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진설화의 양 손목에 얽매여 있던 남궁세가의 가혹한 굴레가 풀리는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 마침내 억눌렸던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가문의 허울 좋은 명예와 위선에 갇혀 질식해가던 그녀가 흘리는 최초의 진실한 눈물이었다.

그와 동시에, 패배의 벼랑 끝에 몰린 모용적의 입술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이미 단전이 파괴되고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나기 직전이었으나, 그의 가슴속에 도사린 가문 존속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광기는 꺾이지 않았다.

"태을파의 잔당 년이 감히 우리 모용세가를 무너뜨리려 드는구나! 나와 함께 황천길의 동무가 되거라!"

모용적이 최후의 수단으로 혈영신마가 하사한 금단의 적색 살해 침을 입안에서 뱉어냈다.

파아아앗!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것은 단순한 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혈영신마의 마기가 압축된 피의 결정체이자, 닿는 모든 생명력을 잠식하여 폭발시키는 금단의 암기였다. 붉은 광망을 뿜어내는 암기는 대전의 어둠을 붉게 물들이며 무령 일행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왔다.

그 붉은 침의 궤적은 기이하게도 공중에서 수십 갈래의 붉은 광선으로 갈라지며 일종의 살상 그물을 형성했다. 그대로 방치했다간 백무령 자신뿐만 아니라, 기력이 쇠한 진설화와 뒤에서 대기하던 소월, 제갈운까지 한꺼번에 핏빛 폭발의 제물이 될 터였다.

"소월아! 태을의 기운으로 사방을 묶어라!"

무령이 급박하게 외쳤다.

"예, 언니!"

겁이 많아 평소라면 제자리에 주저앉았을 소월이었으나, 사매로서 무령을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손끝을 모았다. 소월의 손끝에서 푸른 도가의 기운이 실타래처럼 뿜어져 나와 허공에 태을파 특유의 방어 진법인 '태을수호결(太乙守護結)'의 그물을 짰다.

동시에 백무령은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의 혜안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고 맑은 거울처럼 변하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적색 살해 침의 인과율과 무공 궤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적이 내뿜는 살기가 거세면 거셀수록 그 힘을 되돌려주는 기정검(奇正劍)의 이치가 무령의 뇌리를 스쳤다. 마치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그 바람의 흐름을 타서 돛을 올리는 돛배처럼, 무령은 적의 마기를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부러진 검 날을 비스듬히 세웠다.

스아아아!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인 '흐르는 물이 바위를 깎아내듯', 무령의 검 끝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원을 그렸다. 기정검의 정(正)함이 중심을 잡고, 기(奇)함이 변칙적인 궤적으로 붉은 침들의 진동 주파수를 흐트러뜨렸다.

챙! 채쟁!

무령의 부러진 검 끝과 소월이 펼친 푸른 도가 결계가 연동했다. 붉게 광란하며 폭발하려던 마기의 침들이 푸른 진기의 그물망에 갇혀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나운 맹수를 쇠사슬로 묶어 제풀에 지치게 만들듯, 붉은 광란폭발은 백무령이 전개한 검막과 소월의 결계 내부에서 가두어진 채 이리저리 부딪치며 소멸해 갔다.

그러나 위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령의 천선인과경은 적의 초식만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흐느끼며 쓰러져 있는 진설화의 손목으로 향했다. 진설화의 얇은 손목뼈를 파고들어 기경팔맥을 억누르고 있는 기이한 붉은 실, 그것은 남궁세가의 가주가 자식을 완벽하게 구속하고 가문의 꼭두각시로 부리기 위해 심어둔 금단의 구속구이자 독선인 '백맥쇄혼사(百脈鎖魂絲)'였다.

그 독선이 진설화의 심장으로 독기를 뿜어내며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진설화의 안색은 이미 시체처럼 창백했고, 손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저 사슬이 설화의 영혼마저 갉아먹고 있구나.'

무령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와 함께, 동료를 구하고자 하는 뜨거운 연민이 고개를 들었다.

과거 태을파가 멸문당할 때 자신을 배신했던 이들을 떠올리며 인간의 감정을 나약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려 했던 그녀의 아집이 흔들렸다. 진설화가 자행했던 위선마저도 결국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처절한 인과와 강요된 구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 무령은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검을 쥔 무령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 찰나, 천선인과경의 가혹한 업보인 인과반사(因果反射)가 발동했다.

화아아악!

"윽...!"

무령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타인에게 깊은 연민과 구원의 감정을 품은 대가였다. 전신의 기경팔맥이 활화산의 용암을 들이켠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시뻘건 화염 맥박이 경락을 타고 흐르며 온몸의 뼈마디를 부수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붉은 선혈이 무령의 고운 입술 사이로 울컥 뿜어져 나왔다. 전신이 사정없이 떨렸고, 무릎이 꺾이려 했다. 타인을 구하려 할 때마다 자신의 무학적 생명이 깎여 나가는 이 잔인한 법도 앞에서, 무령은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고통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눈빛은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

'인과가 나를 가두고, 천도가 나를 시험한다면... 나는 내 검으로 그 하늘조차 가르리라.'

무령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철학적 사유에 도달했다. 무정(無情)이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천하를 품는 거대한 유정(有情)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를 가둔 무정의 족쇄야말로 진정한 협(俠)의 길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설화야, 견뎌라!"

무령이 전신의 통증을 억누르며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부러진 검이 허공에서 한 줄기 서리 같은 검기를 뿜어냈다.

태을파의 기정검이 지닌 정(正)의 이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설화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갗은 전혀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오직 그 단단하고 질긴 백맥쇄혼사만을 정밀하게 겨냥한 검로였다.

서그럭!

금속이 잘려 나가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진설화의 손목을 옥죄던 백맥쇄혼사가 끊어져 나갔다. 검붉은 독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며 진설화의 맥상이 비로소 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아..."

진설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평생 자신을 억누르던 굴레가, 자신들이 멸문시키는 데 방조했던 태을파의 후계자의 손에 의해 끊어진 것이다. 그 수치심과 동질감,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구원의 감정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감격을 누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크하하하! 끊어냈느냐? 그래봤자 결국 여기서 모두 죽는다!"

바닥에 쓰러진 모용적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광소했다. 그의 온몸에서 검붉은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완전히 불태워 대전 지하의 지맥을 폭파하려는 최후의 난무를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요동쳤다. 무위봉 지하 제단의 거대한 주춧돌들이 쩍쩍 갈라지며 천장에서 집채만 한 바위들이 비 오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십만 근에 달하는 거석들이 무령 일행의 머리 위로 낙하하며 출구를 완전히 봉쇄하려 들었다.

"이런, 정말 미쳐 날뛰는군!"

제갈운이 평소의 냉소적인 표정을 잃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에는 평범해 보이는 고목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태을파 건원신수의 잔재로 만들어진 영물인 벽뢰목 목검이 주인의 긴장감에 호응하듯 미세하게 공명하며 푸른 단향을 풍겼으나, 낙하하는 거석의 무게를 받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언니! 머리 위가...!"

소월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인과반사의 내상으로 인해 전신이 불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백무령은 검자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차오르는 피를 삼키며,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내 육신이 부서질지언정, 내 검은 꺾이지 않는다.'

무령의 눈동자에 푸른 도가의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천선인과경의 혜안으로 낙하하는 수십만 근 바위들의 무게중심과 균열의 궤적을 순식간에 읽어냈다. 그리고 단전에 남은 마지막 진기를 쥐어짜 내어 부러진 검 날 위로 집중시켰다.

이윽고, 부러진 검 날 끝에서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푸른 강기(劍罡)가 서리처럼 맺혔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인 '벼락이 밤하늘을 갈라 어둠을 깨치듯' 극렬하고도 올곧은 태을의 정기였다.

"깨져라!"

무령의 외침과 함께 푸른 검강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치솟았다.

스파아아앗!

찬란한 푸른 빛무리가 대전의 어둠을 가르고 천장을 향해 쏘아져 올라갔다. 수십만 근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들이 무령의 검강과 충돌하는 순간, 마치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마른 잎사귀처럼 맥없이 두 동강으로 쪼개져 나갔다.

콰콰콰쾅!

거석들이 좌우로 비산하며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치명적인 낙석을 막아냈다. 피가 뿜어 나오는 반사의 내상을 이 악물고 통제하며 거둔, 실로 경이롭고도 통쾌한 대활약이었다.

그러나 모용적의 광기가 불러온 지맥의 붕괴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흐흐흐... 결국... 함께 가는 것이다..."

모용적의 시신이 마기와 함께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이 발을 딛고 있던 대전의 바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심연이 아가리를 벌렸다.

"아아악!"

소월과 진설화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제갈운 역시 고목 목검을 꽉 쥔 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령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소월과 진설화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하지만 거대한 지구력과 중력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무너지는 흙더미와 거석 파편들과 함께, 무위봉 지하 깊은 곳에 숨겨진 미지의 동공 속으로 단숨에 추락해 내려갔다.

사방을 채우는 바람 소리와 대지의 비명, 그리고 암흑.

얼마나 떨어졌을까.

콰아아앙!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무령의 신형이 부드러운 흙더미 위로 굴러떨어졌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인과반사로 인한 내상과 추락의 충격이 겹쳐, 그녀는 한동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콜록! 콜록...! 모두... 무사한가?"

어둠 속에서 제갈운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설화 언니..."

소월의 떨리는 신음이 뒤이어 들렸다. 다행히 낙하하는 과정에서 무령이 끝까지 그들을 보호한 덕에, 동료들은 큰 부상을 면한 듯싶었다.

무령은 부러진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는 극도의 어둠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태을전 지하 제단보다 훨씬 더 깊은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태고의 지맥 동굴에 갇혀 버린 것이 분명했다.

숨통을 조여오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스스스스...

그때, 저 멀리 무너진 거석과 잔해 더미 너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기어 다니는 불길하고 음산한 소리였다.

무령의 천선인과경이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반응했다. 극도의 살기와 마기가 어둠 속에서 응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아아악!

어둠 속에서 핏빛 눈동자들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너 개에 불과하던 붉은 안광은 순식간에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나며 잔해 더미 너머를 가득 메웠다. 숨이 막힐 듯한 압도적인 마기가 일행의 생명력을 옥죄어 왔다.

어둠 속에서 굶주린 이빨을 드러내며, 마물들의 무리가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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