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너를…… 너를 살려 보내면…… 감옥에 갇힌 내 동생은 죽는다…… 가주가…… 아버지가 동생의 목숨을 쥐고 있다……. 제발, 한 번만 내게 잡혀다오……."

진설화의 부르짖음은 처절한 애원이었으며, 동시에 명문이라 자처하는 남궁세가의 가면에 새겨진 가장 추악한 균열이었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잿더미 위로 툭 떨어져 검은 얼룩을 남겼다. 가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혈육의 정. 그 모순된 굴레에 짓눌린 천재의 영혼은 이미 가루처럼 부서져 있었다.

무령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도심(道心) 너머로, 한 가닥 무거운 연민의 싹이 고개를 들려 했다.

‘아아…….’

찰나의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격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의 무정한 법도가 가차 없이 작동한 것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 고통에 공명하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가혹한 형벌, 인과반사(因果反射)였다.

치이익.

마치 벌갛게 달아오른 인두로 심장 주변의 경락을 직접 지지는 듯한 극통이 폐부를 찔렀다. 무령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 사이로 한 모금의 더운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피비린내를 삼켰다. 감정을 품는 것은 도사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이자, 스스로의 기맥을 불태우는 독약이었다.

"소저! 더는 저 사악한 도녀에게 머리를 숙이지 마십시오!"

남궁세가의 집법장로가 노성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에는 진설화의 슬픔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오직 가문의 명예와 백무령을 생포해 가주에게 바쳐야 한다는 탐욕스러운 의무감만이 번뜩일 뿐이었다.

"남궁의 무사들아! 가주의 명이다. 저 도녀의 사지를 꺾어서라도 끌고 간다! 소저를 보필하고 적을 생포하라!"

장로의 외침에 얼어붙어 있던 수십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검기가 잿더미가 된 객잔 터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진설화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무력함이, 그리고 가문의 위선이 눈앞의 여도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숲길 너머에서, 깃털처럼 가볍고도 낭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허허, 이거 참. 천하의 남궁세가가 이토록 꼴사납게 노는 줄은 내 미처 몰랐구려. 여도사 한 명을 두고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떼거지로 달려들다니, 숭산의 중들도 이 모습을 보면 기가 막혀 삭발을 다시 하겠소."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사내의 행색은 지극히 허름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청색 도포는 군데군데 기워져 있었고, 넓은 소맷자락은 걸을 때마다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그 허름한 외양과 달리, 사내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어깨에는 칼집도 없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고목 목검 한 자루가 얹혀 있었다.

제갈세가의 서출(庶出), 제갈운이었다.

"누구냐! 감히 남궁의 대사에 끼어드는 무뢰한이!"

집법장로가 검을 겨누며 포효했다. 제갈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검을 으쓱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기이할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마치 낙엽 위를 걷는 바람 같았다.

"제갈가의 서출 놈이 왜 정파의 대사에 참견이란 말이냐? 제갈세가는 남궁과의 맹약을 잊었는가!"

"맹약이라니요."

제갈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짙은 냉소와 뼈아픈 환멸이 섞여 있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맺은 더러운 밀약을 왜 나 같은 서출 자식이 짊어져야 합니까? 나는 그저 길을 가다 무도한 꼴을 보아 발걸음이 멈춘 방관자일 뿐이외다. 아니, 방관자라기엔 조금 짓궂은 구경꾼이라 해두지요."

무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천선인과경의 비기를 발동해 제갈운을 응시했다.

거울처럼 투명해진 그녀의 시야 속에서, 제갈운의 전신 기맥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의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진기는 제갈세가의 비전 무공인 천강기(天罡氣)의 흐름을 띠고 있었으나, 그 성질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순수했다. 가문의 탐욕에 물들지 않은, 올곧은 도가(道家)의 정종 심법이었다.

그리고 무령의 시선이 그가 쥔 고목 목검에 닿았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저 검은…….’

그것은 단순한 나무막대기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풍화되어 썩어가는 고목 같았으나, 그 내부에는 벼락을 맞아 살아남은 천년 건원신수(乾元神樹)의 영기가 맥맥히 흐르고 있었다. 태을파의 옛 영산에서 자라났던, 지금은 사라진 신수의 잔재. 벽뢰목(霹靂木) 목검이었다.

천선인과경은 제갈운의 심상(心象)마저 꿰뚫어 보았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서출이라는 신분 때문에 겪어야 했던 처절한 암투와 멸시, 그리고 그 더러운 진흙탕에서 벗어나 천하의 참된 협(俠)을 쫓고자 하는 뜨겁고도 외로운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위선으로 가득 찬 제갈세가를 혐오하고 있었고, 스스로 정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었다.

"백 도우."

제갈운이 무령을 슬쩍 바라보며 눈짓을 보냈다.

"저 무식한 칼잡이들이 도가의 청풍을 더럽히게 둘 수는 없지 않겠소? 내 비록 미천한 서출이나, 바람을 잡는 일 정도는 거들 수 있소이다."

무령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차갑게 대꾸했다.

"필요 없다. 도가의 일은 도가가 해결한다."

"에이, 그리 매정하게 굴지 마시오. 혼자서 다 짊어지려다가는 뼈가 먼저 부러지는 법이외다."

제갈운이 껄껄 웃으며 목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 순간, 그의 몸가짐에서 풍기던 허허실실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태산과 같은 묵직한 기세가 그 자리를 채웠다.

" 건방진 놈! 한꺼번에 베어라!"

집법장로의 명령과 함께 남궁세가의 무사 다섯 명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검풍을 일으켰다. 제왕검형의 위압적인 초식이 무령과 제갈운을 동시에 조여왔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제갈운이 가볍게 도약했다. 그의 벽뢰목 목검이 허공에 완만한 반원을 그렸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극도로 유려한 초식이었다. 바람이 불어 버드나무 가지가 휘어지듯, 밀려드는 남궁가 무사들의 검세를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적들의 강맹한 뇌풍(雷風)이 목검의 궤적을 따라 허공으로 분산되었다.

무령의 눈이 번쩍였다. 제갈운이 만들어낸 흐름은 기정검(奇正劍)의 도리와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奇)함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정(正)함. 제갈운의 목검이 음(陰)을 이루어 적들의 기세를 흐트러뜨리자, 무령의 부러진 검이 양(陽)이 되어 그 빈틈을 꿰뚫었다.

스윽.

무령의 신형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부러진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남궁세가 무사들의 손목과 어깨의 혈도를 정확히 짚어갔다.

깡! 캉!

무기 부딪치는 소리는 단 두 번뿐이었다. 제갈운이 목검으로 적의 검 끝을 묶어두는 찰나, 무령의 검기가 그들의 기맥을 일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윽!"

"사,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명과 함께 무사들이 검을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완벽한 무혈 제압이었다.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룬 기적 같은 연출이었다.

제갈운의 목검 제어가 무령의 기정검로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남궁세가의 무리들을 장난감 다루듯 농락하자, 집법장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무슨 괴초란 말이냐……!"

"괴초가 아니라 도리(道理)요, 장로님."

제갈운이 목검을 으쓱하며 남궁가의 무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강함으로 누르려 하면 부러질 뿐이고, 위선으로 덮으려 하면 드러날 뿐이지요.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가는 것이 서로의 명예를 지키는 길일 텐데요?"

장로는 비틀거리는 진설화를 부축하며 이를 갈았다. 무령의 기정검과 제갈운의 기이한 목검술이 결합한 이상, 지금의 전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음을 직시한 것이다.

"백무령…… 그리고 제갈운. 오늘의 수치를 남궁세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장로는 분노에 찬 일갈을 남긴 채, 진설화와 남은 무사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퇴각했다. 진설화는 끌려가듯 걸음을 옮기면서도, 마지막까지 무령을 향해 애처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 눈빛은 무령의 가슴속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정적이 내려앉은 객잔 터.

제갈운이 목검을 어깨에 메며 무령에게 다가왔다.

"보시오, 협공하니 이리도 쉽지 않소? 나와 동행한다면 앞으로의 여정이 그리 심심하진 않을 거요."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눈빛에는 조건 없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무령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외로운 복수의 길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찰나의 신뢰가 싹트는 순간, 심장 속의 천선인과경이 무자비하게 요동쳤다.

쿵!

"우윽……!"

무령은 급격히 차오르는 열기에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으로 쓰러질 뻔했다. 폐부가 불타는 듯한 고통에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으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흘러내렸다.

인과반사. 타인과 인연을 맺고 신뢰를 지피려 할 때마다 전신의 경락이 타들어 가는 저주받은 법도였다. 동료를 얻는 대가는 그녀 자신의 무학적 생명을 깎아내는 고통이었다.

"백 도우! 괜찮소?"

제갈운이 놀라 손을 뻗으려 했다.

"오지 마라!"

무령이 차갑게 외치며 부러진 검을 제갈운의 목전에 겨누었다. 그녀의 눈빛은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그녀는 억지로 제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을 지워버렸다.

무정(無情)해야만 살 수 있다. 타인을 믿는 순간, 이 저주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내 도(道)는 홀로 걷는 길이다. 네 호의는 고마우나, 더는 내 인과에 끼어들지 마라."

그녀는 제갈운의 눈빛에 담긴 걱정을 애써 외면하며 차가운 어조로 선을 그었다. 망가진 마음에 다시는 온기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아집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제갈운은 뻗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실망이나 분노 대신, 씁쓸하면서도 깊은 이해의 미소가 떠올랐다.

"참으로 지독한 도사님이구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내 의지로 걷는 것이니, 도우가 가라 마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적막한 밤공기를 찢는 기괴하고도 날카로운 파공음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검은 광선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끝부분에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사파의 치명적인 비수와 독침들이었다.

와장창! 콰아앙!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던 객잔의 썩은 문짝과 창문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사방을 포위한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사파의 진짜 자객들이 마침내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야습이다!"

제갈운의 외침과 동시에, 무령의 눈앞으로 수십 개의 독침이 밤하늘의 유성처럼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