낙찰자 : 독점 (1골드)] [낙찰품 '영겁의 밤 반지'가 플레이어 '독점'의 인벤토리로 즉시 귀속됩니다.]

수만 골드의 가치를 지닌 전설급 귀속 장비가, 단돈 1골드에 한강진의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아아아악! 내 반지!!! 내 영겁의 밤 반지!!!"

서지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하늘을 뒤덮고 있던 화룡 칼라쉬의 즉사급 메테오가 지면을 향해 완전히 내리꽂혔다.

쾅! 쿠구구구구궁!

"잘 쓰겠습니다, 서지수 씨."

한강진은 낙찰받은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며 즉시 고유 스킬을 발동했다.

웅-!

그가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거대하고 투명한 '영겁의 장막'이 펼쳐졌다. 쏟아지는 불타는 운석들이 장막에 부딪쳐 무력하게 비산했다. 한강진과 강태윤, 채지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안락한 결계 속에서 밖을 감상했다.

반면, 유일한 생존 보구였던 반지를 박탈당한 서지수와 아틀라스의 대원들은 맨몸으로 드래곤의 격렬한 분노를 마주해야 했다.

"살려줘! 살려줘, 한강진! 돈은 얼마든지 줄게! 제발 결계 안으로...!"

서지수가 결계벽을 두드리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손톱이 깨져나가며 투명한 벽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한강진은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수 씨, 저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고객에게는 단 1초의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용인의 철칙이니까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새끼...!"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메테오 하나가 서지수의 정수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비명은 거대한 폭음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아틀라스 최정예 부대의 생명력 바가 순식간에 '0'으로 수렴하며, 그들의 육체가 하얀 빛무리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초토화된 드래곤의 둥지에는 오직 한강진 일행만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후우, 속이 다 시원하네. 저 망할 년 꼴 좋구만."

강태윤이 방패를 거두며 땀을 닦았다. 채지안 역시 장부를 정리하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서지수 및 아틀라스 정예 부대의 사망으로 인한 장비 드롭율 분석 완료. 대표님, 방금 획득한 전설급 반지의 가치를 감안하면 이번 레이드의 투자 대비 수익률은 무려 12,400%에 달합니다."

"훌륭한 정산이군요, 지안 씨."

한강진이 반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현실에서 가문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배신했던 원흉 중 하나인 서지수를 완벽하게 몰락시킨 순간이었다. 아틀라스의 전력은 이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즐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궁...!

드래곤의 둥지 전체가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던전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쩍쩍 갈라지며 검은색 데이터 노이즈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칼라쉬를 잡지도 않았는데 왜 맵이 붕괴하는 거야?"

강태윤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채지안의 태블릿 PC 화면이 거칠게 깜빡이며 붉은색 경고등을 내뿜었다.

"대표님, 단순한 기믹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강제적인 시스템 오버라이드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서버의 물리 법칙 자체가 재구성되는 중입니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주위의 용암과 동굴 벽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암전되었다. 그 칠흑 같은 공간 한가운데,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서, 하나의 거대한 홀로그램 아바타가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아스텔리아를 자신의 절대 사유 제국으로 만들려는 지배자이자,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의 핵심.

시스템 운영자, 천도현이었다.

그가 빛의 형태를 한 채, 오만한 눈빛으로 한강진 일행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오, 독점. 당신의 선을 넘은 시장 교란 행위는 여기서 끝이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