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빨갛게 물든 법인 매각 가처분 신청서가 강지훈의 가슴팍을 거칠게 때리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종이 모서리에 쓸린 뺨에서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지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눈앞에 선 사내, 송원필 이사장의 사위이자 세인트 미카엘 재단 매각 이사회의 핵심인 민형식에게 꽂혀 있었다.

"수술은 성공했다지? 축하하네, 강지훈 선생."

민형식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비단결 같은 실크 넥타이를 매만지는 그의 손가락에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멧돼지처럼 복도를 가득 메운 채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어쩌나. 송원필 이사장은 의식 불명 상태가 길어질 것이고, 재단 이사회는 방금 전 임시 회의를 통해 세인트 미카엘 병원의 법인 매각 및 제4외과 폐쇄안을 전원 일치로 통과시켰네. 이 가처분 신청서가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 자네들의 모든 의료 행위는 불법이 되고 이 병원은 오늘 밤부로 매각 절차에 들어간다."

민형식의 구두 굽이 복도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도장의 문서들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살려놓은 환자는 우리가 다른 병원으로 처분하지. 자네들의 손발은 이제 완전히 묶였어."

지훈의 귓가에 이명이 몰아쳤다. 쇠파이프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듯한 기괴한 소음이 고막을 찢었다.

두통. 망막 뒤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과 함께 눈앞의 허공에 붉은색 글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잔여 수명: 10시간 12분]

심장 세포가 실시간으로 괴사해 가는 감각이 흉골 안쪽에서부터 뻐근하게 전해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지훈은 오히려 주먹을 꽉 쥐어 그 떨림을 짓눌렀다.

"처분한다고?"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수술실의 차가운 메스처럼,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목소리였다.

"환자가 물건입니까. 이송 도중에 바이탈이 흔들려 사망하면, 그 배상 책임은 누가 질 겁니까."

"배상? 하하하!"

민형식이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주변의 검은 양복들도 약속이나 한 듯 킥킥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강 선생, 착각하지 마. 법적으로 환자의 이송 결정권은 병원 이사회에 있어. 자네 같은 일개 페이닥터가 참견할 영역이 아니란 뜻이지. 몸값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병원 부지를 매각하는 판에, 고작 몇백만 원짜리 목숨값 소송이 두려울 것 같나?"

돈. 오직 돈뿐이었다. 이 자들의 머릿속에 든 것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평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강남 한복판의 병원 부지와 매각 대금의 분배율뿐이었다.

지훈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안광이 민형식의 얼굴을 꿰뚫었다.

"송원필 이사장의 현재 진단명, 뇌하수체 부근 미세 혈류 역행성 박리."

민형식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어떻게 자네가 그걸……."

"망막에 맺히는 혈류의 흐름과 안구 운동의 불일치, 그리고 경부 동맥의 비정상적인 박동만 봐도 알 수 있지."

지훈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며 시계를 확인했다.

"뇌하수체 문맥계의 혈류가 역행하며 뇌간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6시간 이내에 뇌사, 12시간 이내에 심정지입니다. 송원필 이사장이 사망하는 순간, 자네가 그토록 원하는 매각 법인의 지분 상속은 어떻게 되지?"

민형식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지훈의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차가운 미소였다.

"상속세율 50% 적용. 그것도 모자라 이사장 직속 우호 지분은 법적 분쟁으로 묶이겠지. 이사회가 공중분해 되고 소송 비용으로 날릴 재무적 손실액만 최소 3,200억 원. 자네가 챙길 수 있는 배당금은 반 토막 이하로 떨어집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이, 이 새끼가……."

"송원필을 살릴 수 있는 외과의는 대한민국에 단 한 명, 나밖에 없습니다."

지훈은 민형식의 가슴팍을 검지손가락으로 강하게 밀쳤다. 민형식의 거구 중심이 뒤로 쏠리며 꼴사납게 휘청였다.

"조건을 제안하지. 송원필의 긴급 무의식 생명 연장 수술을 집도해 주겠다. 그 대가로, 제4외과의 독자적 완전 분리 예산권 50%의 약정서를 작성해라."

"뭐라구? 예산권 50%? 미쳤나!"

"싫으면 관두십시오. 송원필을 그대로 죽이고, 3,200억 원의 손실을 떠안은 채 길거리로 나앉으면 됩니다. 선택은 자네 몫이지."

민형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지훈의 계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괴물에게, 지훈은 더 잔혹한 자본의 손실액을 청구서처럼 들이민 것이다.

그때, 닫혀 있던 복도 끝 비상구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제안, 거절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주버님."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백서진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가죽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의사 가운 대신, 날 선 정장 차림을 한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백서진? 네가 왜 여기……."

민형식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침을 삼켰다.

서진은 가방을 열어 두꺼운 서류 뭉치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민형식의 면전에 내던졌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종이들에는 빽빽한 숫자들과 세인트 미카엘 병원의 로고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세인트 미카엘 본관 지하 3층, VIP 의전실 내부 벽면 금고. 비밀번호는 우리 가문의 초대 이사장 취임일인 '19740512'죠."

서진의 목소리가 복도를 맑게 울렸다.

"아버지가 매달 가족 모임에서 취해 부르짖던 그 썩어빠진 의사 가문의 자랑거리. 그 금고 깊숙한 곳에서 내가 직접 꺼내온 겁니다. 송원필 이사장과 이사회가 공모한 불법 대선 투기 자금의 무역 실적 기재 장부. 그리고 VIP 비밀 회계 비리 장부의 기밀 경로 정보."

"너, 너 미쳤어?! 그게 어떤 문서인데!"

민형식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서진은 구두 굽으로 그의 손등을 가차 없이 밟아 뭉갰다.

"아아악!"

"손대지 마세요. 이미 사본은 검찰 기동 수사대와 금융감독원 특별조사국에 전송 완료되었습니다. 이 가처분 신청서로 제4외과를 닫고 병원을 매각하겠다고요? 해보시죠. 매각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도 전에, 이사회 전원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포승줄에 묶여 포토라인에 서게 될 테니까."

서진의 일갈에 복도의 검은 양복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민형식은 밟힌 손등을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이미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훈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민형식의 앞에 던졌다.

"수수료 0원의 생명 구원이다. 우리가 살려주는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자네들의 파멸을 막아주는 대가는 확실히 받아야겠어."

지훈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날렸다.

"지금 당장 법인 매각 및 제4외과 폐쇄안 영구 폐기 서류에 서명해라. 그리고 이사회의 자필 권리 포기 영수증을 작성해. 그렇지 않으면, 자네들의 그 화려한 자본 제국은 오늘 밤으로 끝이다."

민형식은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었다. 그가 서류에 서명하는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돈만을 아는 자본의 괴물들이, 자신들이 쌓아 올린 탐욕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서명이 끝나자마자, 지훈은 서류를 낚아채 서진에게 넘겼다.

"가시죠. 환자가 기다립니다."

"네, 지훈 선생."

서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훈의 뒤를 따랐다.

***

수술실로 향하는 통로, 한 사내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소아외과 최고의 서전이자 통계와 매뉴얼의 숭상자인 한예준이었다.

그의 손에는 병원의 정식 보급품이 아닌, 푸른색 광택이 도는 특수 카테터와 튜브 뭉치가 들려 있었다.

"늦었잖아, 강지훈."

예준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튜브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뭡니까?"

지훈이 묻자, 예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3중 장기 변위 수술이잖아. 뇌하수체 박리에다 종격동까지 혈류가 뒤틀려 있어. 일반적인 수혈 튜브로는 동맥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겠지. 그래서 내가 사비로 긁어왔다. 실리콘 코팅을 강화한 혁신적 기형 수혈 튜브 우회로다. 이걸 쓰면 동맥 지혈 시간을 정확히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

통계와 수치만을 믿는 예준이, 지훈의 무모한 수술을 돕기 위해 직접 특수 장비까지 구해온 것이다.

"고맙군."

"착각하지 마. 네가 쓰러지면 이 병원에서 나랑 겨룰 유일한 라이벌이 사라지는 거니까. 그것보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하나 더 확인해 둬야 할 게 있어."

예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오만식 그 인간이 예전에 반입했던 해외 수입 불량 가스 밸브 말이야. 수술실 구석의 메인 배관에 설치된 녀석의 시리얼 넘버가 'SV-2024-09X'더군. 미세하게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어."

지훈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SV-2024-09X.'

오만식이 사적으로 리베이트를 챙기기 위해 들여왔던 그 불량 가스 밸브의 시리얼 넘버였다. 장부 구석의 메인 프레임에 기록되어 있던 바로 그 위험 요소가, 이 중요한 수술실의 가스 배관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지훈이 묻자, 예준이 픽 웃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직접 수술실 메인프레임 우회 루트를 설계해서 불량 밸브가 연결된 가스 라인을 완전히 차단했다. 가스 공급은 보조 안전 라인으로 돌려놓았으니,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이나 마취 사고 위험은 제로다."

"완벽하군."

지훈은 예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마침내 세 사람의 시선이 수술실 문을 향해 모였다. 자본의 외압을 뚫고, 불량 장비의 위험을 제거하고, 마침내 순수한 생명 구원만을 위한 무대가 완성된 것이다.

***

수술실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수술대 위에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송원필 이사장이 누워 있었다. 모니터의 바이탈 신호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삐--- 삐--- 삐---.

"마취 가스 흡입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마취과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이 서둘러 지훈의 수술 장갑을 끼워주었고, 예준은 어시스트 위치에 서서 메스를 건넸다.

지훈이 메스를 쥐는 순간, 그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쿵! 쿵! 쿵!

심장이 가슴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는 이명 속에서, 망막 위에 거대한 피의 장부가 펼쳐졌다.

[인과율 강제 개변에 따른 등가교환 개시.] [환자: 송원필] [진단: 뇌하수체 미세 혈류 역행성 박리 및 종격동 3중 장기 변위] [수술 성공률 강제 고정: 100%]

그와 동시에, 시각화된 지훈의 수명 수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10시간 12분이었던 잔여 수명이 순식간에 분해되더니, 붉은색 경고 마크와 함께 전혀 다른 단위의 숫자가 박동하기 시작했다.

[!! 경고: 계약자의 생명력 한계 돌파 !!] [잔여 수명 재계산 중……] [최종 잔여 수명: 10일]

10일.

시간 단위가 아닌, 단 10일이라는 극단적인 시한부의 숫자가 지훈의 가슴팍에 낙인찍히듯 붉게 타올랐다. 수술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의 생명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것이다.

입가로 비릿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지훈은 마스크 속에서 피를 삼키며 메스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수술, 시작합니다."

지훈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메스가 송원필의 피부를 향해 거침없이 내리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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