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칠흑 같은 심연의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핏빛 안광이 일제히 명멸했다.

무너진 무위봉 지하 제단의 잔해 더미 너머, 차가운 습기와 함께 밀려오는 것은 썩은 살점과 마기가 뒤섞인 악취였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되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린 사파의 괴뢰생물들이 어둠을 틈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찢어질 듯한 괴성이 사방의 돌벽을 울리며 고막을 찔렀다.

"언니..."

소월이 백무령의 옷자락을 쥔 손을 잘게 떨었다.

무령은 부러진 검을 짚고 일어서려 했으나,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극렬한 화염이 그녀의 움직임을 구속했다. 쿨럭, 하는 거친 기침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바닥을 적셨다. 직전의 대결에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대가,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의 가혹한 율법인 인과반사(因果反射)가 전신의 기경팔맥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

'도심(道心)을 지키고 무정(無情)을 관철해야 하거늘...'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내상을 억누르려 했지만, 눈앞의 동료들을 향한 미세한 염려가 일어날 때마다 심맥은 더욱 처참하게 불타올랐다. 천선인과경의 푸른 안개가 눈앞에서 흐릿하게 깨어지고, 상대의 궤적을 꿰뚫어 보던 혜안마저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단 한 줌의 진기조차 운기할 수 없는 무학 상실의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무령의 신형이 허망하게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도사 누님!"

제갈운이 다급하게 외치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손에는 평범해 보이는 고목 벽뢰목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평소의 능청맞던 안광은 간데없고, 매서운 신광이 서린 눈빛이 어둠을 꿰뚫었다. 태을파 건원신수의 잔재로 만들어졌다는 그 신비로운 목검에서 미세한 푸른 뇌전의 기운이 일어나 주위의 마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남궁의 여식! 넋 놓고 있을 시간 없소! 저 괴물들이 몰려오오!"

제갈운의 외침에 진설화가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기가 어둠을 갈랐으나, 그녀의 손목을 타고 흐르는 기의 흐름은 기이할 정도로 탁하고 둔했다.

무령은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도 천선인과경의 잔광을 통해 진설화의 손목을 주시했다. 가느다란 가죽 소매 아래, 살을 파고들어 뼈마디까지 구속하고 있는 검은 실선이 보였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자식을 완벽한 인형으로 부리기 위해 심어둔 금단이자 가문의 은밀한 수치, '백맥쇄혼사(百脈鎖魂絲)'였다. 진설화가 검을 크게 휘두를 때마다, 그 독선은 그녀의 기혈을 옥죄며 심장으로 치명적인 음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 같은 위선자 하나... 여기서 스러진들 어떠하리."

진설화가 비장한 혼잣말을 내뱉으며 괴뢰들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검초는 화려했으나,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자포자기의 살수였다. 괴뢰들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어깨를 스쳐 가며 붉은 피가 허공에 휘날렸다.

스스스스!

괴뢰 한 마리가 무령의 무력한 신형을 향해 허공을 가르며 낙하했다. 타들어 가는 경락의 고통 속에서 무령은 눈을 감으려 했다. 무정한 도사로 살아가며 홀로 인과를 짊어지다 사라지는 것이 마땅한 귀결이라 믿었기에.

콰장창!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괴뢰의 몸뚱이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내 뒤에 딱 붙어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사매!"

제갈운이 벽뢰목 목검으로 괴뢰의 두개골을 내리쳐 박살 내며 무령의 앞을 굳건히 지켰다. 그의 등 뒤로 소월이 필사적으로 도가의 신결을 맺으며 푸른 보호막을 전개하고 있었다. 소월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얇은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언니... 조금만 버텨. 내가, 내가 언니를 지킬 거야. 늘 보살핌만 받던 사매가 아니라고...!"

겁 많은 소월의 목소리에 서린 지독한 헌신이 동굴의 차가운 공기를 데웠다.

진설화 역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마치 겨울날의 서리발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며 괴뢰들의 사지를 잘라내었다. 가문의 독선이 심장을 조여와 입가로 피를 흘리면서도, 그녀는 무령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살기를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백 도우, 당신은 살아야 하오. 당신만이... 이 썩어빠진 강호의 위선을 끊어낼 수 있으니까."

진설화의 검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가문의 굴레 속에서 평생을 억압받아 온 영혼이 터뜨리는 마지막 절규였다.

동료들이 스스로의 육신을 고기방패 삼아 비참한 자신을 구하고자 버텨내는 광경이 무령의 눈동자에 투영되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태고의 화산이 요동치듯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어찌하여 나를 위해 이토록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가.'

그녀는 늘 인간의 감정이란 배신을 낳고 유약함을 부르는 무가치한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왔다. 무정(無情)을 고집하며 홀로 고고하게 고통받는 것만이 태을파의 진정한 협도라 믿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서로의 단점을 영리하게 보완해 싸우는 저들의 모습은, 그녀가 고집해 온 무정의 세계를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제갈운의 기발한 초식이 괴뢰의 시선을 빼앗으면, 진설화의 정교한 검로가 그 숨통을 끊었다. 소월의 신력 보호막은 적절한 타이밍에 그들의 빈틈을 메워주었다. 무기를 잃고 쓰러질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밀치고 등을 맞대며 뜨거운 협동의 연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정파의 위선적인 명분도, 사파의 비열한 생존 본능도 아니었다. 오직 동료를 살리겠다는 순수한 열망이 빚어낸 참된 협(俠)의 광경이었다.

무령의 심장 지하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도심(道心)의 마중물이 비로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홀로 고고한 도(道)가 어찌 천하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는 무정이 어찌 협이라 불릴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옭아맸던 아집의 족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진설화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손목의 백맥쇄혼사가 시퍼런 안광을 발하며 그녀의 전신 기혈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이다. 괴뢰 세 마리가 일제히 무방비 상태가 된 진설화의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쇄도했다.

"안 돼...!"

소월의 비명이 동굴을 찢었다. 제갈운 역시 멀리 떨어진 괴뢰들을 상대하느라 손을 쓸 수 없는 거리였다.

무령의 안광이 푸르게 타올랐다. 인과반사의 극통이 전신을 난도질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그녀는 부러진 검을 움켜쥐었다.

'내 육신이 멸할지언정, 이 인연을 저버리지 않겠다!'

그녀의 도심이 격정으로 승화하는 찰나, 천선인과경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거대한 빛을 발했다. 진설화의 손목을 휘감고 있는 검은 독선의 완벽한 파훼점, 인과의 매듭이 무령의 혜안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스스스스—!

무령의 신형이 대지의 순리를 따르는 바람처럼 부드럽고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낙엽이 흩날리듯 자연스러운 신법에 괴뢰들의 손톱은 허공만을 갈랐다.

부러진 검끝이 허공을 가르며 진설화의 손목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살기가 아닌, 구원의 도리이자 올곧음을 관철하는 기정검(奇正劍)의 극의였다.

쨍강—!

맑고 청아한 파열음이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진설화의 손목을 수년간 옭아매며 영혼까지 갉아먹던 남궁세가의 비전 구속구, 백맥쇄혼사가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흑색의 독기가 허공에서 증발하고, 진설화의 맥상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둑이 터진 듯 남궁세가 본연의 순수한 진기가 폭발적으로 회생하기 시작했다.

"아아..."

진설화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자신을 구속하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사라진 해방감에,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검 끝에 서린 검기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찬란한 청색의 광휘로 변해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고맙소, 백 도우!"

기력을 회복한 진설화가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제갈운 역시 고목 목검을 휘두르며 가세했다.

"하하! 이거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려! 도사 누님, 드디어 마음을 여신 거요?"

그들의 협동은 한층 더 완벽해졌다. 구속에서 벗어난 진설화의 검은 거침없는 폭포수처럼 괴뢰들을 쓸어버렸고, 제갈운의 목검은 벼락처럼 마기를 정화했다. 소월의 신력은 푸른 꽃을 피우듯 일행의 생명력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피어난 세 사람의 뜨거운 연대는 마침내 사방을 가득 메웠던 사파 괴뢰생물들을 완전히 격퇴해 냈다. 바닥에는 괴뢰들의 사체만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동굴 안에는 일행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무령은 부러진 검을 바닥에 꽂은 채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여전히 전신을 태우는 인과반사의 고통이 남아 있었으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도심의 온기가 그 고통을 감싸 안아 완화시키고 있었다. 무정에서 유정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자, 억눌린 심상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오달(悟達)의 징조였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이었다.

우르르릉—!

동굴 전체가 이전의 붕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거대한 암석들이 떨어져 내렸고, 바닥의 균열 사이로 붉고 검은 마기가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쩌어어억!

지하 무위제단의 마지막 보루이자 수백 년간 지맥을 수호해 오던 태을파의 고대 수호벽이 비참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 이 기운은...!"

제갈운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고목 목검이 주인의 떨림을 대변하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피비린내 나는 폭풍의 중심에서, 공간이 왜곡되며 검붉은 포탈이 열렸다. 그리고 그 어둠의 틈새를 뚫고, 기괴한 관절 꺾이는 소리와 함께 수십, 수백 명의 형상이 전각의 잔해 위로 내려앉았다.

살아있는 인간의 가죽을 꿰매어 만들고, 눈동자에는 오직 살의와 독수만이 가득 찬 마도 독인형들이었다. 그들의 손가락 끝에서는 맹독이 서린 손톱이 번뜩였고, 전신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마기가 흘러나와 일행의 전후좌우를 완벽히 포위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대지를 조롱하는 듯한 나지막하고도 잔혹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흐흐흐... 어리석은 태을의 잔당들이여. 스스로 족쇄를 풀고 자축하는 꼴이 실로 가관이구나."

동굴 사방의 암벽을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있어 듣는 이의 고막을 찢어발길 듯 거칠었다. 그것은 실재하는 인간의 성정이 아니었다. 오직 살육과 파멸만을 위해 벼려진 혈영신마(血影神魔) 현무백의 영식(靈識)이 마도 독인형들의 주둥이를 빌려 동시다발적으로 뿜어내는 기괴한 합창이었다.

스산한 음성이 가라앉기 무적섭섭하게, 독인형들의 이마에 새겨진 붉은 박쥐 문양이 일제히 핏빛으로 박동했다. 그 흉측한 낙인은 어둠 속에서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주변의 음기를 빨아들였다.

카아악!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독인형이 사방에서 허공을 가르며 격돌해 왔다. 그들이 뻗어내는 손가락 끝마다 시퍼런 독무(毒霧)가 뿜어져 나와 사방의 암벽을 부식시켰다. 치명적인 마공의 궤적이 그물망처럼 얽히며 일행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낙화유수(落花流水)의 격이라! 쏟아지는 물길은 막을 수 없으나, 흘러가는 길목을 비틀면 그뿐!"

제갈운이 호기롭게 외치며 벽뢰목 목검을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스스스스—!

그의 목검이 대기를 가를 때마다, 오래된 고목의 표면에서 푸른빛의 뇌전이 뿜어져 나와 덮쳐오는 독무를 태워버렸다. 태을파 건원신수의 영험한 기운이 마기를 정화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평범해 보이던 목검의 손잡이 부분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제갈운의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영물의 힘을 끌어다 쓰는 육신이 한계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그의 안광만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예리하게 빛났다.

"남궁의 검은 이제 막 사슬을 벗어났다! 내 앞을 가로막는 역천(逆天)의 무리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진설화가 대지를 박차고 솟구쳤다. 백맥쇄혼사가 끊어진 그녀의 전신에서는 남궁세가 고유의 순수하고도 광활한 창천진기(蒼天眞氣)가 폭포수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스파앗!

그녀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검기가 어둠을 가르고 독인형들의 목을 가차 없이 참수했다. 가문의 위선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난 그녀의 검로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매서운 북풍한설처럼 차갑고도 거침없는 그 기세는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는 끝이 없었다. 쓰러진 독인형들의 시체 너머로 더 많은 수의 괴물들이 포탈을 뚫고 끝없이 기어 나왔다.

"언니... 조심해!"

소월이 비명을 지르며 무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얇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으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도가의 방어막은 무령을 조금이라도 더 감싸 안기 위해 필사적으로 팽창했다.

무령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인과반사의 불길은 전신의 기경팔맥을 끊임없이 태워버리고 있었다. 동료들을 향한 연민과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격정이 커질 때마다, 천선인과경의 율법은 가차 없이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에 무령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을 짚었다.

'도(道)를 닦는 자의 마음은 본래 물과 같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하거늘...'

무령은 내면의 심연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거 동료의 배신으로 문파가 멸문당한 이후, 그녀는 줄곧 마음을 닫아걸었다. 감정은 나약함을 낳고, 인연은 파멸을 부르는 독초라 믿었기에 스스로를 무정(無情)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이들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정(情)이 없는 도(道)는 그저 생명력이 없는 차가운 돌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홀로 고고하게 등선하는 길은 천도의 참뜻이 아니었다. 진정한 협(俠)이란, 인과의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면서도 소중한 이들을 위해 손을 뻗는 숭고한 용기였다.

'스스로 옭아맨 무정의 사슬을 깨부수리라. 이것이 내 파멸을 부를지라도, 이 길 끝에 태을의 진정한 의기가 존재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순간, 무령의 가슴 속에서 억눌려 있던 도심의 마중물이 황홀한 격정으로 승화하며 폭발했다.

화아아악!

그녀의 전신에서 타오르던 붉은 내상의 불길이, 찰나의 순간 푸른 도가의 불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인과반사의 제약을 깨부수고 스스로의 심리적 병목을 돌파하는 오달(悟達)의 찰나였다. 비록 완벽한 경지 돌파는 아니었으나, 그녀의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천선인과경의 진정한 힘이 마침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무령의 두 눈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찬란한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독인형들의 기의 흐름, 그들이 내뿜는 마공의 치명적인 궤적과 파훼점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투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물러서라."

무령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굴 안의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그녀가 부러진 도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신은 반토막이 나 있었으나, 그 끝에서는 대지의 지맥을 관통하는 거대한 무형의 검기(劍氣)가 푸른 가지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상대의 살기가 강할수록 그 위력을 배가시키는 기정검(奇正劍)의 진정한 묘리가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무령의 신형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녀가 부러진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허공에 거대한 태극의 형상이 푸른 빛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바람의 흐름이자, 천지의 올곧음을 관철하는 검로였다.

쿠르릉!

푸른 검기의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쇄도하던 독인형들을 쓸어 담았다. 단 한 번의 격동으로 수십 마리의 마도 독인형들이 마기와 함께 허공에서 먼지가 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천선인과경의 인과율을 역이용한 일격은 적들의 마공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되돌려주며 완벽한 파멸을 선사했다.

"과연... 천선의 기연을 얻은 자답구나."

그때, 거대한 포탈의 중심부에서 대지를 진동시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낙하하는 돌더미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둠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마기를 풍기는 형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신이 무거운 쇠사슬로 묶여 있고, 거대한 기괴한 도검을 손에 쥔 괴인이었다.

그 괴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무령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찢겨 나간 도포 자락 사이로 보이는 태을파 고유의 청색 문양, 그리고 비록 마기에 오염되어 흉측하게 변했으나 잊을 수 없는 엄숙한 이목구비.

그것은 과거 태을파를 수호하던 수장이자, 무령에게 처음으로 도를 가르쳐 주었던 사부, 태을선인(太乙仙人)의 시신이었다. 현무백은 태을파를 멸문시킨 것도 모자라, 그들의 고결한 사부의 육신마저 마도 독인형으로 개조하여 제자들의 목을 베기 위한 도구로 내보낸 것이었다.

사부의 죽은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든 채, 부러진 검을 쥔 무령을 향해 서서히 검 끝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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