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초토화된 지하 전각의 흙더미를 가르며, 백무령은 완전무결해진 기정검의 대검기를 가슴에 품고 지상 정파 대표 무림 연맹 앞에 우뚝 당도했다.

자욱한 먼지 구름을 헤치고 나타난 그녀의 형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질적인 신화였다. 본래 흑발이었던 머리칼은 지하 제단에서의 처절한 오달(悟達)을 거치며 눈부신 은빛으로 화해 있었다. 그 은발이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아침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부러진 도검 끝에서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일렁였다.

"태을파의 잔당 백무령이 나타났다! 저 마녀를 생포하라!"

남궁세가의 외성 장로, 남궁휘의 서슬 퍼런 고함이 무위봉의 서늘한 아침 공기를 찢었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수백 명의 정파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쇠붙이의 소리가 산야를 가득 메웠다. 남궁세가의 창천검기, 제갈세가의 진법 깃발, 그리고 무림맹의 황금색 표식이 수놓인 영포들이 빽빽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기세였으나, 그 기세의 이면에는 한 가닥 초조함과 추악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백무령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로 그들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태을파의 비기이자 천도의 정수인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이 소리 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인과의 실타래가 투명하게 얽혀드는 광경이 그녀의 시야에 펼쳐졌다. 장로들의 가식적인 분노 뒤에 숨겨진 음습한 두려움, 그리고 그들이 움켜쥔 병장기 끝에 맺힌 살의의 궤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녀라……."

무령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깊은 계곡의 샘물처럼 맑고도 서늘한 목소리였다.

"진정한 마(魔)가 어디에 있는지, 정녕 그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닥쳐라! 어디서 감히 요사스러운 혀를 놀리느냐!"

남궁휘가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기운은 얼핏 장중해 보였으나, 기경팔맥의 흐름은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천선인과경은 그의 단전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질적인 마도의 기운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때, 무령의 등 뒤에서 가볍게 신형을 날려 착지한 제갈운이 코방귀를 뀌었다. 그는 품에 지닌 평범해 보이는 고목 벽뢰목(僻雷木) 목검을 툭툭 건드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거참, 아침부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럽군. 남궁 장로, 나이 값을 좀 하시오. 멸문당한 문파의 마지막 생존자에게 수백 명이 떼거지로 달려드는 것이 그대들이 입이 마르도록 외치던 협(俠)의 도리요?"

"제갈세가의 방계 녀석이 감히 어디서 훈수질이냐! 너 또한 저 마녀와 손을 잡고 가문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남궁휘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의 시선은 제갈운을 지나, 무령의 옆에 굳건히 서 있는 진설화에게로 향했다. 진설화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그녀의 오른손 목덜미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화야! 네가 어찌 그 마녀의 곁에 서 있는 것이냐? 당장 검을 들어 저 마녀의 목을 베어라! 그것이 남궁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남궁휘의 압박에 진설화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오른손 손목에는 붉고 투명한 실 가닥 같은 것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자식의 영혼과 육신을 억지로 구속하기 위해 심어둔 비전 구속구, 백맥쇄혼사(百脈鎖魂絲)였다.

'아윽……!'

설화는 비명을 삼켰다.

장로가 내뿜는 가문의 가주령 기운과 공명하자, 손목을 죄어오는 백맥쇄혼사가 전신의 경락을 타고 들어가 심장을 옥죄었다. 피가 역류하고 시야가 붉게 물드는 고통 속에서도, 진설화는 검자루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남궁휘를 노려보았다.

"장로님…… 가문을 위한다는 핑계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지하에서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끄럽다! 가문의 대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약한 소리 따위는 필요 없다!"

남궁휘가 손가락을 튕기자, 진설화의 손목에 감긴 붉은 실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녀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극심한 고통에 무릎을 꿇으려는 진설화의 어깨를,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감싸 안았다.

백무령이었다.

그녀가 진설화의 손목을 움켜쥐는 순간, 무령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끔찍한 불길이 치솟았다.

화아아악!

천선인과경의 가혹한 대가, 인과반사(因果反射)의 법도가 작동한 것이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구원의 의지를 품는 순간, 시전자의 경락이 타들어 가는 형벌. 무령의 전신 기경팔맥이 용광로에 던져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피 비린내를 억지로 삼키며, 무령은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까짓 고통 따위가 내 도심(道心)을 꺾을 수 있겠는가.'

무령의 두 눈이 푸른 신광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고통을 거부하는 대신, 슬픔과 협기를 품은 격정으로 승화시켰다.

스승을 잃었던 비극, 동료가 짊어진 처절한 굴레를 온전히 이해하는 찰나, 그녀의 심상에서 검기가 폭발하듯 뿜어 나왔다.

츠츠츳!

부러진 검 끝에서 일어난 한 줄기 청량한 검기가 진설화의 손목을 가볍게 스쳤다.

그것은 살을 베는 검술이 아니었다. 오직 인과의 실타래만을 끊어내는 기정검(奇正劍)의 묘리였다.

팅-!

맑은 파열음과 함께, 남궁세가의 비전이자 절대 끊을 수 없다던 백맥쇄혼사가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분해되었다. 독기 서린 붉은 실이 푸른 검기에 닿자마자 하얀 연기가 되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아……!"

진설화는 전신을 짓누르던 끔찍한 구속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막혔던 내력이 폭포수처럼 회전하며 온몸의 생기가 되살아났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손목과, 은발을 휘날리는 무령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저 비기를 단번에……!"

남궁휘가 경악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령은 타들어 가는 내상의 고통 속에서도 단 한 걸음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왼손이 소맷자락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대들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던 위선의 껍질을, 이제는 벗길 시간이다."

무령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지독하게 붉은 빛을 발하는 박쥐 문양의 철패였다.

지하 제단의 잔해 속에서 처단했던 사파 혈기대 자객들의 시신에서 수거한 물건이자, 정파 무림맹 내부의 세작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던 신호기였다.

"그것은……!"

남궁휘를 비롯한 몇몇 장로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사파의 붉은 박쥐 문양."

무령의 목소리가 산자락에 널리 퍼졌다. 수백 명의 무림맹 무인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림맹 내부에서 사파 혈영교와 내통하던 자들이 주고받던 인장이다. 그리고 이 인장과 공명하는 기운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몸에 심어져 있지."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 마녀가 사술을 부리려 한다!"

남궁휘가 급히 소리치며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공격하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저 간악한 무리를 처단하라!"

그러나 무령은 이미 천선인과경의 힘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그녀가 부러진 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대자연의 법도를 따르는 기정검의 푸른 대검기가 허공에 거대한 거울 형상의 무형 검막을 형성했다.

"천도가 비추는 거울 앞에, 숨길 수 있는 인과는 없다."

웅-!

하늘에 거대한 은빛 거울이 걸린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투명하고 찬란한 빛무리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 빛이 남궁휘를 비롯한 무림맹 장로들의 몸을 투과하는 순간,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들이 입고 있던 고급스러운 비단 영포의 가슴과 어깨 부위에, 숨겨져 있던 붉은 박쥐 문양이 붉은 핏빛으로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그들의 영혼과 기경팔맥에 낙인찍힌 사파의 마공 흔적이 천선인과경의 빛을 받아 실체화된 결과였다.

"저, 저게 무엇이냐?"

"남궁 장로님의 옷에…… 붉은 박쥐 문양이?"

"무림맹의 주호 장로님 몸에서도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무림맹 무인들과 젊은 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이 경악과 의혹으로 물들었다. 가문과 문파의 생존을 위해 사파와 손을 잡고 태을파를 멸문시키는 데 방조했던 추악한 거래의 현장이 천하 무인들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된 순간이었다.

"이, 이놈들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비밀이 폭로되자 남궁휘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더 이상 위선을 유지할 가식조차 남지 않은 그는 광기 어린 살기를 뿜어냈다.

"모두 비켜라! 저 요녀가 아가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육시를 내주마!"

남궁휘가 대지를 박차고 솟구쳤다.

스아아아!

그의 검 끝에서 남궁세가의 정수이자 살인 무공인 '창천벽력검(蒼天霹靂劍)'의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하늘을 찢을 듯한 기세로 내리꽂히는 뇌전의 검로였다. 동시에 무림맹의 다른 세작 장로들 삼 인이 가세하여 무령의 동방과 서방을 차단하고 치명적인 암수를 뻗어왔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절대적인 살초.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형체도 남지 않고 바스러질 위기였다. 제갈운이 경악하여 벽뢰목 목검을 치켜들려 했고, 진설화의 검이 남궁휘를 막아서려 움직였다.

그러나 백무령은 그들을 만류하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천선인과경은 이미 그들이 내뿜는 살인의 궤적과 인과의 도리를 완벽하게 분석해 내고 있었다.

'적이 내뿜는 살기가 크면 클수록, 그 살기는 스스로를 베는 칼날이 될 뿐.'

이것이 태을파의 진정한 협도이자 기정검의 이치였다.

무령은 부러진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초식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단순하고 우아한 원의 궤적이었다. 마치 잔잔한 물결 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부드러운 검로가 형성되었다.

스스스스-

남궁휘의 창천벽력검이 무령이 펼친 푸른 검막에 부딪히는 순간, 굉음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거울에 빛이 반사되듯 검기의 궤적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천선인과경의 인과반사 능력이 적들의 살인 무공을 고스란히 역수입하여 되돌려 보낸 것이다.

"어, 어째서 내 검기가……!"

남궁휘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자신이 뿜어냈던 절대적인 창천의 뇌전이, 고스란히 자신을 향해 꺾여 들어오고 있었다. 피할 도리도 없었다. 자신이 펼친 초식의 극의였기에, 그 파훼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쿠콰콰쾅!

"커어억!"

남궁휘는 자신이 날린 창천벽력검의 번개에 정면으로 직격당해 온몸의 경락이 파괴되며 비참하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측면에서 암습을 감행하던 다른 장로들 역시, 서로가 날린 치명적인 비수와 독공을 고스란히 나누어 맞으며 피를 토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이자, 스스로가 지은 업보에 의한 자멸이었다.

단 한 번의 반격, 아니 제대로 된 힘조차 쓰지 않고 구대문파의 기득권 장로들을 완벽하게 궤멸시킨 신화적인 광경에 무위봉 광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흙먼지가 걷히고, 부러진 검을 든 은발의 여도사만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이것이 그대들이 지은 죄업의 결과다."

무령의 음성은 준엄했고, 그 안에는 거스를 수 없는 천도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그리고 무림맹의 수많은 젊은 제자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은 더 이상 검을 쥐고 있을 명분을 찾지 못했다. 가문의 생존이라는 위선적인 구호 아래 자신들이 행하려 했던 짓이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를, 무령의 올곧은 검로가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그렁.

누군가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병장기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우리는…… 우리는 마녀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사파와 내통하고 있었다니……."

젊은 무인들의 눈에 서린 혼란과 자책을 보며, 진설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검을 거두고, 무령의 옆에 나란히 섰다.

"남궁의 제자들이여! 그리고 정파의 형제들이여!"

설화의 목소리가 산자락을 울렸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 의기를 버리는 것은 남궁의 법도가 아니다! 나는 이 시간부로 가식의 가면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겠다. 진정한 협(俠)이 어디에 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제갈운 역시 씩 웃으며 벽뢰목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무령의 반대편에 섰다.

"제갈세가의 제갈운 역시, 이 길에 내 목숨을 배팅하겠소. 위선자들의 썩은 동아줄을 잡느니, 부러진 검을 쥔 도사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 훨씬 구미가 당기거든."

그들의 외침에, 수많은 젊은 수사들이 동요했다. 마침내 남궁세가의 백여 명의 제자들이 남궁휘의 시신을 뒤로한 채, 백무령의 진영을 향해 걸어와 나란히 결집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맹종을 거부하고, 진정한 의기를 선택한 순간이었다.

위선으로 덮여 있던 무위봉에 마침내 진실의 빛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인과의 실타래는 그리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스으으으으-

갑자기, 찬란하게 비추던 아침 햇살이 급격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산마루를 온통 뒤덮은 것은 먹구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짙은 피비린내를 품은 붉고 어두운 안개였다. 대기를 가득 채운 습기가 비정상적으로 차갑게 식어 내리며, 툭, 툭, 붉은 핏방울 같은 폭우가 대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제갈운의 얼굴에서 장난기 가득하던 미소가 완전히 지워졌다. 그가 쥐고 있던 고목 벽뢰목 목검이 격렬하게 공명하며 푸른 불꽃을 튀겼다.

백무령의 푸른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천선인과경이 경고하고 있었다. 전례 없는 거대한 인과의 파괴자, 태을파를 멸문시키고 온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만악의 근원이 다가오고 있음을.

쿠르릉! 쾅!

폭우가 내리는 밤하늘처럼 어두워진 허공 한가운데, 거대한 짙붉은 피구름이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 피구름의 중심을 찢으며, 한 사내가 허공에 우뚝 서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장포를 걸치고,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사내.

"하하하하! 고작 이 정도 위선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천하를 바로잡았다고 생각했느냐, 꼬마 도사여."

지축을 흔드는 위압적인 음성이 무위봉 전체를 짓눌렀다.

태을파 파멸의 설계자이자 사파의 절대자, 혈영신마 현무백이 마침내 지상으로 강림하고 있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대지가 피빛 기운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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