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타오르는 객잔의 불길이 검붉은 그림자를 허공에 길게 늘어뜨렸다. 무너져 내리는 서까래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으나,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뿜어내는 숙살(肅殺)의 기운은 그 열기마저 단숨에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푸른 서기가 감도는 창공의 깃발이 밤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태을파의 생존자 백무령. 가문의 명에 따라, 너를 체포하겠다."

진설화의 목소리는 한 자 한 자가 얼음송곳 같았다. 그녀의 백색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허리춤에 찬 보검 청강선검(靑鋼仙劍)의 문양이 서늘한 빛을 뿜었다.

백무령은 굳게 닫힌 입술을 때지 않은 채, 차디찬 안개 너머의 여인을 응시했다. 방금 전 혈기대와의 혈투로 전신의 기경팔맥이 뒤틀려 있었다. 소월을 구하겠다는 일념이 불러온 인과반사의 여파가 심장 언저리를 바늘로 찌르듯 갉아먹고 있었으나, 무령은 등을 꼿꼿이 편 채 부러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언니……."

뒤에 선 소월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무령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무령은 소월을 가볍게 뒤로 밀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부러진 검끝이 땅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남궁세가의 대공녀께서 친히 이 누추한 불지옥까지 걸음을 하셨구려."

무령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와 같아 미동조차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명이라 함은, 천하의 공도를 뜻함인가, 아니면 사사로운 욕망의 찌꺼기를 포장한 위선인가?"

진설화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쥐는 힘이 강해지며 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태을파는 이미 멸문하여 강호의 공론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사파의 무리와 어울려 천하를 어지럽히는 요녀를 생포하는 것은 정파의 의무일 뿐."

"요녀라."

무령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뼈를 깎는 듯한 냉소가 담겨 있었다.

"사파가 칼을 들고 덤비면 정당한 방어라 부르고, 도사가 그 칼을 꺾으면 요사스러운 무공이라 부르는가. 과연 남궁의 법도는 해와 달도 제 입맛대로 바꾸는 모양이군. 창공의 이름을 더럽히는 위선이 이리도 당당하니, 내 오늘 안목을 넓히는구려."

"입을 놀려 시간을 벌려 하지 마라!"

진설화의 곁에 서 있던 중년의 무사가 참지 못하고 검을 반쯤 뽑아 들며 호통을 쳤다. 남궁세가의 집법장로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진설화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무령이 쥐고 있는 부러진 검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백무령, 네가 지닌 그 기이한 안목과 무공은 가문으로 인도되어 정당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순순히 포박을 받는다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도록 가주님께 청하겠다."

"목숨을 구걸하라 함인가."

무령이 부러진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려 진설화의 미간을 겨누었다.

"내 이 부러진 철편으로 천하를 종횡할지언정, 위선자들의 자비 아래 구차하게 연명하진 않는다. 남궁의 천재라 불리는 자의 검이 얼마나 올곧은지, 아니면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인지 내 직접 확인해 보지."

"오만하구나."

진설화의 외침과 함께, 참았던 검기가 폭발했다.

스릉!

청강선검이 칼집을 벗어나며 맑은 명음(鳴音)을 토해냈다. 푸른 검기가 어스름한 밤공기를 가르며 한 줄기 유성처럼 곧게 뻗어 나왔다. 그것은 가벼운 바람이 성난 태풍으로 변하듯, 거침없고도 정밀한 세가의 절예, 창공검법(蒼穹劍法)의 극성이었다.

푸른 빛의 검막이 무령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검의 비는 흡사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남궁세가의 정예 무사들이 펼친 창공풍우진(蒼穹風雨陣)이 사방의 공간을 차단하며 무령의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하지만 백무령의 눈동자 속에서,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의 기이한 영안(靈眼)이 깨어났다.

세상의 소음이 먼 곳의 메아리처럼 아득해졌다. 진설화가 펼쳐내는 검로의 궤적이 붉고 푸른 선의 흐름으로 분해되어 무령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허초와 실초, 기의 흐름이 시작되는 단전의 요동과 어깨의 미세한 기울기까지, 모든 비밀이 발가벗겨지듯 드러났다.

'하늘의 법도는 본래 스스로 흐르는 법. 인위적으로 얽어맨 검로는 결국 스스로의 무게에 꺾이기 마련이다.'

무령은 깊은 내적 깨달음을 새삼 곱씹었다. 무공이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결을 따라 부드럽게 얹혀가는 도(道)의 발현이어야 하거늘, 남궁의 검은 문파의 명예와 힘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무겁기 그지없었다.

무령은 단 한 걸음을 내디뎠다.

스윽.

마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그녀의 신형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진설화의 서슬 퍼런 푸른 검강이 무령의 콧날 한 푼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무엇이?!"

진설화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자신의 검초 중 가장 빠르고 빈틈없는 일격이었음에도, 무령은 마치 그 검로를 미리 알고 피한 것처럼 가볍게 흘려버렸다.

무령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걸음을 딛으며 부러진 검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철그렁!

부러진 검 끝이 청강선검의 측면을 정확히 때렸다. 힘과 힘의 충돌이 아니었다. 물길을 막아서는 둑을 허물듯, 진설화의 진기가 집중된 맥의 흐름을 빗겨 치는 기(奇)의 도리였다. 진설화의 검끝이 허공으로 크게 치솟으며 그녀의 상체가 무방비하게 열렸다.

"두 걸음."

무령의 나직한 음성이 진설화의 귓가를 때렸다.

진설화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신형을 뒤로 물기려 했다. 그러나 무령의 세 번째 걸음은 이미 그녀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사각(死角)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 찰나의 대치 속에서, 무령의 천선인과경은 진설화의 전신 기맥을 더욱 깊숙이 꿰뚫어 보았다.

진설화의 옥처럼 고운 손목 안쪽, 살갗 아래로 흐르는 기이하고도 차가운 독 기운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내상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실처럼 얽혀 진설화의 심맥과 뇌맥을 옥죄고 있는 음독(陰毒)의 굴레였다.

'이것은…… 백맥쇄혼사(백맥쇄혼사)?'

무령의 가슴속에 서늘한 충격이 일었다.

남궁세가의 비전이자 극독인 백맥쇄혼사. 가주가 자식이나 직속 심복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심어두는 잔혹한 구속구였다. 매달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전신의 기맥이 끊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저주.

정화(正花)라 불리며 천하의 존경을 받는 남궁세가의 천재가, 실상은 가문의 철저한 꼭두각시이자 독에 오염된 노예에 불과했던 것이다.

'불쌍한 아이로구나. 가문의 영광이라는 허울 좋은 감옥에 갇혀, 제 목숨줄마저 저당 잡힌 채 위선을 연기하고 있었다니.'

찰나의 순간, 무령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연민의 감정이 싹텄다.

그리고 그 대가는 즉각적이고도 가혹했다.

쿵!

무령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기경팔맥이 불길에 휩싸인 듯 뜨겁게 타오르는 고통이 전신을 덮쳤다. 천선인과경의 절대적인 법도, 인과반사(因果反射)의 형벌이었다. 타인에게 감정을 품는 순간 스스로를 갉아먹는 그 가혹한 저주가 무령의 단전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윽……!"

무령의 붉은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내장 전체가 뒤틀리는 극심한 통증에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백무령! 역시 부상을 아끼지 못했구나!"

진설화는 무령의 내상을 기회로 포착하고, 이를 악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청강선검이 차가운 한기를 내뿜으며 무령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가문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처절한 살기가 검 끝에 서려 있었다.

하지만 무령은 고통 속에서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감정이 고통을 부를지언정, 내가 가고자 하는 협(俠)의 도리는 꺾이지 않는다.'

무령은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억지로 심상의 요동을 가라앉혔다. 연민에 흔들리던 마음을 천도의 올곧음, 즉 정(正)의 도리로 승화시켰다. 적이 내뿜는 살기가 크면 클수록, 천선인과경으로 읽어낸 기의 흐름을 되돌려주는 위력 또한 배가되는 법.

그녀의 손에 쥔 부러진 도검 위로, 투명하고도 단단한 검기(劍氣)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훼손되지 않는 태을파 최고의 거동, 기정검(奇正劍)의 형상이었다.

"파(破)!"

무령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진설화의 검면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깡!

마치 거대한 쇠종이 울리는 듯한 파음이 객잔 터를 뒤흔들었다.

진설화의 검 끝에 실려 있던 막강한 내력이 무령의 기정검에 의해 고스란히 역류했다. 자신이 뻗어낸 힘의 배가 되는 충격이 진설화의 기맥을 타고 역류했다.

"아악!"

비명과 함께 진설화의 손목이 꺾였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며, 평생을 함께해 온 보검 청강선검이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검은 차가운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잿더미 속으로 꽂혔다.

단 세 걸음.

그리고 단 한 번의 맞부딪침으로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불세출의 천재가 완벽하게 무장 해제당한 것이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집법장로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부러진 단검 하나로 가문의 보검을 날려버린 이 압도적인 격차를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설화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 안쪽의 백맥쇄혼사가 독기 가득한 자색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패배의 굴욕보다 더한 절망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내가…… 졌다니……."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단순한 패배의 아픔이 아닌, 더 깊은 심연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무령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천천히 닦아내며 진설화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속 경락이 타들어 가는 내상은 깊어졌으나,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똑바로 타오르고 있었다.

"남궁의 천재여. 네 검에는 너 자신의 의지가 없구나. 남의 손에 쥐여진 인형의 검으로는, 백 번을 휘둘러도 내 부러진 검 한 자루를 꺾지 못할 것이다."

진설화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가에 서린 것은 수치심이 아닌, 처절한 애원이었다.

"가지 마라…… 백무령……."

진설화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무령을 바라보며,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들을 수 없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입술이 찢어질 듯 떨렸다.

"너를…… 너를 살려 보내면…… 감옥에 갇힌 내 동생은 죽는다…… 가주가…… 아버지가 동생의 목숨을 쥐고 있다……. 제발, 한 번만 내게 잡혀다오……."

위선의 껍데기 뒤에 감춰진, 피비린내 나는 가문의 진실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동시에, 객잔 터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기이하고도 강력한 기운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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