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메운 어둠 속에서 쏘아진 수백 개의 독침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잔혹한 낙우(落雨)를 만들어냈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박살 난 객잔의 문짝 너머로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서슬 퍼런 비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찰나의 순간, 가슴을 옥죄는 인과반사의 고통에 입술을 깨물던 백무령의 전신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도우, 물러서시오!"
제갈운이 품 안에서 고목 벽뢰목 목검을 꺼내어 허공을 가르며 소리쳤다. 그의 목검이 만들어낸 둥근 기류가 날아드는 독침의 절반을 튕겨냈으나, 사방에서 짓쳐드는 암습의 그물망은 빈틈이 없었다.
무령은 차오르는 피비린내를 목구멍 뒤로 강제로 삼켰다. 가슴속 깊은 곳, 천선인과경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차가운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이 기이한 푸른 빛으로 물드는 순간, 쏟아지는 비수와 독침의 궤적이 찰나의 정지 화면처럼 뇌리에 박혔다.
허공을 가르는 쇳소리,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미세하게 흔들리는 침날의 각도,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자객들의 호흡 소리까지. 천선인과경은 그 모든 움직임의 인과율을 한 가닥의 실타래처럼 투명하게 풀어헤쳤다.
'피할 곳은 없다. 그렇다면.'
무령은 오히려 두 눈을 감았다. 시각이라는 불완전한 감각을 차단하자, 천도가 가리키는 검로가 더욱 명징하게 심상에 떠올랐다. 부러진 도검을 쥔 그녀의 손가락끝에 서늘한 진기가 맺혔다.
스스스스.
부러진 검신 끝에서 반 자 남짓한 청백색의 검강(劍罡)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부러진 검을 쥐고도 천지의 기운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태을파의 정수, 기정검(奇正劍)의 도리였다. 적의 살기가 거셀수록 그 기운을 역이용하여 백 배의 위력으로 돌려주는 순리의 검.
무령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치 흐르는 강물이 물길을 가로막는 바위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넘어가듯, 그녀의 신형은 수십 개의 독침 사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껴갔다.
스각! 서걱!
어둠 속에서 무형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눈을 감은 여도사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검기가 밤하늘을 수놓은 독침의 궤적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끄아악!"
"어, 어떻게……!"
어둠 속에 은신해 있던 흑암 사파 자객들의 비명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날린 무기의 궤적을 고스란히 타고 날아온 검기에 목덜미가 꿰뚫렸다. 한 줄기 푸른 바람이 객잔 앞뜰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십여 명의 자객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단 한 걸음의 낭비도, 단 한 번의 불필요한 초식도 없었다. 물 흐르듯 가볍고도 필연적인 참수였다.
제갈운은 목검을 거두며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부러진 검 한 자루로 사파 최정예 자객단의 암습을 무력화한 무령의 무위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실력을 은폐하려던 도사의 검 끝에서 피어난 것은, 천하를 압도하는 불멸의 기상이었다.
"과연 태을파의 마지막 후계자답구려. 눈을 감고도 이리 정밀한 검을 펼치다니, 내 눈이 호강을 하오."
제갈운이 짐짓 너스레를 떨었으나, 그의 예리한 눈동자만큼은 사방의 어둠을 매섭게 훑고 있었다.
그때, 무너진 객잔 기둥 뒤에서 거대한 신형이 폭풍처럼 짓쳐들었다. 이번 습격의 선두에 선 자객 괴수였다. 그는 양손에 거대한 박도(朴刀)를 든 채, 무령의 정수리를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리찍었다. 가공할 강풍이 대지를 찢을 듯 몰아쳤다.
무령은 신형을 굳건히 세웠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폭력적인 힘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법. 무령은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박도의 칼날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 부러진 검을 비스듬히 세워 적의 도신을 타고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타앗!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괴수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적이 균형을 잃은 그 찰나의 틈을 무령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 괴수의 손목 관절을 정확히 타격했다.
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괴수가 비명을 지르며 박도를 떨어뜨렸다. 무령은 주저 없이 손목을 비틀어 그의 혈도를 제압하고 바닥에 메쳤다.
"말해라. 배후가 누구냐."
차가운 서리 같은 음성이 괴수의 귀를 때렸다. 괴수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무령을 노려보며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독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결을 고하는 음독이었다.
그 순간, 괴수의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목이 무령의 시선에 닿았다. 굵은 팔뚝 위에 기이한 낙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붉은 박쥐 문양.
무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사파의 표식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하고, 어딘가 낯익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때 제갈운이 다가와 무령의 손길을 가볍게 제지했다. 그는 자신의 목검 끝으로 괴수의 손목에 새겨진 문양을 거칠게 긁어내렸다. 찌르르한 진기가 벽뢰목 목검을 통해 흐르며, 괴수의 살점이 타들어 가는 냄새와 함께 붉은 박쥐 문양이 순식간에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제갈 도우, 무슨 짓이냐?"
무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갈운은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워버린 채, 극도로 가라앉은 음성으로 소삭였다.
"이 문양은 강호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물건이오. 정파 무림맹 내부에서 극비리에 쓰이는 인장…… 아니, 정확히는 사파와 내통하는 정파 고위 세력의 징표요. 사파의 탈을 쓴 자들이 어찌 정파의 신호기를 몸에 새기고 있겠소?"
제갈운의 어조에는 깊은 환멸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가문과 문파의 존속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사파의 흉계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파의 추악한 위선. 무령은 제갈운의 행동을 보며, 정파 일파의 안세력과 사파의 결탁이 이미 뼈저릴 정도로 깊게 유착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언니……!"
그때, 객잔 구석진 방 안에서 가냘픈 비명이 들려왔다.
소월이었다. 겁에 질린 채 방 안에서 숨어 있던 소월의 어깨 위로, 무너진 천장의 서까래와 함께 불붙은 지붕 더미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살아남은 자객 한 명이 소월을 인질로 잡기 위해 검을 겨누며 돌진하는 중이었다.
"소월아!"
무령의 가슴속에서 격정적인 불길이 치솟았다. 태을파의 마지막 불씨이자, 자신을 향해 조건 없는 헌신을 바쳐온 유일한 사매. 과거 문파가 멸문당할 때 지켜주지 못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소월의 겹쳐 보였다.
'지켜야 한다. 반드시.'
그 감정이 싹트는 순간, 무령의 심장 속에 박힌 천선인과경이 무자비하게 요동쳤다.
쿵!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뼈를 깎는 듯한 격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기경팔맥이 끓는 기름에 잠긴 듯 타들어 갔고, 입안 가득 비릿한 선혈이 차올랐다. 인과반사.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구하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가혹한 신벌(神罰)이었다.
"우윽……!"
무령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신의 진기가 흩어지고 경락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부러진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무정해야 살 수 있는 법도라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매가 죽어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이 어찌 도(道)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협(俠)이 아니며, 태을파의 진정한 의기도 아니었다.
무령은 고통을 분노로 바꾸지 않았다. 대신, 그 지독한 내상의 고통마저 자신의 업보이자 거쳐야 할 인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슬픔도, 고통도, 타인을 향한 연민도 모두 천하를 품는 도가의 대의로 수용하는 찰나, 그녀의 검로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스으으읍.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켜자, 뒤틀리던 기운이 기적적으로 안정을 찾으며 부러진 검 끝에서 눈부신 청백색 광채가 폭발했다.
무령은 단숨에 신형을 날려 소월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왼팔이 소월의 가냘픈 몸을 품에 안았고, 오른손에 쥔 부러진 검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휩쓸었다.
쿠구구구중!
태을파 최고의 거동, 기정검의 위력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칼날에서 뻗어 나간 무형의 검기가 쏟아지는 불길과 서까래를 허공에서 산산조각 내며 사방으로 비산시켰고, 소월을 노리던 자객의 신형을 수십 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언니…… 흑, 언니……!"
소월이 무령의 품에 안겨 가슴팍을 적시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월의 품 안에서 미세하게 빛나는, 금이 간 태을파의 부러진 옥패가 무령의 살결에 닿았다. 그 옥패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온기가 무령의 타들어 가던 심맥을 미약하게나마 달래주었다.
무령은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소월을 더욱 단단히 안아주었다. 전신을 조여오는 내상의 고통은 여전했으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기묘한 평온함이 깃들었다.
'이것이 내가 짊어져야 할 인과라면, 결코 피하지 않겠다.'
무정(無情)만을 고집하며 스스로를 가두었던 극단적인 아집이, 동료들의 헌신과 온기를 받아들이며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제갈운의 묵묵한 도움과 소월의 눈물겨운 신뢰를 끝내 가슴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제갈운이 다가와 쓰러진 자객들의 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거침없으면서도 치밀했다. 자객들의 품을 뒤지던 제갈운의 손길이 한 시신의 품 안에서 멈추었다.
"이것 보시오, 백 도우."
제갈운이 품 안에서 꺼낸 것은 방수 가죽으로 꼼꼼하게 밀봉된 한 통의 서찰이었다. 서찰의 겉면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문양이 찍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강호의 거대 세력인 모용세가(慕容世家)의 가문 문양이었다.
무령은 서찰을 받아들어 밀랍을 뜯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서찰에 적힌 먹실을 확인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을파의 잔당이 무위봉으로 향하고 있다. 모용세가의 정예 부대가 이미 옛 태을전 지하 제단 입구에 포진하여 덫을 치고 대기 중이니, 사파 혈기대는 후방을 차단하고 생포를 준비하라.]
무령의 검을 쥔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멸문당한 태을파의 옛 터, 무위봉. 그들의 추억과 상처가 묻힌 그 영산에 이미 모용세가의 추격대와 사파의 연합 세력이 거대한 이빨을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함정이구려."
제갈운이 목검을 어깨에 걸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 차가운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곳은 도우의 문파가 있던 곳이니 말이오."
무령은 부러진 검을 천천히 칼집에 꽂았다. 가슴속 인과반사의 상흔이 욱신거렸으나, 그녀의 시선은 이미 먼 화산 지맥의 끝자락, 어둠에 잠긴 무위봉을 향하고 있었다. 위선으로 가득 찬 정파의 칼날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가자."
무령의 굳건한 음성이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 멀리 무위봉 방향의 밤하늘에서 푸른 서기(瑞氣)와 함께 기이한 마기(魔氣)가 뒤섞인 거대한 기둥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봉인이 풀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파멸의 시작인가. 무령 일행의 앞길에 거대한 피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