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
비명과 사이렌이 뒤섞인 로비 한복판을 지훈의 서늘한 음성이 가르고 들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채 덜덜 흔들리는 간이침대 위, 20대 청년의 벌어진 복부 사이로 검붉은 혈액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혈압은 이미 50 이하로 곤두박질친 상황. 수술 장갑도 벗지 않은 채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황인국의 등 뒤로 지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황인국 교수."
지훈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자의 침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황인국이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충혈된 눈동자가 초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 강지훈……? 네가 왜 여기……."
"환자 배를 열어놓고 도망치는 게 세인트 미카엘 병원 초빙 교수의 집도 공식입니까?"
"말조심해! 수혈용 팩이 부족해서 잠시 대기하려던 것뿐이다! 이 환자는 이미 후복막 대동맥이 파열됐어. 생존율은 제로에 가깝단 말이다!"
황인국의 변명은 구차했다. 알코올과 미세한 약물 냄새가 그의 숨결에서 풍겼다. 지훈의 안경 너머 눈동자에 서늘한 멸시가 서렸다.
동시에 지훈의 망막 위에 붉은색 반투명 장부가 어둠을 찢고 강렬하게 떠올랐다.
[응급 환자: 복부 대동맥 파열 및 후복막 대량 출혈] - 현재 생존 확률: 0.8% - 집도의의 고의적 태만으로 인한 대동맥 박리 진행 속도: 초당 0.1mm - 인과율 개변 성공률 100% 고정 시 요구 대가: 집도자 수명 120일 차감.
[계약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지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무의식이 이미 '수락'의 궤적을 그렸다.
쿵!
가슴 깊은 곳에서 철퇴로 얻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심장 세포가 거칠게 사멸하며 폐포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 짓눌리는 듯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지만, 지훈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짓눌렀다. 남은 수명에서 다시 120일이 떨어져 나갔다.
"예준아, 서진아. 환자 제4외과 수술실로 이송한다."
"미쳤습니까, 강지훈 선생!"
그때 로비 한구석에서 정장을 입은 원무과 직원들과 행정처 소속 보안요원 서너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오만식 행정처장의 심복들이었다.
"이 환자는 정식 접수도 되지 않았고, 보증인도 없는 신원미상자입니다. 게다가 황인국 교수님의 담당 환자예요. 제4외과에서 임의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보안요원들이 간이침대의 바퀴를 붙잡으며 위압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지훈의 시선이 그들의 가슴팍에 달린 사원증으로 향했다.
"비켜라."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물리적인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지금 당장 이 환자의 이송을 1초 지체할 때마다 발생할 병원의 손실액을 계산해 주지. 이 환자가 로비에서 사망할 경우, 의료 유기 및 방치로 인한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 비용 최소 15억. 지상파 뉴스 보도로 인한 세인트 미카엘 브랜드 가치 하락 및 주가 폭락 추산액 280억. 그리고 방조죄로 당신들이 뒤집어쓸 형사처벌 기회비용까지."
지훈이 보안요원의 손목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착!
"그 모든 재무적 손실을 오만식 처장이 대신 메워줄 것 같나? 아니면 당신들 목숨값으로 때울 건가?"
"그, 그건……."
보안요원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돈과 법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그들의 조직적인 방어선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길 열어!"
백서진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침대 앞부분을 밀치고 나갔다. 한예준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엠부 백을 짜내며 지훈의 뒤를 따랐다.
"수혈 팩 있는 대로 다 제4외과로 올려! 황인국 교수가 남겨놓은 수술 기록지 전부 하이패스로 띄워라!"
예준의 지시에 응급실 간호사들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치려던 황인국은 로비 한복판에 멍하니 선 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전공의와 아웃사이더 의사에게 환자를 빼앗긴 꼴이 되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였다.
"어차피 죽을 환자다! 배를 열자마자 어시스트 라인 다 터져서 테이블 데스(수술 중 사망)할 게 뻔해! 어디 잘해봐라, 강지훈!"
황인국의 악에 바친 비명이 멀어졌다.
***
제4외과 수술실.
낡은 무영등 아래, 청년의 열린 복부가 드러났다. 황인국이 거칠게 찢어놓은 복막 사이로 시커먼 혈종이 가득 차 있었다. 바이탈 모니터는 경고음을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삐— 삐— 삐—!
"ABP(동맥혈압) 42/25! 하트 레이트(심박수) 140회! 전형적인 출혈성 쇼크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3분 안에 어레스트 옵니다!"
백서진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지훈은 이미 수술 가운을 걸치고 수술대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눈앞에 생사장부의 실시간 해석선이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얽히며 환자의 내부를 투영해 보여주고 있었다.
[실시간 분석: 후복막 하대정맥 및 신장 동맥 하부 대동맥의 4cm 종방향 파열. 후복막 혈종이 골반강까지 파급됨.] [인과율 정지 적분선 활성화: 대동맥 차단(Clamping) 허용 시간 최대 6분. 이 시간 내에 인조 도관을 문합하지 못할 경우 척수 괴사 및 신부전으로 사망 확률 100%.]
"예준아, 대동맥 겸자(Aorta Clamp) 준비해. 서진이는 석션 강하게 걸어."
"선배, 시야가 전혀 안 나옵니다! 피가 너무 고여 있어서 대동맥 기시부가 보이질 않아요!"
한예준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지훈은 묵묵히 손을 뻗었다. 장부가 가리키는 정확한 해부학적 좌표, 피바다 속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혈관의 위치가 그의 뇌 신경망에 직접 각인되어 있었다.
"보인다."
지훈의 손가락이 피 고인 구덩이 속으로 주저 없이 파고들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오직 감각과 장부의 공식만으로 대동맥의 박리된 벽을 찾아냈다.
"겸자 들어간다. 지금부터 6분 카운트다운해."
철컥!
지훈이 대동맥의 상부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순간, 뿜어져 나오던 피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어……? 잡혔어?"
한예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황인국이 그토록 헤매며 찢어놓았던 대동맥의 파열 부위가 지훈의 손가락 끝에서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완벽하게 고정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쉬이이이—
수술실 한구석에 위치한 마취기 및 의료 가스 공급 장치에서 미세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지훈의 안경 위로 붉은색 경고 마크가 점멸했다.
[경고: 산소 및 아산화질소 공급 라인 내부 압력 저하 발생.] [원인: 수입 불량 가스 밸브(시리얼 넘버: A-4921-X)의 미세 균열로 인한 마취 가스 누출.]
'A-4921-X.'
지훈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오만식 행정처장이 리베이트를 챙기기 위해 제4외과에 강제로 반입했던 바로 그 해외 수입 불량 가스 밸브의 시리얼 넘버였다. 2화에서 장부 구석 메인 프레임에 기록되어 있던 그 치명적인 불량 기기가 하필 이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선배! 마취 가스 압력이 떨어집니다! 환자가 수술 중에 깨어나거나 산소포화도가 급락할 수 있어요!"
백서진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수술실 공기 중으로 유해한 마취 가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환자뿐만 아니라 수술실 내의 의료진까지 가스에 노출되어 정신을 잃을 판이었다.
"예준아, 당장 우측 벽면에 있는 가스 공급 차단 밸브로 가라."
지훈이 메스를 쥐고 대동맥 괴사 조직을 도려내며 침착하게 지시했다.
"차단 밸브요? 그걸 잠그면 가스 공급이 아예 끊기잖아요!"
"그 아래쪽에 수동 바이패스(우회) 노브가 있을 거다. 시리얼 넘버 A-4921-X 라인을 잠그고, 수동 실린더 라인을 개방해. 내가 읽어주는 대로 조작해라. 3시 방향으로 반 바퀴, 그리고 아래로 두 칸."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압니까?"
"닥치고 돌려! 환자 살리고 싶으면!"
지훈의 포효에 예준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차단 밸브판 앞으로 달려갔다. 지훈의 지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예준이 노브를 정확히 조작하자, 쉬이이 하는 불길한 누출음이 멈추고 보조 가스 실린더가 매끄럽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산소포화도 그래프가 다시 안정적인 곡선을 그렸다.
"차단됐습니다! 압력 정상으로 복구!"
"좋아. 이제 본 게임이다."
지훈은 곧바로 인조 도관(Dacron Graft)을 집어 들었다.
남은 시간은 4분 15초.
종방향으로 길게 찢어진 대동맥을 잘라내고 인조 도관을 이식하는 수술은 통상적으로 최소 30분 이상이 소요되는 초고난도 작업이다. 그걸 단 4분 안에 끝내야 했다. 차단 시간이 6분을 넘어가는 순간, 환자의 하반신은 영원히 마비되거나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하게 된다.
서걱. 서걱.
메스가 괴사된 혈관 벽을 정밀하게 잘라냈다. 지훈의 손끝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니들 홀더(봉합 침 홀더), 4-0 프롤린."
"여기요!"
서진이 지훈의 손에 기구를 쥐여주었다.
지훈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수명 120일 차감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그의 육체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에 붉은 피안개가 끼는 것 같았고,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이 밀려왔다.
'버텨라. 여기서 쓰러지면 이 환자는 끝이다.'
지훈은 혀를 깨물었다. 입안 가득 고이는 비릿한 혈향이 일시적으로 정신을 깨웠다.
"선배…… 호흡이 너무 가빠요. 괜찮으신 겁니까?"
서진이 지훈의 비정상적인 천명음을 눈치채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지훈의 이마에서 흘러내려 눈을 가리려는 땀방울을 무서운 집중력으로 닦아냈다.
"닥치고 시야나 확보해. 라이트 더 밝혀."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손끝만은 기계처럼 일정했다.
한 땀. 두 땀.
실과 바늘이 0.5mm 간격으로 찢어진 대동맥과 인조 도관을 꿰메어 나갔다. 장부가 제시하는 인과율 개변의 완벽한 궤적이 지훈의 손끝을 강제로 이끌고 있었다.
참관실 창문 너머로, 황인국이 팔짱을 낀 채 비웃음을 흘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친 짓거리를 하는군. 저 속도로 저걸 어떻게 다 기워? 대동맥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실밥이 다 터져 나갈 거다. 멍청한 자식, 영웅 놀이도 적당히 해야지."
황인국의 조롱 섞인 혼잣말은 참관실 스피커를 통해 수술실 내부로 흘러들었다.
한예준이 참관실을 매섭게 노려보며 이빨을 갈았다.
"저 인간이 진짜……."
"예준아, 흔들리지 마라."
지훈이 낮게 읊조렸다.
"의사는 입으로 수술하는 게 아니다."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며 실을 묶었다. 타이어 투 타이어, 매듭이 강하고 정밀하게 내려앉았다. 마지막 문합 부위의 봉합이 끝나는 순간, 지훈이 외쳤다.
"클램프 오프(Clamp off). 서진이 석션 대기해."
"클램프 오프합니다!"
예준이 대동맥을 막고 있던 겸자를 천천히 풀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혈류가 지훈이 방금 이식한 인조 도관을 타고 세차게 흘러내려 갔다. 황인국의 호언장담대로라면 결합 부위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며 피바다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스으으……
혈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 한 방울의 미세한 누출도 없이, 새하얀 인조 도관은 붉은 혈류를 머금고 단단하고 완벽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삐—!
요란하게 울리던 경고음이 멈추고, 바이탈 모니터에 선명한 녹색 곡선이 그려졌다.
[ABP: 115/75] [Heart Rate: 82] [Oxygen Saturation: 99%]
"바, 바이탈…… 완전히 잡혔습니다!"
백서진이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한예준 역시 모니터와 환자의 복부를 번갈아 보며 넋을 잃었다.
스톱워치의 기록은 정확히 5분 48초.
황인국이 찢어놓고 도망쳤던, 생존율 1% 미만의 대동맥 파열 환자가 단 6분 만에 완벽하게 살아 돌아온 것이다.
참관실 창문 너머의 황인국은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마약 비리와 리베이트로 얼룩진 손으로 망쳐놓은 환자를, 이 아웃사이더 의사가 단 몇 분 만에 기적으로 되살려 놓은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했다.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참관실의 황인국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황인국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황인국 교수."
마이크를 통해 지훈의 목소리가 참관실로 흘러 들어갔다.
"수술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가서 오만식 처장에게 전하십시오. 당신들이 들여온 불량 의료 기기 시리얼 넘버 A-4921-X에 대해, 곧 정식으로 경제적 배상 청구서가 발송될 거라고."
황인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참관실 뒤쪽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하아……."
지훈은 그제야 수술대 가장자리를 붙잡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장부의 붉은 빛이 서서히 걷히며 환자의 생존을 알리는 청색 빛이 수술실을 메웠다.
살려냈다. 또 한 명의 생명을, 자신의 수명을 깎아서.
"선배, 정말 대단합……."
서진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지훈에게 다가서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제4외과 수술실의 낡고 무거운 붉은색 철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차가운 휠체어 바퀴 구르는 소리와 함께,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경호원 서너 명이 수술실 내부로 난입하듯 들어섰다. 수술실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다른 종류의 서늘함으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휠체어 위, 백발을 단정하게 넘긴 채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지훈을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인트 미카엘 의료재단의 절대 권력자이자 이사회 수장, 송원필 이사장이었다.
"과연 소문대로군, 강지훈 선생."
송원필이 휠체어 손잡이를 짚은 손을 까딱이며 늙은 뱀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등 뒤로 오만식 행정처장이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남의 집 안마당에서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만지는 버릇은 고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