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화염이 밤하늘의 장막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화산 지맥의 초입, 황량한 고개 위에 외롭게 서 있던 객잔 귀로정(歸路亭)은 이미 거대한 불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타오르는 대들보가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을 때마다 사방으로 매캐한 잿가루와 불똥이 사납게 흩날렸다.

그 화염의 중심에서 백무령은 검을 쥐고 있었다. 아니, 검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반동강이 난 청강검의 잔해였다. 부러진 검신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길보다 더 시리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것이 태을파(太乙派)의 마지막 불씨가 보여줄 수 있는 전부인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의 목소리에는 피비린내 나는 조소가 가득했다. 사파의 악명 높은 암습단, 혈기대(血騎隊)를 이끄는 대주 적풍율(赤風律)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살기가 밤안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검은 복면을 쓴 혈기대 무사 수십 명이 반월형의 진을 친 채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무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굳게 깨물 뿐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무함을 억누르는 것은 오직 극단적인 무정(無情)의 아집뿐이었다.

'감정은 나약함의 온상일 뿐이다. 슬픔도, 분노도, 그 어떤 미련도 검을 무디게 만들 뿐.'

그녀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사문이 멸망하고 동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갈 때, 그녀가 배운 유일한 생존의 법칙은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무정함이었다. 부러진 검 끝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으나, 이미 기경팔맥의 진기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을파가 자랑하던 도법도 결국 천하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지. 무령, 네가 가진 태을의 비급을 넘기고 무릎을 꿇는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적풍율이 대도를 비스듬히 치켜들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흙먼지가 붉은 진기에 쓸려 나가며 기괴한 파열음을 냈다.

"구구절절 말이 많구나, 사파의 사냥개여."

무령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송곳 같았다. 그녀의 신형이 마침내 움직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려하게, 그러나 찰나의 순간 적풍율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부러진 검신이 허공에 반원형의 은빛 궤적을 그리며 밤하늘을 갈랐다. 그것은 태을검법의 정수이자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도가의 검로였다.

적풍율의 대도가 무령의 부러진 검과 맞부딪쳤다.

쾅!

쇳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무령은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이미 소모될 대로 소모된 내력으로는 일류 고수인 적풍율의 웅혼한 진기를 온전히 받아내기 역부족이었다. 목구멍까지 뜨거운 혈담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삼켜냈다.

"가소롭군."

적풍율이 비웃으며 대도를 크게 휘둘렀다. 붉은 도강(刀罡)이 불타는 객잔의 잔해를 쓸어 담으며 격렬한 폭풍으로 변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덮치는 형국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들이닥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령의 시야가 급격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천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환청이 일었다. 사방의 불길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태을파 동문들의 혼백이 허공을 떠돌며 울부짖는 듯한 기이한 착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것은……?'

무령의 두 눈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안구 가장자리부터 기이하고도 투명한 도가의 기운이 차오르며,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등선에 이른 고대의 선인들이 남겼다는 천도의 정수, '천선인과경(天仙因果鏡)'이 마침내 허물을 벗고 깨어난 것이다.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단순한 시각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과(因果)의 흐름을 보는 눈이었다.

적풍율이 휘두르는 붉은 도강의 궤적 너머로, 미세하게 얽혀 있는 기의 실타래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무공이 지닌 태생적인 한계, 진기의 흐름이 꺾이는 찰나의 틈새, 그리고 그가 딛고 있는 대지와의 불협화음까지도 투명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적의 살기가 거세질수록, 그 살기가 나아가야 할 인과의 궤적은 더욱 뚜렷한 실선이 되어 무령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만물이 태어나 소멸하는 데는 법도가 있고, 일어나는 모든 힘에는 거스를 수 없는 궤적이 존재한다. 적의 힘이 나를 향해 쏟아질 때, 그 힘의 시작과 끝을 읽어낸다면 부러진 검이라 한들 어찌 천하를 베지 못하겠는가.'

찰나의 내적 오달이 무령의 심상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차가운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닌, 영혼의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천도의 이치였다.

그러나 깨달음의 순간도 잠시, 객잔의 무너진 한구석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언니! 사매!"

가냘픈 목소리가 대기를 흔들었다. 무령의 고개가 강박적으로 돌아갔다. 타오르는 대들보 아래, 흙먼지와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그녀의 유일한 사매이자 태을파의 마지막 남은 불씨인 소월(小月)이었다.

소월의 뒤쪽에서 교활한 미소를 지은 혈기대 무사 한 명이 도검을 치켜든 채 그녀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무령의 차갑게 굳어 있던 심장이 요동쳤다.

'안 돼!'

그것은 이성이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의 분출이었다. 사매를 구해야 한다는 강렬한 연민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가 무령의 냉정하던 심상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무정(無情)만을 고집하며 가두어 두었던 마음의 빗장이 단숨에 부서져 내린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무령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끔찍한 제약이 발동했다.

"커흑……!"

전신의 기경팔맥이 불타오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천선인과경의 가혹한 대가, '인과반사(因果反射)'였다. 타인에게 연민이나 애정을 품고 도심적 유대를 맺는 순간, 기경팔맥이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진기를 태워 버리는 저주 같은 법도였다.

폐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에 무령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동료를 구하려 마음을 열 때마다 자신의 무학적 생명이 깎여 나간다는 잔인한 진실이 그녀의 뼈마디를 관통했다.

하지만 무령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으로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대지를 박차고 몸을 던졌다.

스스슥!

인과반사의 내상을 억누르며, 그녀는 소월을 향해 쇄도하던 무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러진 검 끝이 사선으로 치솟으며 무사의 목덜미를 가볍게 스쳤다. 단 한 줄기의 기운만으로도 적의 진기 흐름을 끊어내는 신묘한 검로였다. 무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령은 쓰러지는 무사의 품에서 힘없이 굴러떨어지는 물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소월의 옷자락에서 떨어져 나온, 미세하게 금이 가 있는 태을파의 부러진 옥패였다.

붉은 불길 속에서 그 옥패는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령의 천선인과경이 그 옥패의 내부에 숨겨진, 범상치 않은 인과의 실타래를 포착했다.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태을파의 멸문과 관련된, 그리고 사라진 태을전 지하 제단의 봉인을 풀 수 있는 거대한 심인(心印)이 숨겨져 있었다.

무령은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 속에서도 옥패를 움켜쥐고 소월을 자신의 뒤로 밀어 넣었다.

"소월, 내 등 뒤에서 떨어지지 마라."

"언니…… 피가, 피가 흘러요……."

소월이 눈물을 흘리며 무령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사매의 온기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무령의 심맥은 더욱 사납게 타들어 갔다. 인과반사의 고통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감정에 휩쓸린다면 적들의 칼날이 닿기도 전에 스스로 자멸할 터였다.

그때, 적풍율이 대도를 치켜들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사매라는 계집 하나 때문에 제풀에 무너지는구나! 그것이 정파 놈들이 외치는 가소로운 협(俠)의 한계다! 죽어라, 백무령!"

적풍율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혈랑강기(血狼罡氣)가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그리며 밤하늘을 뒤덮었다. 불타는 객잔의 잔해들이 그 위압감에 못 이겨 사방으로 폭발하듯 날아갔다. 일류 고수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주위의 모든 생명체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기세였다.

사방을 포위한 혈기대 무사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잔인하게 웃었다. 도저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위기였다.

그러나 무령의 눈동자는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천선인과경 속에서, 적풍율이 발출한 혈랑강기의 거대한 흐름이 수만 갈래의 미세한 인과의 실로 쪼개져 보였기 때문이다.

'적이 내뿜는 살기가 크면 클수록, 그 살기가 나아가야 할 인과의 궤적 또한 명확해지는 법.'

무령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그녀는 태을파 최고의 거동이자 무공인 '기정검(奇正劍)'의 도리를 일깨웠다.

상대의 의도를 역이용하는 기(奇)함과 천도의 올곧음을 관철하는 정(正)함이 하나로 융합되는 경지.

그녀의 손에 들린 부러진 청강검이 허공을 향해 천천히 들려졌다. 아무런 힘도 실려 있지 않은 듯한, 극히 평범하고 완만한 궤적이었다.

"부러진 검 쪼가리로 내 강기를 막겠다는 거냐!"

적풍율이 포효하며 대도를 내리쳤다. 혈랑강기가 무령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무령의 부러진 검 끝이 허공에 찰나의 점을 찍었다.

스으윽.

그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에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져 물길의 흐름을 바꾸는 것과 같았다. 무령이 뻗어낸 검 끝은 적풍율의 혈랑강기가 지닌 가장 취약한 인과의 교차점, 진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중심축을 정확히 꿰뚫었다.

쿠구구궁!

하늘을 뒤덮었던 붉은 강기가 기괴한 비명과 함께 왜곡되기 시작했다. 무령의 부러진 검 끝을 중심으로, 적풍율의 웅혼한 진기가 스스로의 궤적을 잃고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의 순리가 거꾸로 흐르듯, 적풍율이 내뿜은 살기는 고스란히 그의 몸을 향해 되돌아갔다.

"이, 이게 무슨……?!"

적풍율의 눈이 경악으로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내뿜은 강대한 힘은 고스란히 기정검의 도리에 얽혀 역풍으로 변했다. 청량한 도가의 진기가 부러진 검신을 타고 한 줄기 은빛 섬광이 되어 뻗어 나갔다.

파아아앗!

은빛 섬광은 적풍율의 붉은 강기를 단숨에 찢어발기고,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했다.

"커헉!"

적풍율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의 가슴팍에는 검은 그을음과 함께 기경팔맥이 완전히 뒤틀려 버린 흔적이 선명했다. 자신이 자랑하던 무공의 힘에 스스로가 당한, 기적적이면서도 처절한 역관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류한 진기의 여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포위망을 좁혀오던 혈기대 무사들을 휩쓸었다.

"으아악!"

"사, 살기가 역류한다!"

무사들은 제 무기에 스스로 상처를 입거나, 폭발하는 진기에 밀려나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불타는 객잔 앞마당은 순식간에 사파 무사들의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부러진 단검 하나와 천도의 인과를 꿰뚫는 눈으로, 백무령은 일류 사파 암습단을 단숨에 궤멸시킨 것이다.

무령은 검을 거두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입가에 묻은 붉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는 그녀의 전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월을 구하겠다는 감정의 대가로 치른 인과반사의 내상이 심장 깊은 곳을 갉아먹고 있었으나, 그녀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소월, 가자. 이곳은 곧 완전히 무너진다."

무령이 소월의 손을 잡으려던 찰나였다.

싸늘한 밤바람이 불타는 객잔의 열기를 단숨에 식혀버릴 듯 차갑게 불어왔다. 자욱한 연기와 안개 너머로, 기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타닥, 타닥.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절제된 수많은 인간의 발걸음 소리였다.

안개 속에서 푸른색 깃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웅장하면서도 서슬 퍼런 기세를 풍기는 깃발에는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상징인 창궁(蒼穹)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철갑을 두른 남궁세가의 정예 무사 수십 명이 잘 짜인 진법을 펼치며 불타는 객잔의 공터를 빈틈없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순백의 도포를 입고, 허리춤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하사한 보검을 찬 여인.

남궁세가의 둘도 없는 천재이자, 도덕적 완벽함 뒤에 처절한 위선을 감추고 있는 자. 진설화(陳雪華)였다.

진설화의 차가운 눈동자가 쓰러져 있는 사파 무사들과, 부러진 검을 쥔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백무령을 차례로 훑었다. 그녀의 칼자루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진설화가 검을 반쯤 뽑아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태을파의 생존자 백무령. 가문의 명에 따라, 너를 체포하겠다."

새로운 아수라장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무령의 천선인과경이 진설화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기이하고도 뒤틀린 인과의 실타래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