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우릉, 우르릉!

지하 무위제단의 수호벽이 완전히 박살나며 쏟아진 돌가루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밤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던 기괴한 마기가 마침내 전각의 사방을 가득 채웠다. 어둠의 경계를 뚫고 쏟아져 나온 것은 칠흑의 인형들이었다. 혈영신마 현무백이 정성을 들여 빚어낸 마도 독인형 백여 마리가 기괴한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며 전각의 바닥과 벽면을 가득 수놓았다.

그 기괴한 군세의 한가운데, 거대한 쇠사슬을 온몸에 감은 채 서 있는 존재가 있었다.

백무령의 시선이 그 존재의 얼굴에 닿는 순간, 그녀의 도심(道心)이 밑바닥부터 흔들렸다. 푸른 도포의 찢어진 깃 사이로 드러난 태을파 고유의 청색 문양. 마기에 절어 검붉게 변해버렸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엄숙한 안면.

그것은 과거 태을파의 수장이자, 무령에게 처음으로 도검을 쥐여주며 천지 대자연의 법도를 가르쳤던 사부, 태을선인의 육신이었다.

"사부님……."

무령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차가운 검자루 위로 뚝뚝 떨어졌다. 현무백은 태을파를 잔혹하게 멸문시킨 것도 모자라, 가장 고결해야 할 도인의 유해를 추잡한 독인형의 매개체로 삼아 제자의 목을 겨누게 만든 것이다.

사부의 죽은 눈동자가 핏빛 심연으로 물든 채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가 쥔 거대한 흑철검이 백무령의 심장을 정확히 가리켰다.

스스스스!

마도 독인형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그들의 손가락 끝은 시퍼런 독기로 물들어 있었고, 그 표적은 무령의 뒤편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이었다.

"도사 언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오!"

제갈운이 품고 있던 고목 벽뢰목 목검을 다급히 치켜들었다. 평범해 보이던 나뭇가지 끝에서 미세한 푸른 뇌기가 찌르르 소리를 내며 뻗어 나왔으나, 쇄도하는 백여 마리의 마귀들을 막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솟구쳤다.

"이 괴물 놈들이 기어이 살을 깎아 먹으려 드는군!"

그 순간, 거대 귀졸 마귀의 형상을 한 사부의 육신이 허공을 가르며 일격을 내뻗었다. 흑철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기류가 대지를 가르며 소월과 진설화를 향해 쇄도했다. 그 압도적인 파괴력은 닿는 즉시 그들의 경맥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안 돼……!"

소월이 비명을 지르며 제갈운의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주저앉아 있던 진설화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백색 소맷자락 너머로 푸르스름한 철사 같은 실이 살을 파고들며 빛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친자식의 숨통을 쥐고 흔들기 위해 채워둔 가문 비전, 백맥쇄혼사(百脈鎖魂死)였다.

그 가혹한 구속구는 진설화가 남궁세가의 위선을 거스르려 할 때마다 그녀의 경맥에 맹독을 주입하며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서서히 조여드는 실줄기 때문에 진설화는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한 채 피를 토했다.

"무령…… 나를 보지 마라. 어서 피해……."

진설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것은 수치심과 절망의 눈물이었다. 평생을 가문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며 위선을 연기해야 했던 천재의 마지막은, 이토록 무력한 개죽음뿐이란 말인가.

백무령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의 푸른 안광이 그녀의 안구 전면을 덮었다. 상대의 무공 궤적과 파훼점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투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진설화의 손목을 옭아맨 백맥쇄혼사의 매듭, 그리고 사부의 육신을 움직이는 거대 마귀의 기맥 흐름이 선명한 실선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연민과 분노가 화산처럼 뿜어 나왔다.

크흑!

무령의 입에서 뜨거운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타인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동료의 고통에 공명하는 순간 기경팔맥이 불타오르는 천선인과경의 저주, 인과반사(因果反射)였다. 전신의 경락 속으로 끓는 쇳물이 흘러드는 듯한 극통이 그녀를 덮쳤다. 손가락뼈마디가 하얗게 바스러질 듯 비틀렸고 단전의 진기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정(無情)해야 한다…….'

과거 태을파가 멸망할 때, 유정을 고집하다 허망하게 스러져간 사형제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인간의 감정은 나약한 독약이며, 오직 무정하게 칼끝을 곧추세워야만 천도의 끝에 닿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잡아왔다.

그러나 눈앞에서 피를 흘리는 진설화의 모습과, 마기에 오염되어 괴물이 된 사부의 육신을 보면서도 칼을 거두는 것이 과연 참된 도인가?

"도사 언니! 크악!"

제갈운이 벽뢰목 목검을 휘두르며 독인형 두 마리를 쳐냈으나, 이내 어깨를 베이며 바닥을 굴렀다. 소월의 울음소리가 붕괴하는 제단의 소음 사이로 찢어지듯 들려왔다.

무정의 철벽이 안쪽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니다.'

백무령은 잇새로 피를 흘리며 생각했다.

'사람을 버리고, 동료를 외면하며 얻은 무위가 어찌 하늘의 도란 말인가. 그것은 그저 죽음보다 차가운 자폐(自閉)에 불과할 뿐.'

태을(太乙)이란 본래 천지 만물을 품는 가장 거대하고 따뜻한 흐름이다. 대자연이 비와 바람을 내려 만물을 기르는 것이 어찌 무정함이겠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비워 세상을 채우는 지극히 큰 유정(有情)의 도리였다.

그녀가 평생을 옭아맸던 무정의 아집이 마침내 임계점에 달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부님…… 소녀, 오늘에야 비로소 도를 봅니다."

백무령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의 돌더미가 푸른 도가적 기류에 쓸려나갔다. 전신을 불태우던 인과반사의 격통이, 기이하게도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협기(俠氣)와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억누르는 고통이 아니라, 영혼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눈부신 격정이었다.

스릉!

부러진 검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검 끝이 가리킨 곳은 사부의 철검이 아닌, 진설화의 손목이었다.

"무령……?!"

진설화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순간, 무령의 부러진 검 끝에서 실바람 같은 푸른 검기가 한 가닥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봄날의 버들가지가 휘날리듯 부드럽고도 가차 없이 진설화의 손목을 스쳐 지나갔다.

챙-!

맑은 쇠붙이 소리와 함께, 진설화의 경맥을 파고들며 영혼을 가두고 있던 백맥쇄혼사가 먼지처럼 끊어져 나갔다. 가문의 가혹한 속박이 완전히 분쇄되는 순간이었다. 진설화는 가슴을 옥죄던 독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절대적인 인과의 법도를 거스른 대가로, 백무령의 단전 내부에서 전례 없는 크기의 인과반사가 폭발했다.

"쿠헉……!"

무령의 전신이 뒤로 크게 꺾이며 한 바가지의 검붉은 피를 허공에 뿌렸다. 눈, 코, 귀에서 동시에 붉은 혈선이 흘러내렸다. 오장육부가 통째로 뒤틀려 재가 되는 듯한 고통에 그녀의 무릎이 꺾였다.

"도사 언니!" "언니!"

제갈운과 소월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사부 태을선인의 육신을 지배하는 거대 괴뢰가 무령의 정수리를 향해 흑철검을 내리찍었다. 검은 마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대지를 집어삼킬 듯 요동쳤다. 피할 곳도, 막을 방도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쓰러지던 백무령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천선인과경의 거울면이 완전히 깨어지며, 그 파편들이 영혼의 심연으로 녹아내렸다.

'나를 태우는 이 불꽃은 저주가 아니다. 천하를 품기 위한 도의 시작이다.'

마음속에 가득 찬 슬픔과 분노, 그리고 동료를 향한 지극한 애정이 도가적 법도와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억누르던 감정의 병목이 한순간에 뚫리며, 황홀한 격정이 전신을 관통했다.

우주의 인과율을 전복시키는 신성한 순응. 그것이 바로 천선인과경이 숨겨둔 진정한 극의, 오달(悟達)이었다.

콰아아아앙!

무령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더 이상 붉은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통째로 길어 올린 듯한 찬란한 태을진기(太乙眞氣)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끝자락부터 시작해 눈부신 은빛 광채로 변모해 갔다. 칠흑 같던 머리칼이 은발(銀髮)로 화하며 허공에 흩날릴 때마다, 지독했던 인과반사의 내상이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갔다. 전신을 결박하던 무정의 구속구가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위(無爲)의 무학 경지가 마침내 돌파된 것이다.

"사부님."

은발을 휘날리는 백무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은 푸른 별빛을 머금은 채 깊고도 고요했다.

그녀가 부러진 도검을 가볍게 쥐고 옆으로 비껴섰다. 쇄도하던 흑철검의 궤적이 천선인과경의 눈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보였다. 적의 살기가 강할수록 위력을 배가시키는 기정검(奇正劍)의 이치가, 이제는 자연의 숨결처럼 거침없이 구현되었다.

"이제 그만 편히 쉬소서."

무령이 부러진 검을 쥐고 가볍게 횡으로 쓸어 넘겼다.

그것은 초식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지극히 단순한 휘두름이었다. 그러나 그 궤적을 따라 불어온 바람은 지맥을 뒤흔드는 태풍이 되었다.

스아아아아아-!

푸른 은하수 같은 검풍이 지하 전각 전체를 휩쓸었다.

그 부드러운 빛무리 가 닿는 순간, 쇄도하던 마도 독인형 백여 마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공에서 하얀 재가 되어 소멸했다. 혈영신마가 심어둔 지독한 마공의 기류가 단 한 번의 검풍 아래 완벽하게 정화되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사부의 고결한 육신을 얽매고 있던 거대한 쇠사슬들이 힘없이 끊어져 나갔다. 흑철검은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고, 기괴하게 일그러졌던 사부의 안면이 마침내 생전의 평온한 도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태을선인의 영혼이 미소를 짓듯, 그의 육신은 눈부신 은빛 입자가 되어 무령의 뺨을 스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가거라, 내 제자야."

환청처럼 들려온 사부의 목소리에 무령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지하 전각의 모든 마기가 걷히고, 고요함만이 내려앉았다. 제갈운은 벽뢰목 목검을 쥔 채 턱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고, 자유를 얻은 진설화는 은발로 화한 무령의 뒷모습을 경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쿠르릉, 쾅!

그때, 제단의 중심부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하 무위제단이 완전히 붕괴하며 지상으로 통하는 거대한 통로가 열린 것이다. 흙먼지와 돌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틈새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한 줄기 쏟아져 내렸다.

"가자."

백무령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천하를 가라앉히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신형을 날렸다. 은발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부서졌고, 그녀의 품에는 완전무결해진 기정검의 대검기가 대자연의 법도처럼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지상으로 솟구쳐 오른 무령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무위봉의 불타버린 폐허를 둘러싸고, 수백 명의 무인들이 빽빽하게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깃발에는 남궁세가, 제갈세가, 그리고 정파의 중심인 무림맹(武林盟)의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군세의 선두에 선 남궁세가의 장로가 백무령을 발견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태을파의 잔당 백무령이 나타났다! 저 마녀를 생포하라!"

위선으로 가득 찬 정파 대표들의 함성이 산마루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은발을 휘날리며 내려선 백무령의 푸른 눈동자에는 단 한 줌의 흔들림도 없었다. 부러진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대검기가 대지를 서늘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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