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제발 스스로를 이만 죽이세요! 왜 남을 살리기 위해 당신이 죽어야 하는데요? 송원필은 당신을 파멸시키려 했던 사람이에요! 왜 그런 인간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냐고요!"

백서진의 절규가 사방이 타일로 둘러싸인 차가운 세면실 벽면에 부딪혀 날카롭게 흩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지훈의 수술복 소매를 짓이기듯 움켜쥐고 있었다. 라텍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악력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했고,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가슴팍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이 초록색 수술포를 짙은 얼룩으로 물들였다.

지훈은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는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채, 가만히 서진의 젖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귓가를 찢는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시야 한구석에 붉은 핏빛으로 명멸하는 회계 장부의 글자들이 지훈의 호흡을 옥죄어 왔다.

[계약자의 남은 수명: 11시간 12분.] [송원필 인과율 개변 필요 수명: 9시간.]

단지 아홉 시간. 수술을 끝마치고 나면 지훈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두 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흉골 안쪽을 둔탁하게 때려댔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비릿한 혈향이 역류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훈은 턱 끝에 힘을 주어 그것을 강제로 삼켜냈다.

지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소리보다 낮고 고요했다.

"백 선생."

"듣지 않을 거예요. 당장 수술 취소해요. 한예준 선생한테 넘기든, 다른 병원으로 트랜스퍼를 보내든……."

"삼백만 원이었습니다."

서진의 애원이 툭 끊겼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가 떨림을 멈추고 지훈을 향했다.

지훈은 젖은 손을 털지도 않은 채, 거친 타일 벽 너머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십여 년 전, 어느 차가운 응급실 바닥에 닿아 있었다.

"내 어머니가 응급실 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 병원 행정처가 요구했던 보증금 액수입니다. 삼백만 원이 없어서 수술실 문턱도 밟지 못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심장이 멈췄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지훈의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 슬픔이 아니라, 뼛속 깊이 각인된 거대한 분노와 타협 없는 의지였다.

"돈 때문에 사람의 목숨값을 매기는 이 더러운 세상에 굴복하지 말라고. 의사가 되었다면, 네 눈앞에 있는 목숨은 그 어떤 가치와도 바꾸지 말고 살려내라고. 그것이 내 어머니가 바친 마지막 기도이자, 내가 이 지옥 같은 장부와 계약한 유일한 이유입니다."

지훈은 서진의 손목을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으로 떼어냈다.

"송원필이 내 적이든, 악마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살아야 세인트 미카엘의 부패를 온천하에 증명할 수 있고, 제4외과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앞에 누워 있는 환자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가리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내 어머니를 죽인 저들과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잖아요!"

"안 죽습니다."

세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초록색 수술모를 눌러쓴 한예준이 수술용 가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안경테 너머로 지훈의 떨리는 손끝과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매섭게 훑어 내렸다.

"강지훈, 꼴사납군. 제 목숨 갉아먹는 천재 코스프레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지?"

예준이 한 걸음 걸어 나오며 가위를 가볍게 돌려 쥐었다. 금속 마찰음이 팽팽한 공기를 가르고 울렸다.

"송원필의 뇌하수체 부근 미세 혈류 역행성 박리. 지주막하 출혈(SAH)까지 동반된 최악의 케이스다. 네가 혼자서 장부인지 뭔지 하는 미친 짓거리로 인과율을 비틀며 집도했다간, 봉합하기도 전에 어레스트로 네 심장부터 멈출 거다."

예준은 지훈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절반은 내가 가져간다."

지훈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예준 선생, 이건 내 수술입니다."

"착각하지 마. 널 위해서 하는 짓이 아니니까."

예준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여기서 쓰러지면 제4외과는 공중분해 된다. 그리고 나는 너를 실력으로 완벽하게 꺾고 내가 최고라는 걸 증명해야 해. 네가 이런 허무한 자살극으로 도망치는 건 눈 뜨고 못 봐준다. 크레니오토미(개두술)와 듀랄 인시전(뇌경막 절개), 그리고 실비안 디섹션(뇌외측구 박리)까지 최단 경로의 절개선은 내가 직접 인계받아 대리 절단한다. 내 정밀 가위 기교가 네 그 대단한 장부의 오차율을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는지 통계적으로 증명해 주지."

지훈은 예준의 눈빛을 읽었다. 오만함 속에 감춰진, 동료의 죽음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외과의로서의 서슬 퍼런 투지.

백서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가겠어요. 어시스트로서 단 1밀리리터의 불필요한 출혈도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석션과 시야 확보는 제가 완벽하게 책임질 테니까, 강 선생은 오직 최종 마이크로 수처(미세 봉합)에만 집중하세요. 당신의 수명을 단 1초도 낭비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지훈은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과거의 그는 언제나 홀로 싸우는 독존자였다. 아무도 믿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수명을 깎아 고립무원의 수술을 성사시켜 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이들은 달랐다. 자신의 등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목숨을 공유하는 동지들이었다.

지훈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좋습니다. 집도 시작합니다."

***

세 사람이 수술실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붉은 경보등 뒤로 거친 발소리들이 사방을 메웠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수십 명이 수술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송원필 재단 이사장이 임시로 파견한 사법 경비대와 오만식 처장의 잔당 세력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행정처 기획실장이 면허 정지 처분 통지서를 들어 올리며 지훈을 노려보았다.

"강지훈 선생! 복지부에서 송달된 의사 면허 효력 정지 행정처분서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시간부로 의료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당장 수술실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무자격 의료 행위 및 주거침입죄로 현행범 체포하겠습니다!"

사법 경비대원들이 지훈을 향해 위압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지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혹한 설계자의 미소였다.

"체포? 재미있군. 당신들이 지금 막아서고 있는 수술실 안의 환자가 누구인지 잊었나 본데."

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기획실장의 눈을 꿰뚫어 보았다.

"환자는 송원필 이사장이다. 그리고 이 수술이 1분 지연될 때마다 뇌세포는 초당 수백만 개씩 사멸하지. 수술 지연으로 인한 이사장의 영구적 뇌 손상 혹은 사망 시, 그로 인해 발생할 재단의 주가 폭락 및 법적 배상 책임은 최소 4,2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이 배상 청구서를 당신들 개인 계좌로 청구해 줄까?"

기획실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이때 서진이 자신의 스마트 패드를 사내들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패드 화면에는 붉은색 격자무늬와 복잡한 계좌 내역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당신들이 믿고 있는 오만식 처장은 이미 기동수사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서진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 아버지가 세인트 미카엘 VIP 비밀 금고, 이사장실 뒤편 서재 세 번째 벽면 뒤 공간에 보관하고 있던 진짜 회계 장부의 금융 거래 내역입니다. 오만식과 송원필이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기며 사들인 불법 비자금 세탁 경로가 여기 전부 기록되어 있어요. 그 장부의 총액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무려 3,200억 원입니다."

사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지훈이 수술실 벽면에 설치된 환기 가스 파이프라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게다가 오만식이 리베이트를 챙기기 위해 병원 내로 반입한 해외 수입 불량 의료 가스 밸브. 시리얼 넘버 `[NO-G2048-X]`. 바로 이 구역 환기 라인에 설치된 물건이지. 미세 가스 누출로 인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당신들 머리 위에 설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세인트 미카엘의 브랜드 가치 손실액은 조 단위를 넘어선다."

지훈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기획실장의 멱살을 잡을 듯이 몰아붙였다.

"우리가 수술실로 들어가 이 모든 비리의 증거인 송원필을 살려내고 장부를 법원에 제출하는 것을 막겠다면, 지금 당장 날 쏘든가 체포해라. 하지만 그 순간, 당신들 모두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도 갚지 못할 천문학적인 배상금 무덤에 묻히게 될 거다. 선택해라. 돈의 노예들아."

정교하게 계산된 경제적 파멸의 공포. 단순한 도덕적 질타가 아닌,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지훈의 역방향 압박에 사법 경비대원들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기획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면허 정지 서류를 떨어뜨렸다.

"비키세요."

예준이 사내들을 거칠게 밀쳐내며 수술실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차가운 공기와 함께 질식할 것 같은 수술실의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마취 도입 완료. 바이탈 유지 중이나 메인 아테리 박리로 인해 혈압 지속 상승 중!"

마취과 의사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모니터의 심박수가 140을 상회하며 가파르게 치솟았다. 수술대 위에는 송원필 이사장이 머리를 고정당한 채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지훈이 수술대 앞에 서자, 그의 망막 위로 생사장부의 푸른색 시각 정보 패널이 거대하게 펼쳐졌다.

[환자: 송원필 (남, 68세)] [진단명: 뇌하수체 미세 혈류 역행성 박리 및 지주막하 출혈] [현재 수술 성공률: 3.8%] [인과율 개변 필요 수명: 9시간]

지훈의 심장이 비정상적인 부정맥을 일으키며 덜컥 내려앉았다. 고열이 전신을 엄습했고, 코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마스크 안쪽을 적셨다. 이명이 머릿속을 찌르는 통증과 함께 밀려왔다.

지훈이 장부에 수명을 지불하려던 찰나, 예준의 손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강지훈. 여기부터는 내 구역이다."

예준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마이크로 가위와 메스를 양손에 쥐고 송원필의 두개골 절개선 앞으로 다가섰다.

"메스."

예준의 손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계와 매뉴얼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그의 움직임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피부 절개부터 측두근 박리까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최단 경로를 찾아 들어갔다.

"석션!"

서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미세한 출혈조차 발생하기도 전에 서진의 흡인기가 피를 빨아들이며 완벽하게 깨끗한 시야를 유지해 냈다. 두 사람의 호흡은 수백 번을 맞춘 것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지훈의 눈앞에서 경이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한예준의 정밀 절개 적용: 수술 오차율 42% 감소.] [백서진의 완벽 흡인 적용: 시야 확보율 98% 도달.] [현재 수술 성공률: 12%... 28%... 45% 상승!] [인과율 개변 필요 수명: 9시간 -> 1시간으로 단축!]

지훈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해내고 있었다. 지훈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동지들의 초인적인 기교와 완벽한 협력이 인과율의 궤도를 강제로 수정하고 있었다. 지훈의 수명 소모가 기적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강지훈, 지금이다! 메인 아테리 문합부 진입 완료! 여긴 네 몫이다!"

예준이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확보한 수술 시야는 완벽했다.

지훈은 심호흡을 하며 마이크로 포셉과 바늘 홀더를 쥐었다.

[인과율 개변 활성화: 수명 1시간 차감.] [최종 수술 성공률: 100% 고정.]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의 손끝이 신의 영역에 닿은 듯 움직였다. 0.1밀리미터 굵기의 초미세 봉합사가 송원필의 터진 뇌하수체 동맥 박리 부위를 부드럽고 신속하게 감싸 안았다.

한 땀, 두 땀.

지훈의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역류하던 혈류가 정상적인 궤도를 찾으며 차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모니터의 불규칙하던 심음이 이내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리듬으로 바뀌었다.

삐--- 삑--- 삑---.

"바이탈 안정화! 출혈 완벽히 잡혔습니다! 수술 성공입니다!"

마취과 의사의 감격 어린 외침이 수술실 안에 울려 퍼졌다.

예준은 가위를 내려놓으며 바닥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은 지훈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거즈로 닦아내며, 마스크 너머로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훈은 자신의 망막에 떠오른 장부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술 성공률 100% 달성.] [계약자의 잔여 수명: 10시간 12분.]

지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혼자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등 뒤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불멸의 기술 형제단이자 진짜 동지들을 얻은 것이다. 이 차가운 병원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기적이었다.

***

지훈이 수술복을 벗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공기는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복도 바닥에는 붉은색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법인 문서들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다시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한 남자가 차가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지훈을 향해 걸어왔다. 송원필 이사장의 사위이자, 재단의 실질적인 후계 구도를 노리는 법인 매각 이사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손에는 법원의 직인이 찍힌 결정서가 들려 있었다.

"수술은 성공했다지? 축하하네, 강지훈 선생."

남자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문서를 지훈의 가슴팍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어쩌나. 송원필 이사장은 의식 불명 상태가 길어질 것이고, 재단 이사회는 방금 전 임시 회의를 통해 세인트 미카엘 병원의 법인 매각 및 제4외과 폐쇄안을 전원 일치로 통과시켰네. 이 가처분 신청서가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 자네들의 모든 의료 행위는 불법이 되고 이 병원은 오늘 밤부로 매각 절차에 들어간다."

남자의 눈빛에 잔인한 승리감이 감돌았다.

"살려놓은 환자는 우리가 다른 병원으로 처분하지. 자네들의 손발은 이제 완전히 묶였어."

남은 시간 10시간 12분.

마침내 환자를 살려냈다고 믿었던 순간, 병원을 통째로 공중분해 시키려는 거대한 재벌가 후계자들의 마수가 지훈과 동지들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복도에 깔린 붉은 경보 문서들 위로 차가운 절망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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