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횃불의 화광이 무너진 태을전의 기둥 사면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모용세가 무사들의 서슬 퍼런 도검이 밤안개를 가르며 차가운 쇠 냄새를 풍겼다.
모용적은 기둥 뒤편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눈지에 서린 살기는 한 가문의 명운을 짊어진 자 특유의 무겁고도 비장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태을파의 망령이 기어이 무덤을 깨고 나왔구나."
모용적의 음성은 쇠를 긁는 듯 껄끄러웠다. 그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움켜쥘 때마다 앙상한 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가문의 쇠락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과거 태을파의 멸문에 가담했던 죄책감이 뒤엉킨 심마가 그의 미간 사이에 깊은 고랑을 파놓고 있었다. 밤마다 향을 피우며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던 위선조차, 지금 이 순간 가문의 생존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한낱 사치에 불과했다.
백무령은 솟구치는 피를 삼키며 부러진 검을 비스듬히 내렸다. 소월의 손길과 제갈운의 신뢰가 남긴 온기는 여전히 등 뒤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 대가는 비정했다. 심장 깊은 곳에서 경맥을 태워 올리는 천선인과경의 인과반사가 가차 없이 고동쳤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기경팔맥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통이 휘몰아쳤지만,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신형을 바로 세웠다.
"모용 가주, 가문의 안위를 핑계 삼아 지은 업보를 여전히 무거운 칼날로 덮으려 하는가."
무령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흙먼지 가득한 전각에 울려 퍼졌다.
"닥쳐라! 네년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모용세가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하늘이 우리를 버렸다면, 나 스스로가 악귀가 되어서라도 가문을 지킬 것이다!"
모용적이 포효했다. 그의 신형이 대기를 가르며 짓쳐 들었다.
슈우우웅!
그가 펼쳐낸 검초는 모용세가의 비기인 무영강검(無影剛劍)이었다. 그러나 그 검로에는 정파의 올곧음 대신,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의 악에 받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번뜩이는 검기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무위봉의 척박한 대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검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울부짖는 바람 소리가 마치 원혼들의 비명 같았다.
무령은 천선인과경을 통해 그의 검로를 응시했다. 모용적의 초식은 정교했으나, 심마에 잠식된 탓에 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그의 검을 무겁고 둔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처절한 생존의 비틀림이 무령의 안광에 고스란히 비쳤다.
'살아남기 위해 위선을 택하고, 그 위선을 지키기 위해 다시 살행을 저지르는구나.'
무령은 내뱉는 숨결마다 섞여 나오는 혈향을 무시한 채, 부러진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챙! 챙! 채앵!
부러진 검 끝에서 피어오른 푸른 검기가 모용적의 광포한 강기를 하나씩 걷어냈다. 낙엽이 가을바람에 쓸려가듯 자연스러운 검로였다.
그러나 모용적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핏발을 세우며 더욱 맹렬하게 대검을 내리찍었다. 맹렬한 참격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하 제단 입구를 무너뜨릴 기세로 쏟아졌다.
"비켜라, 백무령! 너 한 년만 죽으면 모든 비밀은 묻힌다!"
그의 검초가 극성전(極盛殿)의 무거운 천장 돌들을 부수며 낙하했다. 무령은 그의 검날을 비껴 흘리며 신형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순간, 모용적의 살기가 무령이 아닌 다른 곳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포위망 한구석에 서 있던 남궁세가의 진설화였다.
진설화는 칼자루를 쥔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가문의 명예와 도덕적 완벽함이라는 가면 아래에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르는 위선에 숨이 막혀 가고 있었다. 모용적은 그런 진설화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진 소저! 남궁세가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저 계집을 베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가문이 저지른 추악한 밀약 역시 온 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모용적의 비열한 외침에 진설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무겁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진설화의 오른쪽 손목에서 기이한 붉은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그것은 실 가닥처럼 얇지만, 살 속 깊이 파고들어 뼈를 갉아먹는 형상의 붉은 기운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자식을 완벽하게 구속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심어둔 가문 비전의 독구, 백맥쇄혼사(白脈鎖魂絲)였다.
그녀가 가문의 의지에 반하거나 행동을 주저할 때마다, 이 독선은 경맥을 타고 올라가 심장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기였다. 남궁세가의 장로들이 모용적에게 건넨 격발의 진기가 모용적의 소매 끝에서 뿜어져 나와 진설화의 손목에 닿은 것이었다.
"으윽...!"
진설화가 짧은 신음을 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독기가 서서히 그녀의 얼굴빛을 흑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모용적은 진설화를 고기방패이자 움직이는 독침으로 삼아 백무령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아군마저 도구로 희생시키는 정파 가주의 잔인한 위선이 횃불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제갈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목검을 꽉 쥐었다.
"이런 비열한 자를 보았나. 가문의 안위를 지킨답시고 제 동맹의 후기지수 목숨까지 핏줄기로 쓰려는가!"
소월 역시 겁에 질린 눈으로 무령의 소매를 붙잡았다.
"사언니, 저 언니가... 저 언니가 죽어가요!"
동료들의 다급한 외침이 무령의 고막을 때렸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무령의 심상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가슴을 찢어발기는 극심한 내상이 무령의 기경팔맥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천선인과경의 저주가 그녀의 도심을 불태웠다. 타인에게 연민을 품고 그들을 구하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인과의 반사. 입가로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이 턱끝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무령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물빛처럼 맑게 가라앉았다.
'인연을 맺는 것이 고통이며, 협을 행하는 것이 파멸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고 전신의 내상을 힘으로 억눌렀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나는 천도조차 거슬러 이 칼날을 휘두르리라.'
그녀의 뇌리에 태을파의 진정한 의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무정(無情)의 껍데기를 깨부수고 나오는 찰나의 깨달음이 그녀의 부러진 검 날에 푸른 광휘를 더했다.
무령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어리석도다, 모용적!"
무령의 외침과 함께 부러진 검이 반원을 그리며 낙하했다. 그것은 적이 내뿜는 살기와 위선의 크기만큼 위력이 배가되는 태을파 최고의 묘리, 기정검(奇正劍)이었다.
슈아아아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고요했으나, 그 검풍은 대지를 뒤흔들 만큼 묵직했다.
모용적은 진설화를 방패 삼아 무령의 검을 막으려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무령의 검로는 그의 계산을 아늑히 초월해 있었다. 천선인과경으로 읽어낸 인과의 실타래 속에서, 무령의 검날이 번개처럼 꺾였다.
지이잉!
검풍이 진설화의 손목을 아주 미세하게 비껴 지나갔다.
살을 베지 않고 오직 기의 흐름만을 끊어내는 정밀한 쾌검. 푸른 검기는 진설화의 손목을 옭아매고 있던 붉은 실, 백맥쇄혼사만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팅! 하는 맑은 파음과 함께, 진설화의 피를 빨아먹던 붉은 독선이 순식간에 사방으로飞산하며 소멸했다. 가주가 심어둔 잔인한 구속구가 단 한 번의 검풍에 허무하게 끊겨 나간 것이다.
"아..."
진설화의 입에서 탁한 독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옭아매던 무거운 독박이 사라지자, 그녀의 눈동자에 맑은 생기가 돌아왔다. 손목을 조이던 백맥쇄혼사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을 가문에 얽매던 잔혹한 족쇄로부터 구원해 준 자가, 자신들이 사냥하려 했던 태을파의 후예라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 이럴 수가...! 가문의 비전 독선을 검기로 끊어내다니!"
모용적이 경악하며 뒤로 주춤했다.
하지만 무령의 검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독선을 끊어낸 기정검의 잔풍이 그대로 모용적의 대검을 직격했다.
쿠우우웅!
"크아악!"
모용적의 손에서 대검이 번쩍이며 밤하늘 높이 날아갔다. 그의 호구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아군을 방패막이 삼아 연명하려던 위선적인 모작 검로가, 천도의 올곧음을 관철하는 기정검의 묘리 앞에 무참히 분쇄된 것이다.
모용적은 흙바닥을 구르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흑의무사들이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이미 무령이 내뿜는 서슬 퍼런 도기에 압도당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가주의 명예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더럽혀져 있었다.
진설화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끊어진 손목의 흔적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흐느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저를 구하셨습니까..."
무령은 부러진 검을 거두며 그녀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내상의 불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굳건히 버텨 서 있었다.
"남궁세가의 위선은 네가 짊어질 죄가 아니다. 스스로의 검으로 바로잡아라."
무령의 음성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때였다.
바닥에 쓰러져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용적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가문의 생존이라는 명분마저 잃어버린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흐흐흐... 백무령...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다 멈추더니, 이내 이빨 사이로 숨겨두었던 작은 물건을 씹어 삼키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냈다.
스우우우.
모용적의 입안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검붉은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혈영신마가 그에게 하사했던 금단의 암기이자, 마기가 응축된 적색 살해 침(赤色殺害針)이었다.
"다 함께 죽자!"
모용적이 입을 벌림과 동시에, 핏빛으로 물든 붉은 침이 기괴한 파공음을 내며 백무령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대기를 부식시키는 지독한 마기가 무위봉의 지하 제단 전체를 순식간에 붉은 어둠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붉은 침이 대기를 부식시키며 화살처럼 쏘아져 오는 찰나, 무령의 미간에 자리 잡은 명경(明鏡)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천선인과경의 궤적이 뇌해 속에서 수십, 수백 갈래의 붉은 실선으로 화하여 그 기괴한 독침의 경로를 그려내었다.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신(人身)의 정혈을 태워 마공의 기운과 융합시킨, 한 번 닿는 것만으로도 혼백을 부스러뜨리는 살장(殺障)이었다.
피해야 했다. 멈추지 않는 인과의 흐름이 그녀에게 그리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령의 발끝은 대지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 진설화의 손목을 얽매던 가문의 족쇄를 끊어내며 품었던 연민의 감정, 그리고 그녀의 눈물에 공명했던 도심(道心)이 기어이 전신의 기경팔맥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놓은 탓이었다.
콰르르릉!
심장 내부에서 뜨거운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목구멍으로 왈칵 치밀어 오르는 선혈을 억지로 삼키느라 무령의 고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전신을 지탱하던 진기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려 했다. 타인을 구원한 대가로 자신의 무학적 생명이 깎여 나가는 인과반사의 비정함이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무령!"
그 순간,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제갈운의 신형이 무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 쥔 고목 벽뢰목 목검이 웅장한 호선(弧線)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
타아앙!
목검의 끝자락이 붉은 침의 위력에 부딪히는 순간, 제갈운의 전신이 크게 출렁였다. 평범해 보이는 나무검이었기에 마기의 독성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한 줄기 검은 피가 흘러내렸고, 검을 쥔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기괴한 파공음이 울렸다.
"비켜라, 제갈 소협...!"
무령이 신음하듯 소리쳤으나, 제갈운은 이빨을 악문 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평소의 냉소적이던 빛은 간데없고, 오직 동료를 지키겠다는 처절한 투지만이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입 닥치고 뒤에 서 있어! 도사님만 피를 흘릴 줄 아는 줄 아나!"
뒤이어 진설화 역시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백맥쇄혼사가 끊어진 손목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여전히 독기 탓에 안색이 창백했으나, 가문의 위선이라는 두터운 껍질을 깨고 나온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평생 가문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며 수많은 죄를 묵인했으나... 오늘만큼은 당당한 협객으로 죽겠다!"
두 사람이 무령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검막을 형성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무령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격정이 소용돌이쳤다.
'어찌하여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진단 말인가. 정파의 명예도, 가문의 영달도 아닌, 한낱 멸문한 문파의 도사를 위해...'
그녀는 늘 인간의 감정을 나약한 자들이 부리는 응석이자 파멸의 지름길이라 여겼다. 스스로를 무정(無情)의 고독 속에 가두는 것만이 진정한 도를 닦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지키고자 대치하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본 순간, 가슴을 옥죄던 아집의 자물쇠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만물이 흐르는 순리는 본래 무정하나, 그 무정을 뚫고 피어나는 한 송이 유정(有情)이야말로 천지를 흔드는 참된 도(道)의 실체가 아니던가. 타인을 향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억누르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박제하는 위선에 불과했다.
'내 몸이 불타 없어질지언정, 이들의 의기를 꺾이게 두지 않으리라.'
그 찰나의 오달(悟達)이 무령의 단전에 잠들어 있던 진기를 폭발시켰.
화아아아악!
인과반사로 인해 시커멓게 타들어 가던 경맥 속에서, 푸른빛의 도가 진기가 샘솟듯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기운이 아니었다. 고통마저 자신의 힘으로 온전히 포용하고 승화시킨, 한 단계 격상된 기정검의 씨앗이었다.
"물러서라!"
무령이 제갈운과 진설화의 어깨를 가볍게 밀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부러진 검 날 위로 이전에 본 적 없는 찬란한 푸른 강기가 서리처럼 맺혔다.
스아아아!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적이 내뿜는 살기가 크면 클수록 그 힘을 되돌려주는 기정검의 묘리가 극의에 달해 발현되었다. 붉은 침이 내뿜는 서슬 퍼런 마기가 무령의 검풍에 휘말려 갈래갈래 찢겨 나갔다.
팅! 팅! 팅!
공중에서 붉은 침들이 흔적도 없이 격파되며 적색의 마기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크, 크학! 말도 안 된다...! 어찌 저런 몸으로 내 비기를...!"
모용적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눈가에 서린 절망은 이제 광기를 넘어 종말의 공포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무령 역시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검을 거두는 순간, 억눌렀던 인과반사의 내상이 한꺼번에 몰아쳐 그녀의 신형이 크게 휘청였다. 입안이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 찼고,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때, 바닥에 쓰러진 모용적이 기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가슴팍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흐흐흐... 늦었다. 이미 이 제단의 파멸은 시작되었어. 혈영신마께서 내리신 마기가 내 단전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니... 너희 모두 이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나와 함께 썩어갈 것이다!"
쿠구구구구!
모용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기류가 대전의 주춧돌을 타고 지하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천장이 갈라지며 집채만 한 바위들이 굉음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위봉 태을전의 붕괴가 시작된 것이었다.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암흑의 심연이 무령 일행의 발밑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언니! 발밑이...!"
소월의 비명이 붕괴의 소음 뒤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흙먼지와 무너지는 돌더미 속에서, 무령은 흐려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검자루를 꽉 쥐었으나, 발밑의 대지가 통째로 꺼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순간, 무령의 귓가에 붕괴하는 대지의 비명과 함께 모용적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