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안개가 피비린내를 품고 대지를 적시며, 허공을 찢고 강림하는 혈영신마 현무백의 압도적인 기세가 무위봉 전체를 짓눌렀다. 툭, 툭, 지상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은 단순한 빗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지에 닿는 순간 치익 소리를 내며 풀잎을 검게 태우는 탁하디탁한 마기의 파편들이었다.
백무령은 부러진 검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천선인과경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흐릿한 붉은 허공을 투명하게 갈라내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장포를 휘날리며 허공에 선 현무백의 전신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기맥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하하하! 고작 이 정도 위선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천하를 바로잡았다고 생각했느냐, 꼬마 도사여."
현무백의 목소리는 평범한 음성이 아니었다. 지축을 뒤흔들며 고막을 찢고 들어오는 괴이한 파동이었다. 구대문파의 젊은 제자들은 그 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몇몇 내공이 약한 가솔들은 입과 코로 검붉은 선혈을 뿜어내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은 단순한 포효가 아닌, 소리만으로 수십 리 안의 생명력을 도살하는 전대미문의 피의 가청 음파, 천마조혼음(天魔弔魂音)이었다. 음파가 스쳐 지나가는 무위봉 자락의 푸른 들풀들이 순식간에 수분을 잃고 시들어 가며, 멀리 보이는 민가의 가옥들이 기와지붕부터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크아악! 머리,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 이것이 정녕 인간의 무공이란 말인가……!"
사방에서 고통에 찬 신음과 비명이 교차했다. 정파의 명예를 외치며 백무령의 뒤에 섰던 남궁세가의 제자들마저도 그 가공할 마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백무령은 차갑게 식어가는 이성을 다잡았다. 타인의 고통을 목도하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인간의 감정은 나약한 덫이라 여겼거늘.'
과거 태을파가 멸문당할 때 겪었던 배신의 기억은 그녀에게 무정(無情)만을 강요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스러져 가는 이들을 향한 분노와 연민은 억누르려 할수록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경락을 타고 흐르는 인과반사의 고통이 심장을 쥐어짜듯 파고들었다. 전신이 불타는 듯한 내상이 가슴을 압박했지만, 백무령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고통은 더 이상 그녀를 무릎 꿇리는 저주가 아니었다. 타인을 구하고자 하는 굳건한 도심(道心)과 결합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품어 안는 거대한 협기(俠氣)로 화하여 뇌전처럼 온몸의 기맥을 관통했다. 무정의 껍질을 깨뜨리고 유정의 도리를 받아들이는 깨달음, 오달(悟達)의 광채가 백무령의 전신에서 푸른 도기(道氣)로 피어올랐다.
"무령 아가씨! 저 마물의 음공을 내버려 두면 이 산의 모든 생명이 진탕이 되어 죽을 것이오!"
제갈운이 예리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품 안에서 낡고 평범해 보이는 고목 목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것은 제갈세가의 가보도, 천하를 호령하는 신병이기도 아닌, 그저 오랜 세월 닳고 닳은 고목 벽뢰목(僻雷木) 목검이었다. 하지만 그 정체는 태을파의 영산이었던 무위봉에 존재하던 전설적인 신목, 건원신수(乾元神樹)의 마지막 잔재로 만들어진 영물이었다. 제갈운은 가문의 생존이라는 명목하에 위선에 동조했던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씻어내듯, 목검을 허공을 향해 높이 치켜세웠다.
"태을의 신목이여, 참된 도맥의 가르침을 따라 이 어둠을 정화하라!"
제갈운이 평생을 닦아온 순수한 성명진기(性命眞氣)를 목검에 아낌없이 불어넣었다. 웅장한 가문의 무공 대신, 오직 백무령이 보여준 의기에 동조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펼치는 신념의 일격이었다.
그 순간, 벽뢰목 목검에서 거룩하고 청아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마기를 밀어내는 태고의 신선한 기운이었다.
백무령은 주저하지 않고 천선인과경의 비기를 가동했다.
웅- 소리와 함께 그녀의 미간에서 투명하고도 눈부신 백색의 광륜이 뻗어 나갔다. 그 빛은 제갈운의 목검에서 피어오른 거룩한 신목의 연기와 결합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천선인과경의 인과의 실타래를 직조하는 힘이 그 연기를 매개로 삼아 기운을 천 배로 증폭시키고 수렴해 나간 것이다.
파아아앗!
찰나의 순간, 무위봉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하고 투명한 푸른빛의 반구형 방벽이 형성되었다. 태을방벽(太乙防壁)이었다.
현무백이 내뿜던 광포한 붉은 음파가 푸른 방벽에 부딪히는 순간, 콰아아앙! 하는 고막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방벽 내부에 있는 정파 제자들과 들풀들은 터럭 하나 상하지 않았다. 신목의 기운이 깃든 방벽은 마기를 완벽히 걸러내고, 오히려 대지에 맑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무, 무슨……! 사파의 음공을 완벽히 막아내다니!" "이것이 태을파의 진정한 무학이란 말인가!"
제자들의 경탄 속에서, 백무령은 천선인과경의 푸른 안광을 더욱 번뜩였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의 현무백을 지나, 땅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무림맹 장로들과 사파 습격자들의 시신으로 향했다.
"위선은 언제나 핏자국을 남기는 법."
백무령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공에 실려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흙바닥에 나뒹구는 사파 자객의 시신의 소매를 갈라헤쳤다. 그곳에는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된 피부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박쥐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그리고 무림맹의 원로들이여. 너희는 이 자들을 사파의 독단적인 습격이라 주장했으나, 이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녕 모른다고 할 것인가?"
무림맹의 장로 한 명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것은 무림맹 내부의 고위 전령들만이 공유하는 비전 신호기이자, 사파 혈기대와의 밀약을 증명하는 인장이다. 너희는 가문의 안위와 권세를 위해 태을파를 사파에 팔아넘겼고, 오늘 또다시 아군을 제물로 바쳐 생존을 구걸하려 했다."
백무령의 추상같은 일갈에 정파 제자들 사이에서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가문과 문파의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감추어져 있던 처절하고도 추악한 위선의 인과가 낱낱이 파헤쳐지는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진설화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문의 비전이자, 가주가 자식들을 절대적인 복종으로 구속하기 위해 심어둔 가혹한 구속구, 백맥쇄혼사(百脈鎖魂絲)가 그녀의 맥상을 파고들며 심장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설화가 가문의 위선을 거부하고 백무령의 편에 서려 하자, 체내에 잠복해 있던 독맥이 활성화되어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진설화의 손목 피부 아래로 검은 실 같은 독선들이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기경팔맥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설화!"
제갈운이 다급히 외쳤으나, 그 독은 외부의 내력으로 함부로 건드렸다간 즉시 심장을 파열시키는 절명독이었다.
백무령은 천선인과경으로 진설화의 손목을 직시했다. 미세하게 흐르는 독의 궤적, 그리고 그 독을 묶어두고 있는 인과의 매듭이 투명하게 보였다.
'보인다. 독의 흐름을 지배하는 기맥의 중심점이.'
백무령은 부러진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상대의 의도를 역이용하는 기(奇)함과 천도의 올곧음을 관철하는 정(正)함이 하나로 융합된 태을파 최고의 무학, 기정검(奇正劍)의 기운이 부러진 검신 위로 푸르게 응집되었다.
슈우우욱!
백무령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진설화의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검끝이 가리킨 곳은 설화의 심장이 아닌, 그녀의 손목 위 허공이었다.
"파(破)!"
나직한 기합과 함께 백무령의 부러진 검이 허공을 갈랐다.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 같으면서도 태산 같은 묵직함을 담은 검로였다. 검기가 진설화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살을 뚫지 않고 오직 내부에 흐르는 독선의 기맥만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팅! 하는 맑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진설화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구속구와 검은 독선들이 사방으로 부서져 나갔다. 기정검의 도리 아래, 가문이 채운 위선의 사슬이 단숨에 끊어진 것이다.
"컥……!"
진설화는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검은 피 한 모금을 토해냈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자신을 평생 옭아매던 수치스러운 구속이 사라졌음을 직감한 그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내, 내가 자유로워지다니……."
동료를 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백무령의 전신에 또다시 찌르는 듯한 인과반사의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고통의 불길이 일어나는 순간, 백무령은 그것을 억누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기정검의 기세로 온전히 승화시켰다.
고통마저도 검을 벼리는 숫돌로 삼는 초월적인 깨달음 속에서, 그녀의 내력은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솟구쳤다.
"네 이놈, 감히 내 장난감을 망쳐놓다니!"
허공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혈영신마 현무백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의 전신에서 핏빛 마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무위봉의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거대한 피의 손아귀를 형성하여 백무령을 향해 내리찍었다. 지상을 통째로 으스러뜨릴 듯한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러나 백무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천선인과경은 이미 현무백이 내뿜는 광포한 마공의 기맥 흐름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위협적이지만, 타인의 생명력을 강탈해 쌓아 올린 힘이기에 기맥의 연결부마다 미세한 균열과 불협화음이 존재했다.
"기(奇)로써 허점을 파고들고, 정(正)으로써 사악함을 벤다."
백무령이 부러진 검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검끝이 현무백이 내리찍는 피의 손아귀의 중심, 가장 기운이 약한 접점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갔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숲속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샘물처럼, 그녀의 검기는 부드럽고도 거침없이 마기의 장막을 뚫고 들어갔다.
콰과과광!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흩어진 것은 백무령의 검기가 아니었다. 현무백이 자랑하던 거대한 마기의 손아귀가 중심부부터 균열이 가며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백무령이 천선인과경으로 간파한 기맥의 흐름을 역류시켜, 현무백 자신의 살기가 도리어 그 자신을 치게 만든 것이었다.
"으윽! 이, 이럴 수가……!"
세계관 최강급의 무위를 지닌 혈영신마 현무백의 신형이 허공에서 크게 흔들리며 뒤로 대여섯 걸음 밀려났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되치기당하는 굴욕적인 타격이었다.
지켜보던 구대문파의 제자들과 세가 수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혈영신마를 상대로, 부러진 검을 쥔 젊은 여도사가 완벽한 우위를 점한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 찬 무림맹의 권위가 무너지고, 백무령이 보여준 참된 협도의 광채가 무위봉을 환하게 비추었다.
현무백은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의 붉은 안광이 극도로 사납게 이글거렸다.
"과연 천선의 기연을 얻은 자답구나. 하지만 꼬마 도사야, 네가 아무리 강한들 이 세상의 모든 인과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현무백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무위봉의 어둠 속에서 기괴한 기척들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기척이 아니었다. 마기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은 무림맹의 일부 원로들과 사파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검을 쥔 채, 방금 구속에서 풀려나 비틀거리는 진설화의 사방을 포위하고 나섰다.
"설화 언니!"
멀리서 소월이 비명을 질렀다.
정파의 원로 중 한 명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진설화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시퍼런 독기가 서린 비수가 들려 있었고, 그 비수는 설화의 하얀 목덜미에 닿아 미세한 핏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현무백이 지상으로 내려서며 악랄하게 미소 지었다.
"선택하거라, 백무령. 네가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저 여자의 목숨이냐, 아니면 네가 그 고결한 척 펼쳐대는 검로의 완성이냐? 네가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저 정파의 위선자들은 제 손으로 가문의 천재를 처단하게 될 것이다."
진설화의 목에 닿은 비수가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제갈운이 검을 쥐고 나서려 했으나, 원로들의 살기에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백무령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또다시 찾아온 가혹한 인과의 선택지 앞에서, 그녀는 부러진 검을 쥔 채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