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세가의 붉은 밀랍이 찍힌 서찰을 쥔 백무령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종이 위에 새겨진 먹실은 단순한 글자가 아닌, 아가리를 벌린 괴수의 이빨처럼 기괴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혈기대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뒤를 밟고, 옛 태을전 지하 제단에서 숨통을 끊겠다는 음험한 계책. 정파의 명숙이라 자처하는 모용세가가 사파의 흉수들과 손을 잡고 멸문한 문파의 잔당을 사냥하려 드는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저 멀리 화산 지맥의 끝자락, 무위봉의 검은 실루엣 위로 솟구친 푸른 서기와 마기의 혼탁한 불기둥이 밤하늘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봉인이 뜯겨 나가는 비명이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가자."
무령의 목소리는 한 자루 잘 벼려진 비수처럼 차갑고도 단호했다.
제갈운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고목 벽뢰목 목검을 고쳐 잡으며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 끝에는 짙은 냉소가 서려 있었다.
"결국 정파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은 자들의 민낯이 이렇소. 백 도우, 그곳에 도우의 가문이 남긴 마지막 숨결이 있다면, 내 기꺼이 이 한 몸 던져 그 가식의 장막을 찢어발겨 드리지."
소월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령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어린 사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으나,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신뢰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 * *
하루 반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말들의 발굽이 해지고 숨통이 끊어질 듯 헐떡일 때쯤, 일행의 눈앞에 마침내 무위봉의 황량한 골짜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도가의 정기가 서려 천하의 영산이라 불리던 무위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파의 기습과 정파의 묵인 아래 철저히 불타버린 폐허에는 오직 검게 그을린 도검의 파편들과 바람에 날리는 잿가루만이 가득했다.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피비린내, 즉 혈취(血臭)가 진동했다.
"조심하시오. 숲 전체가 죽어 있소."
제갈운이 걸음을 멈추며 경고했다.
과연 그랬다. 태을전으로 향하는 유일한 협곡 입구에는 수십, 수백 마리에 달하는 검붉은 독사들이 똬리를 튼 채 쾡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붉은 반점이 가득한 대가리를 쳐들고 쉭쉭거리는 소리가 골짜기 전체를 가득 메웠다. 단순한 짐승의 무리가 아니었다. 사파의 독문 무공인 만사만독진(萬蛇萬毒陣)의 흔적이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독을 먹여 키운 뱀들을 이곳에 배치해 방어벽을 구축한 것이 분명했다.
"언니, 저것들은 평범한 뱀이 아니에요. 살을 썩게 만드는 독무를 뿜고 있어요."
소월이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독사들의 아가리에서 흘러나온 푸르스름한 독기가 지면을 타고 기어오며 풀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돌바닥이 녹아내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무령은 천천히 부러진 도검을 뽑아 들었다.
반 토막 난 검날 위로 차가운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안구 안쪽에서 푸른 빛의 도문 진법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의 안력(眼力)이 개방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흐름이 느려졌다. 독사들이 내뿜는 독기의 궤적, 놈들이 몸을 비틀며 만들어내는 기의 파동, 그리고 방어벽의 가장 취약한 혈맥이 붉은 실선처럼 투명하게 안구에 맺혔다. 만사만독진의 핵심은 중앙에서 독기를 조율하는 우두머리 사왕(蛇王)의 고동에 있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생명을 도구로 삼은 인과, 여기서 끊어내겠다.'
무령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녀의 신형은 흡사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는 폭포수처럼 맹렬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흙탕물을 만나면 이를 쓸어가듯, 무령의 검로는 거침이 없었다. 부러진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정순한 도가 진기가 반원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태을파 최상의 거동이자 무공인 기정검(奇正劍)의 도리가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적이 내뿜는 독기가 강할수록, 그 독기를 받아쳐 되돌려주는 기(奇)의 변칙이 극대화되었다. 검기가 허공을 가르자, 마치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어가듯 맹렬한 검풍이 독사 장벽의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독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찢겨 나갔다. 독사들이 뿜어내던 푸른 독기는 무령의 맑은 도가 진기에 휩쓸려 오히려 놈들의 숨통을 죄는 역독(逆毒)으로 변해 사방으로 퍼졌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무위봉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독사 장벽이 연기처럼 바스러져 사라졌다.
"역시 대단하구려. 부러진 검으로 천지의 기운을 조율하다니,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오."
제갈운이 목검으로 바닥에 뒹구는 뱀의 사체를 툭 치며 걸어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외심과 함께 기묘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무령이 이 엄청난 무공을 펼칠 때마다 치러야 할 대가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무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열기가 솟구쳐 올랐으나, 그녀는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 통증을 억눌렀다. 동료들의 안위와 그들의 감정에 동조할 때마다 경락을 타고 흐르는 인과반사의 불길이 조용히 뼛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단 한 줌의 나약함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폐허가 된 태을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태을전 중심부에 도달하자, 사방이 무너져 내린 거대한 돌기둥들이 앙상한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한때 수많은 도사들이 도를 닦고 검을 수련하던 대전은 이제 잡초와 잿더미만이 가득한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대전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의 석조 제단이 놓여 있었는데, 제단 표면에는 복잡한 도가의 태극 문양과 팔괘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제단 중앙의 핵심 홈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기이한 마기가 뿜어져 나와 푸른 서기와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봉인이 강제로 뜯겨 나가기 직전의 위태로운 형국이었다.
"제단의 봉인을 해제하지 않으면 지하 통로로 내려갈 수 없소. 하지만 이 봉인은 태을파 고유의 기운과 정교한 열쇠가 없다면 억지로 부술 경우 산 전체가 붕괴할 것이오."
제갈운이 제단 주변의 주술적 문양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천하의 제갈세가 학사라 할지라도, 천년 동안 봉인되어 온 도문의 대진법을 단숨에 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소월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작은 손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소중히 쥐고 있었다.
"언니... 혹시 이것이 도움이 될까요?"
소월이 꺼내놓은 것은 금이 가고 반쯤 부러진 낡은 옥패였다. 태을파가 멸문당하던 날, 소월이 목숨을 걸고 품에 안고 도망쳤던 문파의 유일한 유물이었다. 다른 정파의 가문들은 그저 낡고 가치 없는 장식품이라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물건이었다.
무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즉시 천선인과경의 안력을 옥패로 집중했다.
안구 속에서 회전하는 인과의 실타래가 옥패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파고들었다. 단순한 흠집이 아니었다. 옥패 뒷면에 새겨진 정교한 나선형의 홈과 미세한 음양각의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제단 중앙에 파여 있는 복잡하고 기이한 홈의 문양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령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떨림이 묻어났다.
"태을전 대진법을 기동하는 진정한 열쇠다. 천년의 세월 동안 문파의 후계자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던 심인(心印)이 이 옥패 속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제 말이 맞았군요! 역시 이 옥패는 버릴 물건이 아니었어요!"
소월의 얼굴에 마침내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문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라며 무시당하고 수모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품에 간직해 온 보람이 있었다.
무령은 소월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옥패를 받아들였다. 서늘한 옥의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제단 중앙으로 다가가, 웅크린 마기와 서기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옥패를 제단의 홈에 맞춰 밀어 넣었다.
타가각.
완벽한 결합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무위봉 전체가 거대한 진동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궁!
제단 바닥에 새겨진 팔괘의 문양들이 황금빛으로 밝혀지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천년 동안 잠들어 있던 태을파 고유의 대진법 기동 장치가 깨어난 것이었다. 가문과 문파를 멸시하던 정파의 무리들이 결코 열지 못했던, 오직 태을의 의기를 이어받은 자만이 깨울 수 있는 위대한 도문의 힘이었다.
제단 중앙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아래로 향하는 거대한 석조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뿜어져 나오던 마기는 대진법의 정순한 도가 진기에 밀려 순식간에 정화되었고, 그 자리에는 맑고 청량한 기운이 가득 찼다.
* * *
지하 통로의 입구가 완전히 개방되자, 그 어두운 심연 속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스스스스...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푸른빛을 띤 수많은 혼불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다. 과거 태을파가 사파의 암습과 정파의 배신 속에서 문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전대 협사들의 넋이자,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품고 있던 정순한 의기(義氣)였다.
푸른 혼불들이 무령과 제갈운, 소월의 주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후예들을 환영하듯, 따스하고도 서글픈 기운이 대기를 채웠다.
"이것이... 전대 선배님들의 의기란 말인가."
제갈운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눈가에도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언제나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그였으나, 멸문당한 문파의 선조들이 남긴 이 장엄한 혼적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
소월이 눈물을 흘리며 무령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제갈운 역시 무령의 다른 쪽 어깨를 짚으며 묵묵히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 무령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가차 없는 통증이 휘몰아쳤다.
콰르릉!
심장 내부의 경락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듯 타들어 갔다. 천선인과경의 저주, '인과반사'의 법도였다. 동료들과 깊은 정서적 유대를 맺고 그들의 마음에 공명할 때마다 육신을 찢어발기는 내상의 대가. 입안 가득 비릿한 혈향이 차올랐다. 전신이 무너져 내릴 듯한 고통에 무령의 무릎이 꺾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이 고통이 내가 사람으로서, 도사로서 짊어져야 할 인과라면...'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고 솟구치는 피를 삼켰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소월과 제갈운을 향해, 차가운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주 엷지만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정(無情)만을 고집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그들의 손을 잡는 고통마저 기꺼이 수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태을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협도(俠道)'임을,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내상 속에서 철학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괜찮다. 가자, 우리의 길을."
무령의 목소리는 비록 가늘었으나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하 계단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쿠과과광!
지상 폐허의 입구 쪽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수십 개의 횃불이 어둠을 가르며 밀려들기 시작했다. 붉은 불빛들이 무너진 돌기둥 사이를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과연, 멸문한 똥개들의 잔당이 쥐새끼처럼 구멍을 파고 있었구나."
무겁고도 패도적인 음성이 대전을 울렸다.
횃불의 화광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적(慕容世家)이었다. 그의 뒤로는 삼십여 명에 달하는 가문의 정예 흑의무사들이 서슬 퍼런 도검을 치켜든 채 무령 일행을 포위해 들어왔다.
모용적의 눈빛에는 백무령을 반드시 죽여 가문의 비밀을 묻어버리겠다는 강박적인 적의와 함께, 밤마다 향을 피우며 참회해야 했던 모순적인 심마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백무령. 네년이 감히 가문의 안위를 위협하는 인과의 불씨를 지폈으니, 오늘 이 무위봉을 너의 거적때기 무덤으로 만들어 주마."
수십 자루의 검날이 일제히 무령 일행을 향해 겨누어졌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들이 마치 그들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